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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되기 위해 살지 마라 - 세계은행 총재 김용의 마음 습관
백지연 지음 / 알마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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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들이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해서 인지 몰라도, 어릴 때 집에는 위인전 전집이 있었다. 꼭 그런 책을 읽는다고 책 속의 위인들 처럼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 당시 그 책들이 주었던 감동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릴 때 누군가 나에게 장래 꿈이 뭐냐는 물음에 꼭 위인전 속의 한 인물이 롤모델로 포함되어 대답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위인전이 각색되어 얼마나 그 사람을 미화하고 있는지 알게 되고, 이제는 자서전이나 위인전이니 하는 것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위인이라도 불리는 많은 인물들이 절대적 선이나 도덕성을 가진 위인이 아니라 약점 많은 인간이라는 것을 알기에.

 

업적은 과대평가되고, 그들의 잘못을 과소평가되는 이런 인식의 왜곡은 진실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열정을 비이성적으로 마비 시킨다. 어떤 사람의 좋은 점만 본받아서 그런 사람이 되면 좋지 않느냐는 단순한 생각들이 우리의 양심을 마비 시킨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우리는 양심이 시키는 일을 하기 보다는 무엇이 되기 위한 일을 한다. 때론 양심의 가치에 어긋나는 일을 하면서도 이런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는 어쩔수 없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 까지 한다. 그들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살아 왔기에... 어떤 일을 어떻게 했냐 보다는 어떤 일을 해서라도 무엇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당당하게 이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이제껏 우리의 삶을 "무엇이 도기 위해서" 살아 왔기 때문이지 않을까?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어떤 잘못도 당연히 할 수 있다는 비천한 생각들이 도덕 불감증의 우리 사회를 만들어 왔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인지 김용이 던지는 "나는 무엇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느냐를 늘 생각했죠."라는 이 한마디는 묵직하게 마음에 다가온다. 삶의 목적을 무언가 되기 위해서라고 생각했던 습관적 생각에 커다란 울림으로 다가온다. 무언가 되기 위해서 살아왔지만, 바랬던 무언가가 되지 못했던 삶을 비롯해, 그 무언가가 되었을 때의 삶의 무의함과 허탈함은 바로 삶에 대한 욕망이 만들어낸 대가가 아닐까?

 

삶은 무엇이 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 두 삶의 차이는 무엇일까? 무엇이 되기 위한 것이 지극히 개인중심적이라면, 무엇을 하기 위한 것은 타자중심적인 시선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김용이 강조하는 공감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공감에 대해서 가지는 개인중심적인 관점을 또 다시 깨뜨린다. 김용은 "공감이란 단지 어떤 감정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예컨대 어떤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마음이 아프다든가, 그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공감이란 사람들이 왜 상황에 처해 그런 일을 하고 있는지를 이해하는 걸 말합니다. 그들의 동기와 성취목적, 행동 등을 이해하는 겁니다."라고 말한다.

 

그의 삶을 모르고 단순히 그가 채워왔던 간판들, who 에이즈 국장, 다트머스대학교 총장 그리고 세계은행 총재라는 것들만 보면 그가 출세 지향적인 인물인 것 같은 인상이 든다. 하지만, 그가 이제껏 살아왔던 삶과 행동들에 담긴 진심이 결코 위선이나 거짓이 아님을. 무엇이 되고자 하기 위해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위선과 거짓으로 내세우는 공감과는 다른 타인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그의 진심이 보여진다. 공감에 대한 그 말은 그의 삶의 행적과 함께 그의 행동과 말에 진심이 느껴지게 만든다. 단순히 뭐가 되기 위해서 살지 않고,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살아왔던 그 삶의 진정성이.

 

앞으로 그가 세계은행 총재로써 어떤 행로를 보여줄지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세계은행 총재가 되었다는 것 만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로나 업적들을 평가하는 이런 책들이 나오는 상황이 조금은 우스워 보인다. 이 책도 그냥 인터뷰에서만 그쳤으면 김용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보다 더 객관적으로 접근 할 수 있는 좋은 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 자신의 의견을 너무 덧붙인다.

 

특히 김용 어머니의 철학이 김용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분석하는 부분은 너무 작위적인 동시에 뜬금없다. 한 사람이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단순히 한 사람만의 영향이거나 아니면 그 사람의 영향력이 절대적일 수 있을까? 그건 결과를 보고 무작정 원인을 찾으려는 너무 단순한 시도다. 이것은 단순히 저자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무엇이 되기 위해 살아"가는 우리 사회의 분위기가 그대로 투영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책도 김용이 세계은행 총재가 되는 순간에 나온 것이 아닐까?

