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 영국과 미국의 세계 지배체제와 그 메커니즘 역사도서관 교양 6
월리엄 엥달 지음, 서미석 옮김 / 길(도서출판)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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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사람들은 '미국'을 아예 모르고 사는 분위기다.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미국 영화의 '영향력'에 대한 얘기는 많이 떠돈 바 있다. 허나 빠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전혀 미국과 다름을 알 수 있다. 널찍함과 광대함 이것이 미국의 시가지 특징이다. 아담하고 작고 다양함 이것이 빠리의 시가지 특징이다. 프랑스는 한마디로 '미국 나는 너희들 잘 몰라'이다. 물론 영어도 거의 모른다.

프랑스는 하지만 미국과 밀접한 '운명'으로 엮여져 있기도 하다. 1776년 미국의 독립선언 무렵, 프랑스는 영국과 세계 곳곳에서 충돌하고 있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미 '전세기'에 세계 패권 다툼에서 밀려났고 물론 멕시코와 남미에서는 영향력이 여전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북미에서 주로 식미지 쟁패전을 벌였다. 그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어 가령 캐나다 퀘벡주 같은 경우가 그러하다. 이 쟁패전은 프랑스에서 '혁명'이 발발하면서 영국의 대부분 승리로 끝난다. 이 와중에 미국의 '독립군'은 프랑스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 1776년은 '아직' 프랑스 대혁명 발발까지 13년을 남긴 시점이었고 루이 15세 사망 2년전이다. 루이 15세는 선친이 해놓은 것을 다 '말아먹는' 정치를 했다는데 매우 난봉적인 사생활을 했나 보다. 영국과의 쟁패전에 과도한 재정을 쏟아 부어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만든 왕이었다. 바로 이 루이 15세가 미국에 많은 재정을 지원해서 '독립전쟁'을 도왔는데 당연히 '영국'에 대한 간접견제였기 때문이었다.

프랑스의 미국에 대한 도움은 제1차, 2차 세계대전에서 '위기'에 직면한 프랑스를 두번이나 미국이 '군사적으로' 구출하는 '극적인 보답'으로 나타난다. 나는 사실 다음 얘기를 위해 여기까지 말을 이어왔다. 드골 때문이다. 이 드골이 미국과 영국에 대한 태도이다. 특히 미국에 대하여 그러했다는 것. 미국의 프랑스에 대한 도움을 나는 잘 알지만, 허나, 당신들은 언제나 프랑스가 거의 망할 지경에 이르러서야 비로서 나타났다는 것. 그래서 완전히 함께 할 수 있는 사이는 아니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는 이야기였다. 요컨대, 드골은, 미국과 영국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독일로부터 '되찾았고' 그의 '역사적 포지션'은 사실 대단한 것이었다. '운'이 엄청나게 따른 것도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초기 프랑스는 5백만의 '육군'을 거느렸지만, 1차 세계대전의 엄청난 '충격'속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전쟁을 혐오했고, '마지노선'에 쳐박혀 나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아르덴을 돌파당하면서 5백만 육군은 두동강이 난채 거의 '흩어져 버렸다.' 덩케르크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10여만명이 전부였다. '드골'은 바로 이런 프랑스군의 희망이고 등불이었으며, 무기력한 '제1차 세계대전 세대'의 비시 같은 사람들이 독일에 굴복해 버렸을때도 무릎꿇지 않았다. 처질과 로우즈벨트에게도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은 프랑스 특유의 기질을 남김없이 갖춘 사람이었던 것. 바로 이런 이유로, 캐나다를 방문한 드골은 '앵글로 색슨'을 마음껏 비웃는 '유머'까지 구사했다고 한다. 그리고 바로 그런 만큼, 앵글로 색슨의 세계구도에 동의 하지 않는 역할을 했다. 요컨대 유럽 독자노선의 진원이 드골이었다.  

