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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평전 - 시대를 밝힌 '사상의 은사'
김삼웅 지음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0년 12월
평점 :
절판
책읽기도 아무나 하지 않음을 실감한다. 인터넷 서점이 '서재'를 앞다퉈 개설하면서, 그야말로 책읽기를 밥먹기보다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허나, 그게, 실제 그런것 같지는 않다. 리영희 선생의 평전도 정말 두툼하여 읽기 쉽지 않다.
인터넷 중독증 벗어나기와 두툼한 책 읽어 보기
인터넷 중독 증세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정보의 홍수'속에 떠밀려 이곳 저곳에 표류한다. 인터넷 세대는 과연 제대로된 '지성'을 키울 수 있을까 의문이다.
장점은 있을 것이다. 방대한 분야의 지식을 확보한다는 의미 말이다. 하지만 문제는, 과연 어떤 분야을 제대로 파고드는 지식인이 될 수 있겠는가이다.
책을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닌데다, 당대의 '금기'를 깨고 금지된 책을 읽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한국사에서 '지성인'의 표본과 같은 리영희 선생은 바로 이런 '금기를 넘어서' 광활하게 읽으신 분이셨다.
'대위' 출신의 군인이었지만 한국적 좁은 시야를 깨고 광활한 세상을 엿보다.
한국인에게 부과된 덫이 두개 있었다. 근대화,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는 대신 눈과 귀를 멀게하는 것이었다. 당대 이렇듯 '눈과 귀'를 멀게하는 이데올로기를 속칭 '반공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이런 이데올로기를 생성한 주인공은 바로 '박정희'라는 이름의 무려 18년을 대통령에 재임한 사람이었다. 리영희라는 이름이 빛나게 되는 것은 장준하라는 이름이 빛났던 것과 비슷했다. 장준하 이 분이 독립지사로서 '일제시대' 저항의 정당성에 터하여 박정희 정부에 저항했다면, 리영희 선생은, 대위에서 전역했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섰던 것이다.
반공 이데올로기를 넘어선다는 것은 '빨갱이'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리영희 선생의 60년대와 70년대는 반공에 '이의'를 가하는 것이 곧 '빨갱이'라는 딱지가 붙는 험학한 시대였다.
결국, 한국인의 시야는 엄청나게 좁아질 수 밖에 없었다. 과거 '옆구리'에 두고, '호수'를 건너 다니듯 중국 대륙에 빈번하게 왕래했던 한국인들의 대중국 왕래가 끊겼다. '휴전선'에 의해 대륙으로 나아가는 길조차 막혔다. 한국은 영락없는 섬나라가 된 것이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통해 '냉전해체'의 현 시대를 예견하다
'섬나라 한국'은 '섬나라 일본'처럼 급속한 근대화 산업화의 대열에 합류했다. 이 쉽지 않은 기회를 잘 잡아채서, 베트남 전쟁에 젊은이들이 피흘린 댓가까지 '밑바탕' 삼아 오늘의 한국을 이룩한 것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산업화의 도약 시기였던 1960년에서 1980년까지 20여년간, 한국은 오직 '비행기'를 타고 '동서남북' 중에, '서쪽으로가는 것이 '금지'된 채, 동남북으로만 다닐 수 있었다. 바로 이런 시대, 중국과 한국 사이에는 인위적인 '죽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과거 '한국'에 문물을 전래했던 중심지 중국이 갑자기 한국인들에게 접근 금지의 '중공'이 되었던 것이다. 거대한 붉은 중공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다. 그냥, '빨갱이'들이 '지옥'을 만들었거니 했다. 그 지옥의 경계선이 '한반도의 휴전선'처럼 여겨지도록 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이 반공교육이었다.
이런 철의 장막과 죽의 장막 시점에 리영희 선생은, 두가지 방향으로 한국인의 좁은 시야를 깨는 일을 했다. 특히 반공방첩으로 가리워진 눈과 귀를 열어주는 '이성의 빛'이 되었던 것이다. 외국어에 능통했고 '합동통신'사에 입사하여 외신부 기자를 한 덕분이었다. 그에게 지구는 비밀스런 모습을 가끔씩 드러냈고 그는 '미국'과 '중국'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로, 비국과 중국이라는 두방향으로 한국인의 우물안 시야를 열어 젖히는 일을 했던 것이다. 이런 작업은 '전환 시대의 논리'와 '우상과 이성'이라는 두 저작에 담겼다. 모두 창작과 비평사 간행이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는 미국의 실체에 대한 접근의 성과물이었다. 오늘날 냉전이 해소되고 한국 자본이 중국에 투자하는 시대에 이르러, 이 저작을 다시 살펴 보면, 정말 냉정하고 폭넓은 시야로 국제정치적 '사실'을 냉정하게 취급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당대 이 서적은 불온이었다. 오늘날 장하준의 '나쁜 사마리아인'보다도 더 심각하게 '금기'를 건드린 불온이었던 것이다. 당대 산업화 체제의 '역린'을 건드렸던 것인데 어떤 형태의 반미도 용납할 수 없었던 박정희 발전국가의 포지션 때문이었다. 물론 '반미' 못지 않ㄱ '친중'도 불가능했는데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1988년 올림엑 즈음해서야, 한국인은 당시의 '소비에트 연방 공화국' 깃발이 내걸린 경기장에서 '소련'을 응원할 수 있었다. 물론 이러다 빨갱이 몰리는 거 아니야 걱정하면서. 당연히 '중공'을 응원하는 것 조차 어렵지 않았는가! 유라시아 대륙을 장악한 이 두 '공산주의' 국가는 한국인에게 금기였던 것이다.
