네 권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어제까지해서 약 4-5일간에 겨우 마칠 수 있었다. 내 평소의 속도보다는 좀 늦은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또 책읽기가 힘든 때가 있었고, 무엇보다도 내용을 좀더 집중해서 읽어야 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읽고 난 지금에도 역시 무엇인가의 의미를 찾기에는 너무 버겁다. 하루키의 소설 전반에서 보여지는 왜곡, 뒤틀림, 섹스 이런 주제들은 이제 익숙하지만서도, 평론가나 역자들이 주렁주렁 달아놓은 후기에서 언급되는 그 수많은 의미들은 나에게 보이지 않는다, 아직까지도.
그래서 한번 생각을 했다. 혹시 정작 하루키는 말 그대로, 표현 그대로의 판타지를 썼는데, 그것이 받아들여지는 단계에서 reader와 평론가들에 의해 '왜곡'되어, 무엇인가 깊고 큰 함축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만약에라도 그렇다면, 그는 큰 웃음을 감추면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혼자 있을때마다 ㅋㅋ 거리면서 주체되지 않는 웃음을 한껏 터뜨리면서 입이 근질근질해서 견딜 수 없을 것이고, 그때마다 또 다른 작품을 써내려가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또 하나의 책이 발표되면 문단에서는 또다시 오! 무라카미 사마! 하며 찬사를 이어가고, 또다시 잃어버린 시대니, 자아니, 아버지상이니, 상실이니 하면서 써내려가는 것이다.
만약, 정말이지 만약에 그런 것이라면, 작품 전반에서 보여지는 지난 작품이나 주제의 expansion이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순전히 나의 망상에 의한 것이겠고, 하루키의 작품에는 실제로 작가가 경험하고 생각한 그 무엇들이 시공간의 왜곡, 인간관계, 내면, 대화 이런 것들을 통해 우러나오고 있다. 그러니 웃고 말자, 내가 한 말은.
여기에서도 어김없이 한 중년 남자, 그의 아내, 그리고 옆집 십대소녀, 시공간의 굴절과 왜곡, 꿈의 세계와 현실세계의 mixing, 그리고 내면과 외면의 mix-up이 스토리를 끌어가고 있다. 물론 실상은 그런 것들보다 더 깊고 심오하겠지만, 나의 원시적인 두뇌는 그런 것들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있다. 무엇인가 감은 잡고 있지만, 한번에 그런 것들을 짚어낸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훗날 또 읽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때에는 좀더 다른 리뷰를 쓸 수 있을 것 또한 분명한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