하지만 프랑스의 유럽에서 포지션은 사실, 1800년대 초반 하더라도, 나폴레옹을 앞세워 유럽을 석권하고 있었다. 1940년대는 독일의 히틀러가 그러했듯, 당대 나폴레옹은 유럽 석권과 동시에 '영국침공'을 꿈꿨다. 말하자면 18세기의 영국과 프랑스 항쟁이 19세기 초반에도 이어진 셈이다. 이렇게 된데는 '절대적 이유'가 있었는데, 당시 '독일'은 산산히 분열된 '공국'으로 흩어져 있었고, 미국은 '아직' 인디언과 '변경'에서 전투를 벌이는 '초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런 구도는 곧 바뀌게 된다. 나폴레옹 전쟁이 러시아 침략의 처참한 실패로 종료된 그 시점부터 그랬다. 1830년과 1848년 두차례의 '자유주의 혁명'을 겪은 유럽대륙은 특히 그 '물결'속에서 석탄기반 산업화를 급속 추진해 나갔는데, 다른 곳 보다도 '독일'이 엄청나게 비약적이었다. 1835년 독일의 철도는 불과 6,km 였는데 이로부터 20년 후에는 5000km로 유럽에서 최고로 올라섰다. 그리고 바로 이 시점부터가 '보호무역주의'와 '국가주의'를 앞세운 독일의 '영국과 프랑스를 추격하는 산업혁명'과 '통일 독일'의 여정이 시작되었다. 1871년 통일독일이 출현하므로서 이제 유럽정세와 이후 세계사 '전개'의 기본 구도가 바뀌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항쟁이 이제 강대한 독일을 견제하는 '항쟁'으로 바뀌어가게 되는 것이다. 

"석유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 이 책은 바로 이 시점에서부터 풀어가기 시작한다. 1871년 통일 독일이 출현하여 바로 이웃 프랑스는 이제 항상적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독일이 분열되어 있던 시점에서는 '프로이센'이 강한 상대였지만 허나 '통일된 독일'만큼 두려운 상대는 아니었다. 바로 이때 '접근'해 온 나라가 프랑스의 오래된 '숙적' 영국이었던 셈이다. 요컨대 '세력균형'이라는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로, 제1차, 2차 세계대전의 싹이 이 시점부터 발아하기 시작하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1887년부터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선견지명'있는 한 군인의 예언부터 출발한다. 당대는 여전히 '증기기관'의 시대였고, 모든 배의 엔진도 그러했다. 허나 증기기관은 매우 불편했는데 바로 '석탄'의 부피 때문이었다. 대기오염물질을 엄청나게 내뿜는 문제도 있었고, 특히 군사적으로는 10km 거리에서도 육안으로 탐지되는 '연기'가 문제였다. 즉 군사적 관점에서 증기기관은 전략전술적으로 약점이 많았던 것이다. 이럴때 늘 '선견지명'을 가진 사람이 나타나는데, 석탄을 '석유'로 바꿔쓰자는 전략가가 나타난 것이다. 아주 쉬운일이었는데, 증기기관은 물을 끓이면 되니, 그 연료를 석유로 바꾸고 연소장치를 '석유보일러'로 바꾸면 그만이었다. 연기도 적게 나서 군사 전략상 최적이었다. 바로 이때부터 석유는 '전략적 가치'가 몇 사람들에 의해 인정되기 시작된 것이고 이런 이유로 '석유의 지정학'이 세계 전략의 핵심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일반의 상식을 뒤집어 엎는 이야기들이 줄줄이 나온다. 가장 충격적인 것 중 하나는, '신맬더스주의' 출현에 대한 것. 지정학적 석유 전략 세력들이 '펀딩'하여 환경운동 단체들이 움직였다는 이런 얘기보다, 1970년대 초반 미국의 정책담당 관료들이 스스로를 '신맬더스주의자'라고 자칭했다는 사실이었다. '석유와 달러'를 앞세운 '영미' 주축 세계 지배 세력들이, '원자력'과 같은 당대의 대체에너지 세력을 '견제'하고 무너뜨리기 위해서 형성된 구도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내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상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가령 독일에서 '원자력'발전이 포기된 것도 영미의 석유패권 추구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지나치게 음모론적 시각이기는 하지만 아주 틀렸다고 보기도 어렵다. 이곳 저곳에서 정황증거를 들이밀기 때문이다. 하여튼 '신맬더스주의'를 폭발시킨 '성장의 한계' 출간 로마클럽에도 바로 그런 세력들이 포함되어 있고 여기도 그들의 펀딩이 들어 갔다는 얘기를 들으니 더 충격적이다. 심지어 1972년의 유엔인간환경회의까지 석유자본의 음모가 끼워져 있다니 정말 충격이다. 이렇게 되면 '환경교육'도 석유자본 얘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맬더스주의와 신맬더스주의에 그런 관점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어느정도 알 수 있었다. 그 배경이 되는 '펀딩'얘기까지 이 책에서 알아차리게 되니, 미국과 유럽의 환경운동이 어떤 배경으로 탄생했는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독일과 프랑스의 '오래된 꿈'이 어떻게 영미의 달러와 석유패권 세력에 의해 '좌절'되고 있으며 지금도 그러한지 잘 밝혀준다. 이 점을 알면, 왜 미군의 '주둔기지'가 이라크를 포함 카스피해 지역의 나라들에 새롭게 생겨나는지 알 수 있다. 물론 예전에 잘 몰랐던 '코소보 폭격'의 이유가 아주 명백해 지며, 유고슬라비아 해체의 '이면' 사실들을 알 수 있다. 한 마디로, 카스피해 지역의 예상되는 엄청난 석유와 가스 매장량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것에 추가하여, 왜 100년전에는 영국군이 쿠웨이트와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지역에 기지를 두고 주둔했었는지 알게 되며 그자리에 왜 미군이 주둔하는지도 명백해 진다. 