 

저자나 우리 사회는 김용의 삶은 앞으로도 더 지속되는데, 우리는 그가 세계은행 총제가 된 것으로 그의 삶을 평가하려 하는 것 자체가 그의 삶에 대한 철학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가 더 보여줄 것이 많고, 아직 그의 삶과 경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이 책은 그의 삶의 궤적이 아니라 그의 삶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그의 철학을 바탕으로 무엇이 되어 있는 그의 삶이 아니라 무엇 일을 하는 그에 대해서 우리는 좀 더 따뜻한 시선으로 응원하며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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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6-18 12:04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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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월 달에 나온 책들 중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것들은 삶과 인생을 되돌아 보는 듯한 책들이다. 일을 위해서만 달려왔던 많은 직장인들에게 가족의 달을 맞이해서 한 번쯤 인생의 가치를 되돌아 보라는 의미일까? 



  돈과 명예 그리고 물질에 집착하는 내 자신의 모습을 보면 한심할 때가 있다. 그렇게 집착을 해도 나의 것이 되는 것이 거의 없는데.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가끔 그런 현실을 놓아버리고 싶을 때가 있지만, 마음 한 켠에 남아 있는 집착이 너무나 커서 현실을 더 거세가 잡아챈다. 그래서인지 이 책 제목부터가 무척 인상적이다. 이 책은 장자의 사상에서 자유로워지는 방법을 찾는다고 하는데, 과연 현실에 타협하지 않고, 현실을 놓아버리는 알 수 있을까 궁금해지는 책이다. 







 현재의 우리들은 삶의 멘토를 잃어버린 것 같다. 일과 경력에 대한 멘토는 있어도 인생에 대한 멘토를 구하지 않는 것 같은 현실. 그 만큼 우리가 그런 멘토들을 가치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것은 아닐까? 영화 "은교"에서 이적요가 늙음에 대해서 항변하듯 내뱉는 시가 생각난다. 우리는 늙음을 추하게 본 것이 아닐까? 칼 필레머 교수가 70세 이상을 산 현자들을 만나서 그들의 지혜와 인생과 삶에 대한 철학과 신념에 대해서 쓴 이 책은 우리가 무시하고 망각했던 삶의 멘토들을 바로 눈 앞으로 대려다 주지 않을까?







 인간이라는 것이 조금은 간사해서 자신에게 떨어진 조금만 불행도 크게 느껴진다. 쉽게 삶을 부정하고, 때론 삶 자체가 무너지는 듯한 지독한 절망감에 희망이라는 것을 잃어버린다. 이 책의 저자 빅터 프랭클과 같은 상황을 비교해보면 우리의 불행이 얼마나 하찮게 느껴질까? 단순 그런 비교를 떠나서 어떤 역경 속에서도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의지와 자유가 있다는 말하는 그의 철학와 말이 담긴 이 책을 통해서 역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긍정적 사고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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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2-06-06 1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경제경영/자기계발 신간평가단 파트장 키치입니다.
추천신간 체크 완료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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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민의 이식의 높아지고, 사회가 민주화 되면서 사람들은 우리 같은 평범한 개인들이 이 나라와 사회의 주인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정치적 목소리도 강하게 내고, 때론 직접 행동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기도 한다. 그렇게 표현된 다양한 목소리들이 정치에 반영되면 정책으로 반영되 그 영향이 각 개인들에게 직접 들어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 사회에 가해지는 힘의 움직임은 그런 생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 책 "슈퍼클래스"를 보면, 전 세계를 이끄는 엘리트 집단의 실체에 조금이나마 접근하게 된다. 이런 류의 분석들은 때론 음모론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주인인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사와는 다르게 움직인다. 세상을 지배하는 다른 거대한 힘은 단순한 음모론이 아니라 현실이다. 특히 이번 달에는 세계를 지배하는 힘이나 권력에 대한 책들이 눈에 뛴다. 


  "부자들이 다해먹는 세상"이라는 제목 자체가 상당히 도발적이다. 하지만 제목과 같은 현실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다. 직접적으로 대놓고 그렇게 말해지 못하지만,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 처럼, 승자독식이나 부익부 빈익빈이 점점 커지는 현실이다. 이 책은 단순하게 "부"에 대한 관점으로만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다. 교육제도, 언론, 법원 등. 우리가 이미 의식적으로 때론 무의식적으로 다 알고 있지만, 저항하지 못한 현실과 사회 시스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기득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우리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저항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에 대해서 고민할 기회를 줄 것 같은 책이다. 






