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일에 치이고 이런 저런 복잡한 일이 많았던 2020년을 수습하는 2021년의 첫 분기가 거의 끝나가는 지금, 문득 서재에 페이퍼를 쓰지 못한 것이 떠올라 그간 정리하지 못한 책을 찾아봤다. 만화책이 포함된 숫자라고 해도 꽤 많이 밀린 것을 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이야기들이 쌓여 있었다. 


가끔 북플에 올라오는 7-8년 전에 쓴 글을 보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괜찮아 보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이미 지금의 내 글은 너무 단편적이고 동어반복 같기도 하며 뭔가 나사가 많이 풀어진 느낌이다. 가끔은 너무 억지로 쥐어짜내는 듯한 것 같기도 한데, 나이를 먹을수록 머리가 무거워지는 탓이 아닌가 싶다. 


정치적인 비평은 아주 화가 날 때가 아니면 하지 않게 되는 건 지쳤기 때문이다. 마음도 생각도 변한 건 없는데 점점 더 희망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만 독야청청이란 건 아니지만.


한국의 검찰을 보면 독립적인 기관으로써 존재하기 보다는 권력에 기생하면서 함께 떡고물을 나누는 것을 더 선호하는 것 같다. 누가 정권을 잡아도 '검찰'이 살면 그만이고 죄인을 만들수도 있고 120%의 증거도 무시하고 무혐의로 결론을 낼 수 있는 힘이 있는한 검찰을 그만두더라도 1-2년이면 평생 벌고도 모자랄 돈을 벌 수 있으니 과연 '독립'보다는 행정권력에 붙어가는 걸 원할 수 밖에 없다. 검경수사권의 분리, 공수처설립을 넘어 전권대우에 대한 강력한 법의 처벌과 제재가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는 검찰과 법원 두 기관의 밥버러지들의 밥줄을 끊어버리는 조치가 될 것이라서 아마 매우 어려울 것 같다. 


검찰은 그러다고 해도 판사를 하던 사람이 변호사로 개업하는 건 좀 막았으면 한다. 이건 마치 시합에서 심판을 보던 사람이 어느 날 선수가 되어 그라운드로 올라온 후 과거의 경력을 바탕으로 온갖 유리한 특혜를 받아 넘어지면 패널티킥이 나오는 꼴인데 그게 당연한 것이 한국이고 법원이며 판사들이라니. 검찰의 무소불휘의 권력남용과 오용, 정치개입, 언론결탁과 함께 한국의 법치가 엉망이 되는 원인이 되는 이 행태가 사라지려면 여러 모로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다. 배심원제도가 확대되고 정립되어 판사가 '사실관계'를 좌지우지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시작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다른 책을 구하면서 조금씩 꾸준히 사들여 읽는 것으로 하나씩 모으고 있는 '맛의 달인'은 정작 남들이 읽던 시기를 훨씬 지난 지금 보는 것이라서 '맛'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무슨 역사책을 읽는 기분이 종종 든다. 내 기억에 한때 유행하던 수많은 '맛'블로거들이 단골로 quote하는 만화들 중 하나였던 것 같은데 이젠 떨거지들은 다 사라지고 만화만 남았으니. 


'마리아주'는 스토리를 너무 늘어뜨리는 것 같아서 '신의 물방울'초기의 그 집중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다. '신의 물방울'자체도 나중에 가면 마치 대본소 만화를 보는 듯 한 권에 매우 짧은 이야기가 길게 저며진 형태로 펼쳐졌던 지겨움이 있는데 그걸 다시 이어가는 기분. Refernece되는 와인은 늘 새롭고 훌륭하지만 접근은 거의 어려운 고가의 와인이거나 빈티지 자체가 희귀한 것이 대부분이라서 생각해보면 시리즈를 통털어 봐도 만화에서 다룬 와인을 직접 마셔본 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빨리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리즈.