우리는 세계사 시간에 '독일의 3B 정책'이라고 배웠다. 베를린, 베오그라드, 바그다드인가 그러하다. 요컨대 베를린에서 바그다드를 잇는 '철도'를 통해 독일이 중부유럽과 중동을 자국과 연동되는 경제지역으로 만드는 구상이다.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것을 독일의 '제국주의적 야망'으로 묘사한다. 저자는 이 계획의 초기단계에서 독일이, 자신들만의 '자금'으로 부족하기에 영국을 끌어 들이려 애썼다는 점을 부각한다. 이렇게 되면 독일보다는 영미가 더 제국주의적 야심을 지닌 것으로 보이게 되는데 실제로도 그러하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은 많은 병력을 '대륙'에 보내 프랑스와 함께 독일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무려 100만 가까운 병력을 지금의 '쿠웨이트' 지역에 보내 주둔 시켰다고 하지 않은가? 물론 당시 쿠웨이트는 '터키'의 지배하에 있었고 터키는 '3B'의 철도가 지나가는 핵심국이었으니 독일과 한묶음 동맹이었다. 이런 '핑게'로 영국은 쿠웨이트 지역을 선점했는데 이미 '석유'의 엄청난 매장 가능성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점령하여, 독일의 '시도'를 좌절시키고 마는데 물론 독일은 이라크와 협정을 맺어서 석유를 개발하고 이것을 철도를 통해 수송하려 했던 것이다. 바다는 영국해군이 장악하고 있으니 '3B'는 후발 산업국이자 거의 내륙국인 독일이 뻗어나가는 유일한 활로였던 셈이다. 그래서 이후 세계사는 이 독일의 오래된 꿈을 번번히 좌절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는데 전부 '석유'와 관련된 '지정학적' 전략 때문이다. 가령 지금 이라크에는 미군이 들어가 있고, 1999년 코소보 폭격이후 그곳에도 '미군기지'가 생겨서 주둔해있다. 바로, 독일의 3B 철도가 지나가는 길이다. 게다가 폴란드를 포함 동유럽 나라에도 소규모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데 '독일'과 '러시아'를 '차단'하는 모양새다. 여기에도 많은 사연이 들어 있다. 

영국의 프랑스와 손잡고 독일에 대항한다는 이런 '구도'는 두차례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과정속에서 빈번한 '동맹'과 '연합'이 이루어졌다. 가령 영일동맹은 '러시아'에 대한 영국과 미국의 '견제'였고 실제 일본은 러시아를 전쟁을 통해 물리쳤다. 하지만 그 러시아는 양차례 세계대전에서 '영미'와 늘 함께하는 구도속에 있었다. 이런 구도는 아주 단순한데, 중유럽의 강자 독일과 그 관련국들을 동과 서에서 '짜부러뜨리는' 구도였던 것이다. 그래서 독일은 늘 '압박'을 당하는 처지에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드골이 '위대'하다는 점은 바로 이런 구도에 '균열'을 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실 나폴레옹 이후 프랑스는 영국과의 '겨루기'에서 대부분 영국에 양보하거나 밀렸다. 대륙에서는 독일과 늘 '전쟁'을 벌이면서 자국 영토를 '전쟁터'로 내줬다. 반면 영국은 프랑스에 '원정군'을 보내는 방식으로 자국 영토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런 구도가 된 것은 영국인이 프랑스인을 끌어들이는 '수완'도 있지만 통일독일에 대한 프랑스인의 지나친 두려움도 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심하게 말해서 프랑스는 늘 영국의 '앞잡이' 비슷한 노릇으로 전락해 갔는데, 드골이 그런 구도에 종지부를 찍어 버린 것이다. '앵그로 색슨'을 놀려댈 정도로 그런 구도에 그는 익숙했는데,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바로, '서독'의 아데나워와 '독프협정'을 맺는 그런 방법이었다. 