 특히 경제학이라는 분야는 이런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가장 큰 힘을 제공하고 있다. 정의의 관념이 아니라 단순하게 이득이 된다는 이유로 어떤 행위를 정당화하다고 믿게 만든다. 이 책은 경제적 즉 이득이라는 이유로 저질렀던 수 많은 정책들과 꼼수들을 고발하고 있다. 이 뿐만 아니라 새로운 대안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는 불편한 경제적 진실을 제대로 보고 그 대안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위한 첫걸음을 제공해 주지 않을까?








 20세기 초 헨리 조지는 모든 사회의 불평등에 대해서 그 근본원인을 토지에서 찾았다. 그의 기본 생각은 공기와 같이 자연으로 주어져 누구의 소유권도 가질 수 없는 토지라는 공공재가 소수의 집단에 집중되면서 사회는 점점 더 불평등해진다고 주장했다. 부동산의 열망이 지독히 강한 우리나라에서 소득의 불평등에 가장 큰 역활을 하는 것이 투지다. 상위 1%가 우리나라 토지의 50%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불평등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 그래서 집값과 토지 값은 천정부지로 솟으며 서민들은 주거의 불안에 힘겨워한다. 헨리 조지의 주장을 그대로 받을 것도 없지만, 우리는 토지의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접근하고 고민해야 할지 생각해봐야 할 시점이지 않을까? 





 전 세계는 패권의 다툼이 활발하다. 역사적으로 수 많은 패권국가들이 세계를 지배했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수 많은 약소국들은 그런 패권국가들의 힘에 눌려서 험난한 시대를 지나왔다. 지금은 미국이라는 패권국가와 새로운 패권을 노리는 중국이라는 국가가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다. 하지만, 과거와 같이 한 국가가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환경은 무너지고 있다. 세계화라는 이름은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고 세로운 형태의 세계 지배권이 필요함을 보여준다. 유엔과 같은 형태의 국제적 정부의 형태가 필요함을. 이 책은 과거의 역사와 현재를 통해서 앞으로 변해갈 세계와 그 힘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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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치 2012-05-07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이번에 11기 경제경영/자기계발 신간평가단 파트장을 맡게된 키치입니다.
추천도서 네 권 확인했습니다. 앞으로 6개월 동안 잘 부탁드립니다. ^^*

은빛연어 2012-05-09 22:16   좋아요 0 | URL
^^ 오히려 제가 잘 부탁드립니다.
 
[시장은 정의로운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장은 정의로운가 - 서울대 이정전 교수의 경제 정의론 강의
이정전 지음 / 김영사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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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이 끝나고, 방영 되었던 시사 프로그램이니 다큐멘터리인지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떤 아주머니가 한 말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무슨 질문에 대한 답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주머니의 대답은 "MB가 다 해주실거야" 였다. 종교에 미쳐서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광신도들이 흔히 말하는 "신이 다 해주실거야"라고 하는 것처럼 근거가 없는 맹목적인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 대해서 비웃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사회의 건전성을 쉽게 해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보수 경제학자들과 보수 언론 그리고 재벌이 똘똘 뭉쳐서 만들어낸 "시장이 다 해결해 줄꺼야"라는 믿음은 사회의 건전성을 크게 해친다.

 

