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탐정들 중 가장 부러운 건 파일로 번스가 사는 모습이다. 제시카 존스를 보면 적나라하게 나오지만 탐정이란 것이 원래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큰 돈을 버는 직업은 아니다. 오랜 공무원생활에서 은퇴하고 연금으로 살아가는 에르큘 포와로, 역시 군인연금과 의사로 버는 수입으로 살아가는 왓슨, 도대체 뭘로 먹고 사는지 알기 어려운 홈즈; 은퇴한 배우이자 상당한 부자로 보이는 드루리 레인 같은 사람들은 그나마 나은 모습이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서생같은 아케치 고고로나 긴다이치 고스케, 엄혹한 프랑스의 근대를 살아간 르콕경감, 중국계 미국인으로 하와이에 산다는 걸 제외하곤 살던 시대에 비춰 그리 부럽지 않은 찰린 챈, 아예 룸펜의 very definition과도 같은 오귀스트 뒤팽, 경감인 아버지와 함께 사는 앨러리 퀸, 그의 일본판 짝퉁 아리스가와 아리스 등을 보면 역시 탐정은 돈이 되는 직업은 아닌게다.  앞서 말한 드루리 레인은 상당히 잘 살지만 늙었고 귀도 먹었기 때문에 역시 맘에 들지 않는다. 잘 살면서,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지적 유희를 즐기면서, 놀고 먹을 수 있는 파일로 번스는 그래서 내가 최근에 큰 흥미를 갖고 보기 시작한 S.S. 밴 다인의 명탐정이다.  그 배경이 사실 상당한 수준의 비평가인 S.S. 밴 다인은 추리소설의 원칙이란 걸 만든 사람이기도 하며, 그 때문인지 그의 작품은 상당히 정교하고 촘촘한 논리를 보여준다. 파일로 번스는 그런 의미에서는 홈즈나 포와로처럼 천재적인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같은 이유로 무척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결론은 부자라서 일을 하지 않고 생활을 영위하면서 배우고 싶은 걸 공부하는 삶이 부럽다는 것.


이상한 트릭은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정립한 법칙에 입각하여 작중인물에게 주어지는 단서나 모티브는 읽는 이에게도 공평하게 주어지는데 곳곳에 흐트러져 있는 점을 선으로 연결하고 구체적인 모형으로 만들어내려면 상당한 집중력이 요구된다.  사건이 해결되고 나면 알게 되는 바, 용의자는 대략 두 명 정도로 추려낼 수 있는 충분한 단서가 주어졌던 것 같다. 다소 모호한 인물은 중간에 제거되므로 이렇게 하나씩 지워나가면서 작중 인물을 잘 살펴보면 개중에서 살인동기가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는데, 이런 면에서 S.S. 밴 다인의 진가가 드러나는 것 같다. 생각보다 제대로 읽은 작품이 없는 듯 하고, 리스트를 보면 구하지 않는 작품이 대부분이라서 기회가 되는대로 S.S. 밴 다인의 소설들을 구해야 한다. 앨러리 퀸 만큼이나 후대의 작품에서 많이 언급되는 작가이고 탐정이라서 늘 흥미를 갖고는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제대로 읽어볼 생각이다.


추리고 뭐고가 없는 경찰드라마. 87분서 시리즈는 50년대에 시작된 엄청난 시리즈인데 70권이 넘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작품은 황금가지와 해문에서 완간이 되었고 주요작품들은 정말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이 되었음에 비해 거의 소개가 안된 편이다. 지금까지 8권이 같은 출판사에서 최근에 나왔고 일부 작품들이 추리소설을 전문으로 내는 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다.  뉴욕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되는 아이솔라시티의 87분서 형사들이 보여주는 시대극을 읽다 보면 50년대와 60년대 미국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사료의 가치도 좀 있다.  늘 흥미롭게 지켜보는 시리즈.


추리소설보다 훨씬 더 애거서 크리스티의 내면과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스페셜시리즈의 다섯 권째를 끝냈다. 역시 흥미진진하고 다소는 슬프기도 한, 하지만 human nature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또 한번 이젠 근 20년이 넘어가는 젊은이로써의 내가 살던 모습과 그 이전의 더욱 어린 시절을 되돌려보면서 작중인물들에 몰입했다. 참 신기한 힘을 가진 책이 아닌가.  내가 그였다면 제인이었을까 넬이었을까.  이 시리즈에 대해서는 언젠가 다시 깊이 읽어보고 좀더 긴 글을 써보고 싶다.


'씨내 21'같은 잡지만 해도 비교적 요즘의 잡지였고, 8-90년대를 지배한 영화잡지하면 역시 '로드쇼'와 '스크린'이다. 폐간된지 오래지만 이 잡지들을 생각하면 칼라사진과 영화줄거리를 곁들인 평론을 통해 한국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영화를 말 그대로 상상할 수 있었던 같다. 지금이야 영화든 뭐든 VHS와 DVD, 블루레이, 거기에 다른 경로로 찾은 것들까지 엄청난 양을 수집하고 언젠가 '고양이의 서재'를 쓴 장샤오위안 선생처럼 책과 영화를 한 곳에 두고 즐길 날을 기다리고 있지만, 역시 귀하던 시절만큼의 집중과 소중함은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리운 것이 그 시절의 문화생활이 아닌가 싶다. 김영하작가 특유의 살짝 재수없음을 동반한 몇 가지의 영화에세이가 이우일의 그림과 함께 모인 이 책을 보면서 서른이 되어 무려 장만옥과 동갑임을 실감하던 작가의 90년대 모습을 읽으면서 서른도 훨씬 넘긴 지금의 내 모습과 50대 중반을 넘어버린 그의 모습과 시공간의 일그러짐 같은 복잡한 생각에 아찔함을 느끼다가 읽다가 졸다가 하면서 남은 일요일 오후를 보냈다.  언제 기회가 되면 어린 시절을 함께한 잡지들을 좀 찾아보고 싶다. '로드쇼' '스크린' 그리고 '마이컴', 이렇게 셋.  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하지 못하던 시절, 주로 이들을 읽는 것으로 즐겼던 그 시절의 잡지들을 말이다. 


내일부터는 2019년도 반으로 꺾어지기 시작한다. 남은 반년을 열심히 보내고 즐거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할 수 있기를. 모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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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07-01 1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해마다 특별할 거라곤 없었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가 기다려져요. 왜그럴까요..

반 년이 지났네요, 트랜님. 남은 반 년도 트랜님 말씀처럼 잘 지내봅시다.

transient-guest 2019-07-02 01:12   좋아요 0 | URL
한 해의 마무리를 찍는 느낌이라서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겨울과 함께 뭔가 들뜨게 하는게 있어요. 학습된 것이든 종교적인 이유든 어떤 이유로든 그런 면이 있네요. 남은 반 년도 열심히 건강하게 지냈으면 좋겠네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