오늘날 '통합유럽'의 출범은 바로 드골의 결단에 기원한다. 이 구도에서 영국은 언제나 대륙과 떨어져, 미국과 함께하는 모양이 된다. 물론 드골은 다른 '원대한 꿈'으로 나아가는데, 빠리에서 모스크바까지 '철도'를 연결하는 이런 구상이다. 이것의 핵심은 '영국'에 개의치 않고, '대륙 유럽' 중심으로 경제적 '공진화'를 이룩한다는 발상이다. 19세기 후반 이후, 바로, 영미의 '석유지정학'과 '파운드-달러' 패권체제에 휘말려 유럽에서는 늘 독일을 '동서에서 짜부러뜨리는' 이런 전쟁구도가 전쟁의 참화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드골의 이런 구상은 영미의 견제를 받게 되었고 이런 구상의 핵심 인물들은 의문의 사고사를 당하는 것으로 '빠리에서 모스크바까지' 철도 연결 구상은 드골이 물러나면서 종료되고 말았다.

이러한 구도는 소련이 무너지는 시점까지 지속되었다. 저자의 묘사에 의하면 영미의 파운드-달러와 '석유'를 중심에 놓은 지정학적 패권 추구는 정말 집요하다. 제1차 세계대전시 쿠웨이트를 영국군이 점령했던 것이 1990년에는 미군과 다국적군의 이라크 침공으로 재현되었다. 저자의 관점에서는 당연히 독일의 오래된 '3B'에 대한 견제와 무력화이다. 여기에 끼워든 사건은 소련의 몰락이다. 이제 독일이 소련과 동부유럽에 접근하여 원전을 포함 산업시설에 대한 '지도'와 확산을 꾀할 경우 자신들의 패권이 약화되니 이것을 견제하기 위함이다. 심지어 놀라운 사실은 당시 미국이 독일과 일본을 포함 - 우리나라까지도 - 여러 나라에서 병력과 물자 및 전비용 '달러화'를 갹출했는데 교묘한 회계를 통해 190억 달러를 남겼다는 이런 얘기를 한다. 이런 얘기들은 전부 충격적이면서도 어디에서 전혀 들어본 바 없는 얘기들이다. 그리하여 1999년에 이르면 발칸에 진출하여 유고를 완전히 해체하고 여기 반발하는 밀로세비치를 '학살 주범'으로 만들어 국제사회에서 매장시키면서 폭격을 통해 무력화 시킨후 군사기지를 두고 주둔했다고 한다.

이 책은 '석유'와 '달러'를 묶어서 세계의 정세를 읽는 시각을 제공한다. 저자의 얘기는 바로 '지금'까지 닿아 있다. 1897년 영국은 '대공황'을 맞이하는데 바로 이때부터 '스털링-파운드'를 지키기 위한 대책으로 돌입했다는 것이다. 후발주자 독일의 맹렬한 추격이 영국의 지위를 내려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그것은 지금 미국에도 해당한다. 저자의 얘기는 아주 쉬운데, 가령 미국은 1957년 종전 이후 첫 경제 위기에 직면한다는 것이다.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전쟁물자 생산을 위한 투자를 한지 30년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이라는 것. 요컨대 '재투자'를 하여 생산적 산업의 '갱신'을 할 시점이었다. 그런데 '금융화'의 길로 이때부터 나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산업' 구조조정을 통해 변화된 조건에 맞게 생산력을 더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경제를 바꿀 시점이었는데, '국내투자'보다 더 수익률이 높은 '해외투자'에 눈을 돌려서, 바로 이 시점부터 주로 '유럽지역' 중심으로 달러화 자본이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길은 영국이 갔던 바로 그길이기도 했고 저자의 핵심 주장에 해당한다. 바로, 시티와 월가를 한묶음으로 하는 '금융자본'의 출현인데, 이것이 '석유 지정학적 전략'과 밀접히 연계되어 있다고 한다. 