시장에 대한 맹목적 믿음은 두 가지 관점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다. 시장이 자유로울 때 사회적 부는 증가한다는 믿음과 시장은 그 자체가 정의롭다는 믿음인 것 같다. 시장이 사회적 부를 증가 시킨다는 믿음은 누구나 노력하면 시장에서 부를 얻을 수 있는 욕망과 합쳐진다. 그래서 시장이 가지고 있는 추악한 내면, 냉혹한 약육강식의 논리를 쉽게 인식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너무나 쉽게 너도 노력해서 강자가 되면 되지 않겠냐는 식으로 말한다. 시장의 모순을 바로 잡으려 하기 보다는 시장 참여자 개인의 무능으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은 신성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에 시장의 모순이나 잘못이 아니라는 맹목적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럼 시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가, 그래서 시장은 그 자체로 정의로운가? 여전히 학문적 이론과 연구를 바탕으로 시장이 그 어떤 것보다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의 시장은 이상론적 시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곳과 전혀 다르다. 이론과 현실의 차이는 우리가 이상론적 시장에 대해서 회의를 품을 수 밖에 없게 만든다. 그럼에도 여전히 시장을 추종하는 주장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광신도들의 맹목적인 믿음이나 특정 정치인을 그 자체로 우상화 하는 믿음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시장에 대한 맹신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다른 시장만능주의 비판 서적과는 다르게 시장이라는 것을 경제학적으로만 접근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학문에 대한 인문학적 소양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이 사회 현상의 분석에만 치중하는 저작들이 많은 반면에, 서양의 석학들은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경제적 문제를 접근하는 경향이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나라 경제학자들 서적 대부분이 휘발성이 강하다. 시대의 흐름에 취합하는 정도의 완성도를 가진 서적들이 많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국내 경제 현상에 대해서 알고 싶을 때를 제외하고는 국내 경제학자의 서적을 선호하지 않는다. 이 책의 놀라운 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저자의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과 연구가 경제학이라는 학문과 어우러져서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책 표지에 "한국의 경제학자가 이런 책을 써주길 기다렸다!"라는 문구를 보면서 그냥 광고려니 생각했는데, 책을 읽다 보니 이 책은 그 문구 그대로 내가 정말 기다려왔던 책이다.

 

한 때 큰 인기를 끌며 우리 사회에 '정의'에 대한 화두를 던졌던 마이클 센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였다면,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시장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화두를 던지는 것 같다. 어떤 부분에서는 센델의 책과 많이 중복되는 면도 없지 않다. 이 책의 저자가 인용하는 저자들 역시 센델이 인용했던 철학자들이 중심이기 때문에. 차이점이 있다면, 센델은 양쪽의 의견을 아주 균형있게 다룬다. 함부로 어느 것이 가장 정의롭다고 단정하지 않는다. 조심스럽게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란 이런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만큼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정의관을 제대로 바라보고 다시 생각할 기회를 제공해 준다. 생각의 수용 가능성의 폭을 상당히 넓혀준다.

 

하지만, 이 책은 센델과는 다르게 잘못된 것은 잘못되었다고 명확한 근거를 들어서 설명한다. 시장에 대한 맹목적인 신화에 강하게 도전한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경제성장의 신화에 대한 부분이다. 저자는 경제 성장에 대해서 "경제성장이 없이 상태를 가장 용납하지 못하는 체제가 자본주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선 경제성장으로 인한 물질적 풍요가 자본주의를 정당화함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구실이 되고 있으며, 자본주의 사회에 내재한 구조적 불평등과 모순을 은폐하는 효과적인 장막이 되고 있다. 경제성장을 통해서 앞으로 언젠가는 누구나 잘살게 된다는 희망을 가지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소외 계층의 불평을 무마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일부 자본가계급의 엄청난 사치와 낭비를 선망의 대상으로 미화시킨다."라고 말한다. 학문적으로 전혀 증명된 바가 없는 낙수효과가 유효하다고 대중을 기만하는 기득권층의 행태에 대한 인상 깊은 분석이다. 또 한편으로 성장의 한계와 낙수효과의 미미 또는 실패를 직접 경험하고 있음에도 아직 우리 사회는 성장과 분배를 두고 여전히 논쟁 중인 상태를 보면 이 프레임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세삼 느끼게 된다.

 