'8억인과의 대화'를 하면서 죽의 장막을 펼쳐 올리다
'미국'은 무조건 '선이어야 했고 소련과 중곡은 무조건 악이었다. 진리는 선험적으로 결정되어 있었고,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사실'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미국은 조선시대 영조대왕이 승하하고 정조대왕이 '즉위'하던 1776년 무렵 건국된 나라였다. 한국의 정조 즉위시점 건국하여 지금에 이른 나라인 것이다. '정조' 이전의 조선시대 존속기간인 400년에도 못미치는, 역사라고 변변히 있지도 않은 나라였다.
헌데 이 미국은, 한국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 발을 딛으면서, 임진왜란 시기의 '명나라 군대'하고 동일하게, '작전 지휘권'을 인계 받아서, 한국 전쟁을 지휘했다. 그리고 나서 한반도에 '군영'을 설치했고 머무르게 되었다. 이후는, '미국'이 곧 과거 '중화주의' 시대의 중국을 대신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미국'에 대한 비판적 사유 따위는 완전히 금기사항이었다. 오늘에 비춰서 정말 말도 안되는 통제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외신은 언제나 '사실'을 전하게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리영희 선생은, '국제정치적 사실'을 엿본 것이고 특히 베트남 전쟁의 원인과 경과, 결과를 냉정하게 꿰뚫을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머무르지 않고, '중국'의 가리워진 진실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래서 '8억인과의 대화'를 툴간했다. 이 책은 '민주화가 전진'되면서 출간된 덕에 '금서' 목록에 오르지 않았다. '죽의 장막'을 열어 봤더니, 글쎄, 과잉인구의 중국이 나타났던 것이다. 공산주의보다 인구과잉이 더 문제 아니었던가! 사람 사는것은 공산주의건 자본주의건 차이가 별반 없는데다가, 오히려 중국이 과거 '중화'의 모습이 아니라, 초라하고 빈곤한 전근대 사회로 떠올랐던 것이다.
당산 대지진 시기의 중국인과 뉴욕 정전 시점의 미국인
오늘의 시점에서는 한번 더 사유해 봐야 한다. 미국인들이라고 과연, '따뜻한 한조각'의 마음씨 없을까! 허나 리영희 선생은 중국의 '인간적'인 모습에 기울어져, 1976년 당산 대지진 시점에서 중국인들에 대하여 감동적 묘사를 했다. 8억인과의 대화에 나온 이야기 한토막 요약이다.
1976년 당산에서 엄청난 지진이 일어 났지만 '초라하고 가난한' 중공의 당산 사람들은 전혀 동요하지 않고 당국의 조치에 따라 침착하게 대처했다. 단 한건의 절도 사건도 없었고 단 한건의 방화와 강도, 살인 등의 사태가 없었다. 반면 비슷한 시기의 뉴욕 정전에서는 엄청난 약탈과 방화 사태가 있었다. 리영희 선생은 이런 '대조'를 통해 '가난하고 초라해도'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사회를 열망했던 셈이다. 그에게 미국의 문명적 사람들이 문제였던 것이다. 1970년대의 뉴욕 정전사태는 물룬 1994년의 '엘에이 폭동' 사태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알 것이다. 당대에 역시 박정희 정부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망명 비슷하게 피해갔던 '이장희' 이분이, 자신이 운영하던 엘에이 교포방송을 중심으로 침착하게 대처하여 약탈과 난동을 줄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것이 널리 알려져, 당시 부시 대통령의 방문까지 얻었다는 스토리를 낳은 사태였다. 이 사태에서 엘에이 일부 사람들은 가로를 휩쓸고 다니면서 온갖 약탈을 자행했던 것이다.
모두 흘러간 역사가 되었다. 오늘 한국의 신세대는 이런 역사에 대하여 잘 모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비밀'을 엿보고 한국인의 시야를 확짤 열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한 리영희 선생도 세상을 떠났다.
김수환 추기경, 법정 스님, 리영희 선생 등. 한국인은 최근 수년새에 '스승'에 해당하는 분들을 떠나 보냈기에 허전하다. 2005년 세상을 떠난 숭산스님까지 떠올려 보면 그러하다. 한국인의 동시대 스승에 해당하는 분들 아닌가. 어떤 분이 있어 다시 '시대의 양심'으로 한국인의 앞길을 밝혀 줄 수 있을까?
리영희 선생에 버금가는 지성의 탄생을 기대하며
인터넷 지식을 흡수하는 것만으로 미흡함을 말하고자 한다. 선생은 외국어 습득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다했고 영어에 능통했으며 이런 이유로 폭넓은 시야를 갖췄던 것이다. 오늘날 후학들이 그를 귀감 삼아 정말 폭넓은 시야를 갖추는 지성으로 성장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