저자의 설명력은 매우 뛰어나다. 가령 2001년의 캘리포니아 전력대란 같은 사건은 아주 간단히 해석가능하다. '금융화'덕분에 그러하다. 물론 여기 '사유화'까지 겹쳤으니 더 심각하다. 미국은 레이건 시대에 볼커의 고금리 정책으로 제3세계 외채위기를 불렀는데, 저자에 의하면 이런 것도 '국내적 인플레이션'을 잡는다는 것 보다는 다른 나라의 '산업성장'을 고사 시키기 위한 수단이 된다. 약간은 심한 해석처럼 생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고금리가 제3세계 외채위기를 유발하면서 원래 의도했던 성과를 더 거두었다고 생각한 순간, 볼커는 레이건 임기 말 무렵에 금리를 아주 크게 내리는데 바로 이때부터 미국의 제1차 금융거품 형성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런 점은 더 자세히 연할 부분이지만, 이 시점은 오늘날 세계 금융 '규제완화'의 원형이 거의 뉴욕 월가에서 이루어진 시점이었던 듯 하다. 모든 금융규제가 다 해제되었고 이런 와중에 '밀켄'과 같은 사람이 출현했다. 물론 이 사람은  초저금리와 대출에 기초하여 멀쩡한 기업을 인수한 다음 팔아서 주주들끼리 나눠먹는 이런 '적대적 엠앤에이'의 길을 연 사람이다. 바로 이런 길로 가버렸으니 미국의 생산적 산업은 물론 '갱신'이 필요한 기간 산업으로서 전력이나 도로, 철도에 대한 투자가 멈춰버린 것이다. 주목할 점은 바로 이렇다. 캘리포니아 전력대란도 그렇지만 가령 뉴올리언즈 해일 참사때 미국정부의 대응은 사실 제3세계의 어떤 정부만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런 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외환외기 포함 러시아의 모라토리움, 나아가 일본의 '금융거품 형성과 꺼짐'가지도 같은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굉장히 설득력 있다. 특히 일본에 대하여는 그러하다. 플라자 합의 자체가 말도 안되는 '강제'였기도 했지만 이후 일본에서 벌어진 사태들을 보아도 그러하다. 일본은 아주 충실한 미국의 '달러화 환류' 국가였고 최고급 전자제품의 수출국이었지만 결국 '당'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물론 애초 소련의 '방파제'로 경제성장을 용인했는데 너무도 커서 '아시아 지역'의 맹주로 떠오를 것이 두려워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1997년 태국에서 시작된 외환위기란 아주 간단한 것인데, 투기금융 자본이 '개방'을 하긴 했지만 아무런 '제어' 방책이 없는 초기를 틈타 '공략'에 성공한 케이스라는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는 연 7%의 고성장 활력을 잃은 것은 물론, 금융자본이 언제 빠져나갈지 몰라 '전전긍긍'하는 이런 상태로 10년을 보냈다. 이 과정속에서 '대응책'이라는 것이 '금융허브'였던 셈이다. 물론 제대로된 대응인지 어떤지 아직도 '검증' 중에 가로 놓여 있고 '자본시장통합법'이 올해 시행되면 본격 검증 단계로 접어들 것이다. 

이 외에도 이 책은 한국인의 상식을 싹 뒤집는 얘기를 담고 있다. 내가 알고 싶었던 것 중의 하나인 어떻게 한국의 경제성장이 가능했는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이책은 담고 있다. 바로, 일본의 이웃에 있었고 중국의 턱밑에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때문이다. '전략 기동군'으로 개편한다면서도 미군이 왜 한반도에 머물려 하는지 대답도 가능하다. 석유 지정학에 의한다면 다음 라이벌이 중국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중국은 1조를 넘는 달러 외환을 적절히 사용하여 전세계 곳곳에서 '석유'를 얻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미국 석유기업 유노칼을 인수하려다 미국 정치인들의 반대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신에 아프리카건 남미건 석유찾아 삼만리를 오늘도 계속하고 있다. 이 와중에 이란과 협정을 맺고, 이란은 미국과 '적대'하면서 '석유결제통화'를 유로화로 바꾸겠다고 한다. 석유 덕분에 다시금 경제적으로 부유해진 러시아는 루블화로 결제하는 석유시장을 만들겠다고 한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영미의 '스털링-파운드, 달러' 패권 체제는 중국을 어떻게 할 것인가? 사실 티베트 사태도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전략'의 일환이 아니겠는가? 영국이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참여하던 무렵 재정적으로 파탄상태였다고 한다. 미국이 지금 재무장관이 연거푸 '적자재정 한도액'을 증액하는 '법개정'을 요구하는 이런 상황으로 가 있다. 과연 어찌될 것인가? 미국이 지목한 악의 축 중에서 이라크는 지금 점령중이고 북한과는 평화적 해결 단계로 진입했고 남은 나라는 이란이다. 그리고 약 보름전에 이란의 함정에 '발포'했다는 뉴스가 나온 바 있다. 과연 다음 차례는 중국까지도 함께 겨냥 가능한 이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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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정의 (양장)
피터 벤츠 지음, 최영래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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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사상사 - 루소에서 기든스까지
존 배리 지음, 허남혁.추선영 옮김, 이홍균 감수 / 이매진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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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오랫동안 나는 왜 '동유럽'의 환경오염이 심각할까 생각했다. 1980년대는 '소련'이 두번째 강대국으로 생존한 시점이었다. '소련'이라는 말은 사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다 모르기 십상이다. 아마 40대 넘어야 할 것 같다.