책읽기가 시들하던 연말이 그대로 이어진 2021년 1월. 힘겹게 겨우 한 권씩 읽어가며 온갖 걱정으로 시름이 가득하여 책을 읽어도 기쁜 줄 모르던 나에게 온 책.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늘 새로운 책에 대한 에피소드가 반가웠던 일상의 이야기를 보면서 '심야식당'의 '다시 빨간 비엔나 소시지'처럼 '다시 책'으로 가는 평생의 여정의 마음을 다잡게 한 책. 출판사별 문학시리즈의 첫 권이 무엇인지에 따라 각기 지향하는 '문학'의 이야기를 discuss하는 부분이 특히 기억에 남을 수 밖에 없는 건 이 책을 읽고 내 보유도서를 확인한 후 몇 군데의 문학시리즈 첫 권을 주문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니겠지, 아닐거야). 책을 읽다보면 이런 지적인 유희를 즐기는 경우가 가끔 있는데, 예를 들면 내가 '위대한 갯츠비'를 여러 출판사의 판본으로 갖고 있는 것도 그런 유희의 하나라고 본다. 이와 함께 좋아하는 작가를 전작하는 것 또한 독서의 즐거움이니 책에 대한 책도 이렇게 좋은 이야기로 계속 나와주어야 하는 이유가 되겠다. 책에 대한 판타지와 책을 모아들이는 삶에 대한 '허락'과도 같은 그런 든든한 지지는 지칠 때 큰 힘이 될테니까.



비슿한 시기에 읽은 '내내...'는 예전에 '독서독인'과 몇 권인가의 다른 책으로도 접한 바 있는 작가의 책이다. 그땐 달리 어떤 사람인지 생각하고 본 건 아닌데 자서전 같기고 한 이 대담집을 보니 작가의 특이한 이력과 삶에 눈이 간다. 평생 영남권에서 살고 공부하고 가르치면서도 영남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 중의 꽃, 근혜님 꽃'의 곡학아세의 그들과 멀리 떨어져 있는 진정한 아웃사이더라고나 할까. 원래 대담집 형식은 좋아하지 않지만 이때의 나에게 괜찮게 다가온 책. 평생 읽고 쓰고 생각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걸 다시 한번 떠올렸다. 


나이를 먹을수록 technology에도 꾸준히 시간을 투자해야 뒤떨어지지 않을 것이지만 이에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아날로그 감성을 유지하면서 종이에 찍힌 활자와 멀어지지 말아야 함을 알고 있으니 부단히 노력할 일이다. 보통 일이나 운동이나 배움이나 '하기 싫은 것', '불편하게 하는 것,' '어려운 것'을 두배로 하라는 말이 있는데 여러 모로 삶에 통용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편한 것만 하면 근육이 자라지 못하는 건 뇌에도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래봤자 책...'에서 넘어온 책. 늘 그렇게 책에서 책으로 옮겨다니는 걸 하게 되는데 책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다시 책읽기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온 건 이번이 처음일지도 모르겠다. 요리하는 사람이 지근거리에 책을 두고 틈틈히 읽어온 에세이를 모은 책으로 '기획'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친구가 책을 가져다 주고, 이를 읽고, 쓰게 만든 후, 다시 올리고, 이후 책으로 만든) 글에서 나오는 진솔함이 내가 종종 읽게 되는 '기획'성이 짙은 책들과 완전히 달랐다. 오랜 시간을 한 직업에서 머물며 이제는 master chef가 된 저자가 요리에 얽힌 책을 읽고 남긴 걸 보면서 문득 요리의 세계와 요리를 다룬, 이 책에서 언급된 수많은 책들을 하나씩 찾아서 보관함에 담기 시작했으니 병세가 호전되긴 애초에 글러버린 것이다. 잔잔한 이야기들과 함께 본낸 행복한 시간이었다.


'과학하는 사람들' 팟캐스트에서 다뤘고 직접 나온 저자의 방송을 듣고 구한 책. 수포자, 수알못을 넘어 대학 때 이공계 빌딩 근처에도 가기 싫어서 멀리 돌아서 다닌 나의 후회는 이공계 관련 책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아주 늦은 지금의 나이에 다시 발현되고 있다. 하지만 노력과는 별개로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더 많은데, 그저 읽는 과정에서 일종의 뇌운동을 하면서 익숙하지 아니한 이야기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에 만족하고 있다. 불편하고 이해하지 못하니 더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바탕에 있기 때문에. 