저자는 자본 소득에 대해서도 상당히 비판적인 시선을 유지한다. 그는 자본소득이 구린 이유는 단순히 자본 시장 참여자들의 탐욕 때문이 아니라, 자본시장 자체가 가지는 부정함 그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자본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자체가 가지는 일반 상품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라는 것을 인식해야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서브 프라임 사태를 야기했던 파생상품들을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과다한 경영진의 보수가 자본주의 경제의 활력을 떨어뜨린다는 것까지 지적한다. 이러한 지적들은 기본적으로 철학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장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한계를 더 깊이 있게 파고 든다. 이렇게 시장의 한계에 대해서 근거를 들을 쌓아가면서 시장의 태생적 한계를 마르크스를 인식을 통해서 보여준다. 저자는 " 마르크스가 자본주의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까닭은 정의롭지 못해서가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 사회가 정의의 개념과 권리의 개념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근원적 결함이 있는 사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그 만큼 지금 우리에게 만연한 시장의 신화는 근본적으로 치명적인 결함 숨긴 채 만들어진 허상이다. 하지만 저자는 쉽게 시장의 정의가 어떤 것이라고 단정하지 못한다. 그만큼 정의에 대한 인식이나 가치는 쉽게 함부로 단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가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분화되고 역으로 분화되고 각 영역별로 독자적인 정의의 원칙이 지배하는 현상 역시 그런 분화 및 합리화의 큰 흐름 속에 있다. 그러므로 어떤 특정 영역을 지배하는 정의의 원칙은 옳고 다른 것은 틀렸다고 한 마디로 잘라 말하기 어렵다. 또한 어느 특정 정의의 원칙에 입각해서 우리 사회가 정의로운지 아닌지를 일률적으로 말하기도 어렵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시장의 정의를 세워야 할까? 저자의 주장은 센델의 주장과 유사하다. "진정한 사회적 통합은 사회 구성원들 사이의 참된 이해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라고 말하며, "참된 상호이해란 아무런 강압이나 강제가 없는 상태에서 모든 사람들이 동등한 자격으로 자유롭게 진솔하고 성실한 대화를 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상호이해를 뜻한다."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의 전제로 "합의가 진정 사회적 정당성과 권위를 가지기 위해서는 우선 참된 이해의 과정을 거쳐야 하며 아무런 강제와 억압이 없는,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바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한다. 이러한 것들은 수평적 사회 구조와 소통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의 공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는 기본적 사회 구조를 바탕으로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시장과 사회의 정의를 세우기 위한 과정을 커녕 기본적인 기본조차 흔들리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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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미래 - 10년 후, 나는 어디서 누구와 어떤 일을 하고 있을까
린다 그래튼 지음, 조성숙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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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끊임 없이 미래를 알려고 노력한다. 단순히 미래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불안함과 공포에 어떻게 든 미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 두 눈을 감고는 보이지 않는 두려움에 한 발도 쉽게 때지 못하는 것처럼, 미래의 불확실성 때문에 인생에 모험이라는 것을 쉽게 떠나지 못한다. 부모님이 정해 놓은 길이나 아니면 기성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그저 따라 갈 뿐이다. 인생에 자기의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의 길을 개척하려 하기 보다는 누군가의 길을 따라가려고 한다. 그래도 떠나지 않는 불안감과 그 길에서도 조금이라도 남들보다 앞서 사려는 욕망에 끊임 없이 미래를 알기 위해서 노력한다. 미래를 알려는 우리의 욕망은 불확실이라는 두려움이 만들어낸 공포다.

 

그렇게 공포를 떨치려는 노력은 과연 얼마나 성공할까? 각 분야마다 수 많은 예측과 예언이 난무하지만, 실제로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은 거의 없다. 수 백 개의 예측과 예언 중에 몇 개가 우연히 맞아 떨어지기라도 하면 대중들은 그 사람을 추종한다. 그가 틀린 수 많은 미래에 대해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그가 맞춘 소수의 예측이나 예언 만을 기억할 뿐이다. 그 기억으로 그들을 열렬히 추종하고 때론 맹신한다. 키케로는 "미래를 안다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결국 그것은 소득 없이 자기를 괴롭히는 불행이다."라고 했다. 미래를 알려는 노력보다는 현실의 자신에 충실하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그런데 현실의 자신에 충실하다는 것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되는 것 같다.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으로 우리는 안정이라는 것을 맹목적으로 추구한다. 자신의 인생에 대한 대단한 열정으로 현실과 사회에 도전해야 하는 청춘들이 막연한 두려움에 스스로 자신의 열정을 꺾어버리고 현실에 안주한다. 그 현실이라는 것이 지금의 현실일 뿐이지 미래의 현실이 아닌데, 그 현실을 마치 미래의 현실로 생각한다. 꿈이 공무원이라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적성과 능력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냥 안정해서 좋다고 선택하는 공무원이라는 직업을 추구하는 많은 청춘들은 우리 사회의 어디 한 구석에 커다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청춘들이 두려움에 자신의 열정을 꺾어버리도록 만드는 사회 현실과 구조를 무시한 채, 공무원만을 추구하는 청춘들을 나무랄 수가 있을까?