'소런'이 역사의 너머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후, 다시금 '러시아'라는 이름이 등장했다. 레닌그라드는 다시 '페트로그라드'로 바뀌었다. '스탈린그라드'는 다시 '볼고그라드'로 바뀌었다. 소련이 사라진 후 맑스주의는 죽은 개 취급을 받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이후, 유일한 제국 미국의 시대가 펼쳐지면서, 다시금 맑스주의는 '주목' 받게 되는 듯 하다. 각광받지는 절대 못한다. 최신의 담론 환경생태학의 등장이 크게 영향을 미쳤다. 환경사상과 철학, 그리고 생태학의 담론은 '최신'이었다. 노르웨이에서 나온 내스의 '심층생태학'이 바로 1977년에 출간된 것을 보면 마치 '시대의 전령' 같이 보이기도 한다. 물론 '사회생태론'이라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어떤 면에서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생태주의에 담은 머레이 북친의 사유도 이때쯤 출발했다.

문제는 바로 이 시점인 1970년대에서 1990년초 사회주의 붕괴시점까지 소련과 동유럽 나라들의 환경문제 또는 환경교육에 대한 인식이다. 당대 이 나라들에서 '대표'로 나온 사람들이 여타 '자본주의국'에 대하여 하는 말은 다 동일했다. "자본주의가 환경문제의 근본 원인이므로 자본주의를 폐절해야 합니다.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환경문제는 없습니다." 하지만 전혀 아니었다.

뚜껑을 열어 본 결과는 동유럽 지역의 환경오염이 더 심했었다는 것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나는 '석탄산업'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 아니었나 싶다. 이는 기술발달의 정체에 해당한다. 여기에 '지령경제'라는 과도한 '계획'의 남용과 '미집행'에 연유한 '경제적 재생산'의 멈춤이 크게 기여했다. 소련과 동유럽에서는 일찍 환경보존에 대하여 '의식'한 것 같기는 하다. 하지만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이런 과정 전체가 '관료적 통제'에만 의존했으니 잘 되지 않은 것이다. 경제가 잘 안돌아가는데 '환경'인들 챙겨졌겠는가? 지금 환경보전이 가장 잘된 나라들은 대부분 북서유럽국가들이고,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들일 경우가 많다. 가령 '독일'에 대하여는 사실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일본과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숲'이 잘 보존되어 있고 신재생에너지 전환 비율이 높다는게 눈에 띈다. 환경보전이 잘되고 있는 '큰 나라'의 사례이다. 북유럽 나라들은 '작은나라'의 사례들이다.

왜 그랬을까? 녹색사상사에서 가능한 '답'을 찾을 수 있다. 맑스주의 역시 '시대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사실. 맬더스는 1798년, 그러니까 '산업혁명의 초입'이면서 '지주의 시대 말기'에 활약했다. 크게 증가하는 '빈민'인구에 놀라 내지른 '비명'이 '인구론'이었다. 당대 영국의 인구는 겨우 1천만명이었다. 1700년대의 1백년간 프랑스는 인구증가율이 떨어졌지만 영국은 크게 늘어난 결과였다고 한다. 영국의 인구증가는 '엔클로저' 운동의 결과로서 '대토지소유'와 같은 사회경제적 변혁과 더불어 농업기술의 비약적 향상에 의한 '농업 생산성의 획기적 증대'에 기인했다. 그리고 이렇게 농업생산력이 증대되던 1700년대는 '제철업'이 크게 발달하였는데, 이전시대에 '숯을 사용하는' 가내 수공업 제철업이 '숲'의 과도한 파괴로 위기를 불렀다. 이는 확실히 '에너지 전환'의 압박에도 이어졌다. 그런데 당대의 영국은 땅만 파면 석탄이 나올 정도로 풍부했다. 이미 이것을 조금씩 연료로 사용했다. 제철업에서도 석탄을 사용해왔지만 '숯'을 대체하는 '코크스'는 발명이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이 기술적 난점이 1700년대에 해결되자 드디어(!) 나무가 석탄으로 대체되었다. 뉴커멘 증기펌프가 와트의 획기적 개량으로 효율이 향상되면서 석탄 가격이 떨어져 갔고 운하와 같은 운송수단도 석탄이 값싼 '대체에너지'로 등장하는 배경이 되었다.