이 책은 본격적인 과학보다는 천문학자가 쓴 에세이라고 보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어려운 이야기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천문학이 묻어나오는 정도로 전혀 거부감이 없이 재밌게 있을 수 있었다. 언젠가는 이형렬씨처럼 2000권 정도의 과학책은 읽어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이해를 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거의 하지 않겠지만.

















즐겁게 읽고 있는 Witcher시리즈. 게임도 조금 해봤는데 요즘은 게임에 집중하는 것이 어렵고 learning curve를 넘기 전에 그만두곤 한다. 어쩌면 레트로게이밍의 붐에는 이런 이유도 있을 것 같다. 새로운 게임이 즐겁고 신기하지만 뭔가 배우지 않고도 즐거움을 느끼은 과거의 단순한 게임을 찾게 되는 것. 근데 막상 보면 레트로를 하는 사람들은 새 게임도 잘 갖고 노는 것 같으니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다. 앞의 두 권은 'The Last Wish'와 함께 prequel과 외전이 섞여 좀 loose하게나마 시리즈로 이어가는 'Blood of Elves'의 배경을 준다. 사이트마다 다르지만 PC게이밍의 순서로는 그래서 이들 세 권을 먼저 읽고 numbering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권하고 있기에 내가 읽은 순서는 이를 따랐다. 풍부하고 깊은 스토리에는 다양한 동서양의 모티브가 들어있는데 게임이 작품을 유명하게 만든 특이한 사례를 보여주며 넷플릭스의 시즌 1은 아직 제대로 된 떡밥조차 깔지 못한 극히 일부의 이야기만 을 다뤘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한국어 번역도 구하고 싶은 괜찮은 판타지라고 생각한다.


둘 다 짧은 책인데 '딱 하나만...'은 나의 모습을 보는 듯하여 아주 즐겁게 보았지만 '오키나와...'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그저 하와이를 좋아하니 여기도 가보면 좋겠다는 정도. 오키나와는 일본 가라테의 원류가 되는 중국의 남파권법, 아마도 백학권계열의 권법이 넘어온 곳으로 무술사적인 의미도 있지만 사실 독립적인 나라로 오래 지내온 류쿠왕국의 역사와 문화가 정말 흥미로운 곳이다. 제주도와 어떤 교류 혹은 역사의 관련이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한데 두 곳의 사람들 다 돼지고기를 좋아하고 본토의 스모와는 완전히 다른, 한국씨름과 흡사한 각저무술/놀이를 즐기는 것도 우리와 비슷하다. 이 책에서는 그저 사진에 곁들인, 나에겐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글이 전부였다. 헌책으로 구했음에도 아까운 건 저자에겐 좀 미안하지만...


간만에 추리소설을 한 권 읽었다. 사무실을 차리고 한창 추리소설을 구해서 읽으면서 어린 시절의 '한'을 달래던 2012년부터의 4-5년이 지난 후 번역된 classic을 제법 섭렵하고 보니 이젠 현대로 넘어와야 하는 시기가 되었다. 고전추리소설과는 달리 매우 전문적이고 보다 더 복잡하고 logical한 발전적인 면도 있지만 현대소설보다는 고전이 더 좋아서 요즘은 추리소설을 읽는 경우가 드물다. 


이 책은 언젠가 한번 본 것 같은 고전에 속하는 작품인데, 모노클이 인상 깊게 남은 귀족탐정이 주인공이다. 어릴 때 본 '~백과' 따위의 시리즈들 중 추리소설백과 혹은 유사한 책에서 이 탐정을 다룬 기억이 있는데 내가 알기로 모노클을 쓰는 귀족출신의 탐정은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라서 이 사람이 맞을 것이다. 