 

미래는 오늘의 현실이 쌓이고 쌓여서 만들어 진 것이다. 열정과 희망의 현실이 쌓인 미래와 좌절과 현실 안주가 쌓여서 만든 미래의 차이를 깊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지금 만들어가는 미래는 희망이 있는가 아니면 절망인가? 아직 이 질문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그 만큼 미래는 불확실하지 않은가? 우리는 그런 거시적인 미래보다 자신의 미래에 집중해 스스로의 미래를 명확하게 만들어 가는 것이 좋지 않을까? 개인의 미래는 꿈으로 시작하지만, 결국에 일이다. 어떤 미래를 꿈꾸듯 우리의 그 꿈은 바로 일이다. 베짱이 처럼 일하지 않고 놀수 있는 미래면 좋겠지만, 현실은 개미처럼 일을 해야만 누릴 수 있는 미래가 더 많아진다. 그래서 어린 시절에 꿈이 뭐야라고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미래의 직업에 대한 것들이다.

 

시대의 변화 만큼 급변하는 것이 바로 일의 종류다. 신 기술에 의해서 새로운 직업이 생기기도 하고, 사라지는 직업이 생기기도 한다. 어린 시절의 꿈은 당시 현실에서 인기있는 직업일 뿐 우리는 성인이 되면서 지금 현실의 직업에 초점을 맞추고 일을 선택하게 된다. 어린 시절의 막연한 꿈이 나이가 들면서 점점 현실적이고 구체화 된 형태로 다가온다. 그 구체화 된 형태의 일이라는 것은 연봉이나, 적성, 능력 등 다른 여러 조건이 고려되어서 선택되어 진다. 거기에 일의 장래성까지 같이 고려되면서 우리는 오랜 시간 심사숙고 하고, 선택이라는 것을 한다. 그 신중한 선택을 해도 어느 순간에 사회의 변화에 의해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기도 한다.

 

변화의 불확실성은 누구도 미래를 단정할 수 없게 만든다. 이 책 "일의 미래"도 그런 불확실성을 반영하듯 쪽집게 처럼, 미래를 단정하지 않는다. 거시적으로 "저탄소 경제의 활성화, 급속한 기술발전, 세계화의 증가, 수명과 인구 통계의 근본적 변화 그리고 중대한 사회적 변화"라는 다섯 가지 힘에 의해서 현재와 미래가 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은 이런 다섯 가지 힘이 가져올 변화가 일이라는 직업의 선택에 어떤 고려나 노력을 해야 하는지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다섯 가지 힘은 그렇게 색다를 것이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지금 현실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미래는 오늘의 현실이 쌓여진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이 책의 내용은 미래를 준비하는 자세가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자세를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예측하지 못한 힘이 아니라 현실에 직면한 힘의 실체이고, 이 실체를 알고 현실에 조금씩 대응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 가지 능력을 배양하라고 한다. "첫째, 관심 있는 분야에서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대부분의 근로기간을 자신의 지적 자본을 함양하는데 투자할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우정과 네트워크를 통해 사회적 자본을 함양해야 한다. 신회할 수 있는 사람들과 깊은 우정을 쌓고, 다른 사람들과 보다 폭 넓은 네트워크를 조화롭게 구축해야 한다. 셋째, 돈과 소비를 일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추구하는 전통적인 인식에서 벗어나, 창의적이고 생산적이며 다양한 경험을 누리는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인식으로 옮겨가야 한다."라고 한다.

 

이 모든 것은 미래에 갑자기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현실에서 충실히 쌓아가야 하는 것들이다. 그 만큼 지금의 현실을 잘 쌓아간 사람에게 다가올 막연한 미래는 그렇게 두렵지 않다는 것이 아닐까? 책의 제목은 거창하지만, 지금 현실이 미래다. 하지만 그 전에 개인적으로 '네 일을 하고,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대해서 몽테뉴가 한 해석을 더하고 싶다. 몽테뉴는 이 말에 대해서 "자신 일을 하려는 자는 먼저 자기가 무엇인가 그리고 자기에게 적당한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아는 자는 남의 일을 자기 일로 혼동하지 않는다.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가꾸며, 쓸데없는 일이나 생각을 제안 받기를 거절한다."라고 해석을 더한다. 앞에서 저자가 말한 세 가지는 자기 자신을 먼저 알았을 때 해당되는 말이다. 입시에 시달리는 학창시절을 통해서 우리는 얼마나 자신을 알려고 노력했고 알아 왔을까? 우리는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을 현실에서 찾아 만들지 못했다. 자기 자신을. 미래를 꿈꾸고 현실을 충실히 살기 전에 우선 "너 자신을 알라." 그것이 불확실한 미래와 꿈을 용기 있게 해쳐나가는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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