바로 이런 시대의 '말기'에 맬더스는 빈민의 인구증가에 놀랐다. 그 '빈민'은 물론 엔클로저에서 밀려나 '도시'로 상경하여 결국 증기기관으로 가동되는 초창기 면직공장 이런데 취업한 초기의 '노동자'들이었다. 당시에는 5세아동에서 여자들까지 전부 공장에서 일했다. 맨체스터에서 노동자 수명은 겨우 17세, 전문직은 36세였다고 한다! 이 '야만'이 산업혁명의 실상에 대한 가장 정확한 묘사다. 허나 이런 이야기를 연구한 프랑스의 뽈 망뚜는 그래도 영국의 당대가 '프랑스'보다 나았다고 얘기하니 이 시대 영국이건 프랑스이건 가난한 사람들의 참상은 정말 심각했던 것이다.

녹색사상사는 바로 이런 시점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왜 소련과 동유럽에 환경문제가 만연하게 되었을까? 경제적 재생산의 문제와 더불어, 맑스주의 자체에 내재된 한계가 있었다. 저자는 맑스주의가 탄생시점부터 '맬더스'적 사유에 반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요컨대 '인구론'은 몰락하는 지주계급의 '비멸소리'에 불과한 '이데올로기'이다. 실제 '인구론'의 정치사회적 성과란 빈민층에 대한 '구제기금'을 감소시키는 것이었다. 요컨대 '복지'를 줄이는 이데올로기적 정당화였다.

당대의 맑스는 맬더스 이후, 산업혁명의 '세계사적 전개'의 한복판에 생존했다. 그리하여 그는 증기의 엄청난 '산업적 폭발'에 놀란 나머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다. 바로, 그의 후예 노동자와 노동자당들이 '환경'문제를 등한시 하도록 말이다. 자본론 3권에 농업생산의 '환경적 한계'에 대한 언급이 있었지만 그냥 스쳐 지나가듯 했다. 맑스는 요컨대 자본주의가 엄청난 생산력을 향상시켜 가면서 그런 '한계'를 돌파할 수 있다고 '낙관'한 것이다. 단지 자본의 편이 아니라 '노동'의 편에서 그랬다는점이 다르지만.

그리하여 오늘날 '환경운동'은 대개 '중류층'의 운동이기 십상이다. 미국에서도 마찬가지로 발견된다. 노동조합은 환경운동과 '친화적'이기 어렵다. 말하자면 '산업구조'라는 측면에서 무너져버린 공산주의 국가나 현존 자본주의 국가나 '동일'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인간중심주의'라는 틀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에 착목했을 뿐이지 환경과 생태 자체에 대한 관심과 문제설정은 자본주의 공산주의 국가 모두 미흡했다는 것이다.

녹색사상사는 이 지점에서 아주 훌륭한 통찰을 내보이는데 나는 엉뚱한 해석을 하려 한다. 바로, 페이비언 사회주의 '원류'에 닿는 존 스튜어트 밀의 사유이다. 그는 당대에 '지속가능발전'의 사유를 이미 하고 있었다. 그가 살았던 시점은 사실 영국의 '제국적 확장'이 정점에 이른 시점이었다. 1880년에서 1900년까지가 이 시점이었다. 그리고 이 영국 제국주의는 '증기'에 기초한 '자본주의' 산업화에 기반하고 있었다. 즉, 증기시대의 마감이 바로 영국 제국의 후퇴 시점이었고, 당연히 존 스튜어트 밀과 같은 사유가 가능했던 셈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지금도 환경운동이 대개 중류층 운동으로 머무는 듯 하다. 매우 '근본주의'적 지향을 함의하면서도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지 않는 모순을 드러낸다. 한국 환경운동은 더욱 심하다. '새만금'에 대하여 근본생태주의 입장에서 격렬하게 반대하나 '정치영역'으로 들어오면 온건 신자유주의 입장으로 돌아서는 모순을 보인다. 서유럽이 '사회주의'의 실현으로서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 체제를 경험한 것과 대조적으로 한국은 군사독재국가에서 곧바로 부르즈와 민주주의로 이행하는 수준에 머물러서 그러했을 것이다.