지금의 스마트폰 이상 거의 모든 사람이 매일 손에 쥐고 열심히 들여다 본 존재는 책과 잡지보다도 신문이었을 시절이 배경이고 광고문구를 이용한 마약판매에 얽힌 살인사건을 잘 풀어낸 작품


복잡하고도 복잡한 의식의 흐름에 따른 서술전개. 비트세대의 문학이라서 그런지 유독 이곳의 할아버지들의 인생소설로 꼽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책 후기에 해제가 세 꼭지가 들어갈 정도로 난해하다면 난해한 이야기. 나 또한 잘 이해하지는 못했고 요즘의 난 책에 깊이 공감하거나 자신을 투영하지 못하고 shallow한 독서를 이어가고 있어서 더더욱 쓸 말이 없고 그래서 너무 아쉽다. 예전에 쓴 글을 보면 책과 삶을 잘 이어서 뭔가를 떠올린 것 같은데 지금은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어려울 정도로 일상에서나 무엇에서나 열정이 없는 것 같다. mid-age crisis가 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란 이런 것인가.


개발새발 겨우 정리란 걸 했다. 다시는 밀리지 않겠다고 다짐하고는 있으나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언젠가 또 권수가 밀려 이런 일을 반복할 것이란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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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균호 2021-03-20 09: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정말 고맙습니다. 제 책을 말씀해주셔서요.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 박홍규 교수님은 제 은사님이세요. 제가 활동한 인권동아리 지도교수님이었고 제 부전공 과목인 법학을 가르쳐주신 은사님이시기도 하고요. 노동법과 사회법 전공이십니다. 지금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시죠. 재미난 것은 <녹색 평론>의 발행인 김종철 교수님과 다툼이 있었는데 김종철 선생님은 서울로 박홍규 교수님은 시골로 돌아가셨다는 것이 좀 아이러니 합니다.

transient-guest 2021-03-23 01:36   좋아요 0 | URL
‘명사에 고제자가 나온다‘는 고사를 떠올렸습니다. 이런 저런 인연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신기합니다. 말씀처럼 도시-시골, 시골-도시로 위치가 바뀐 선생님들의 이야기가 아이러니 합니다. 지칠 때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 힘이 나고 다시 관심을 새롭게 하게 되어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포스트잇 2021-03-20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치시면 안됩니다^^
...이건 저한테도 하는 말이기도 하네요. ^=^

transient-guest 2021-03-23 01:37   좋아요 0 | URL
그저 묵묵히 걸어가면서 지치면 좀 쉬고, 기어가다가, 걷다가 가끔은 뛰어 가기도 하면서 나아갑니다. ㅎ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1-03-20 11: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박균호 선생님 책을 transient님 포스팅에서 다시 본 것도 반갑고, transient님께서 소개해주신 많은 책 중에, <내내 읽다가 늙었습니다>를 1순위로 찜했는데 댓글에서 이렇게 엮이네요^^ 박균호 선생님과 transient님 아름다운 교점들을 찾으신 거네요^^ 와우!

박균호 2021-03-20 13:30   좋아요 0 | URL
네 그러게요. ㅎㅎㅎ 저도 반갑네요.

transient-guest 2021-03-23 01:38   좋아요 0 | URL
이렇게 책을 통해 만들어지는 신기한 인연은 늘 즐겁습니다. 박선생님은 꾸준히 책을 내고 계신데 모두 책에 얽힌 이야기면서 늘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주시는 것이 참 좋습니다. ㅎ

박균호 2021-03-20 13: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실은 <독서 주방>의 저자분과 그 친구분이라는 분은 저의 가까운 지인입니다. 저와 동년배이기도 하고요.. 처음 낸 책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글이 유려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어느 분야에서 정상에 도달하신 분들은 모두들 생각이 깊고 사고가 유연한 것 같습니다.

transient-guest 2021-03-23 01:41   좋아요 0 | URL
한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간 사람은 여러 모로 그런 깊이와 이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읽기 전에는 조금 걱정했었는데 글의 내용이나 기풍도 좋았고 제가 모르던 다양한 책이 다뤄져 참 즐겁게 읽었습니다. 깊은 사고와 유연함은 결국 최고를 추구하면서 얻어지는 수양과 수행을 통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