이 책은 지속가능발전의 '언류'에 해당하는 사상의식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파헤친다. 읽을 수록 생각하라 거리를 많이 던져주면서 '사유'의 풍부성과 깊이를 더해 준다. 하지만 잘 읽히지 않는 책이라 안타깝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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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도전 - 위기의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김광수경제연구소 경제시평 01
김광수경제연구소 엮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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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에 대한 통찰과 경제학자의 임무 - 위기에 정직하게 직면하기 


김광수 경제연구소 지음 "한국경제의 도전"


1997년 1월은 이른바 외환위기 약 10개월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외환 보유고를 보면서 한국경제에 어떤 위기가 닥치고 있다고 생각한 경제학자들이 몇 있었다. 이미 1996년 수출은 '격감'했고 이 때문에 외환보유고 또한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세계화'는 사실상 외환과 금융에 대한 급진적 규제철폐로 나갔고 '감독기구' 같은 것도 없이 '종금사'와 같은 금융업체 설립히 허가되었다. 이 '종금사'가 이른 바 '만기 불일치' 방식의 금융업 돈벌이를 처음 선보였다. 금리가 싼 엔화계열의 단기대출을 얻어다 금리가 비싼 동남아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이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1995년은 이른 바 역플라자 합의로 '일본'에 가해졌던 '엔화절상' 형극의 고통이 조금 완화되던 시점이었다. 이 역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수출 대체국'으로 떠올랐던 한국과 동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타격이었다. 엔화의 가치가 다시금 '하락'(환율상승)하면서 원화 포함 동남아 통화의 가치는 '상승'(환율하락)해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97년 1월쯤 원화의 '달러환율'은 기적적으로 700원 정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이 '해외여행' 바람이었다. 1997년 여름까지 엄청난 '해외여행' 붐이 생겼다. 외환은 점점 줄어갔다.

문제는 1달러 700원 환율이 과대평가된 환율이라는 사실이었다. 1996년 격감한 무역흑자 때문에 외환에 문제의 조짐이 생겼다. 1997년 종합금융사의 '만기 불일치' 해외차입 투자가 늘면서 이런 문제의 '조짐'들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당대의 김영삼 정부가 '몰랐다'는 것에 더하여, 언론의 '비호'를 받았던 만큼, '경제문제'에 대하여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막강한 의제설정 기능을 갖고 있었던 한국의 언론은 당시 '간간히' 흘러나왔던 한국경제 '위기직면설'에 대하여 한마디로 일축했다. 당대에는 박찬종 같은 사람조차 '외환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지만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국언론이 한마디로 '부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과정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경제'와 '금융'을 연계시켜 보는 '관점'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오늘 '김광수 경제연구소'를 꾸리는 김광수 소장도 이런 사람들중 '탁월한' 하나였다. 이 분은 '이미' 당시에 외환위기를 예견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이 분이 '수학'하던 시점이 일본의 '황금빛 재테크 시기'였던 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85년을 정점으로 일본의 1980년대는 글자 그대로 '황금시기'였다. 물론 '동경 물가 세계 1위'와 같은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허나 미국에 대한 수출은 끝없이 증가하고 달러화 흑자는 끝없이 쌓여 가는 것처럼 보였던 시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적어도 '경제'에서 만큼은 이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심감의 팽배속에서 다시금 세계의 '열강'중 하나 또는 최소한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재부상한다는 분위기속에 있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속에서 김광수 소장은 경제학 공부를 했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대의 일본은 넘쳐나는 달러화 흑자를 어찌하지 못한 채, 역시 국내의 '유동성' 또한 막대하게 증대되었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화를 쓰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다시 투자하거나 아니면 '엔화'로 바꿔서 사용한다. 전자를 일본인들은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후자의 결과로서 1980년대 일본의 유동성은 크게 늘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자이테크'를 조장하는 '금융'의 만개시대로 나아갔다. 돌이켜 보면, '튜립투기' 직전의 네덜란드가 그러했고, '대공황' 직전의 미국도 그러했다고 한다. 막대한 무역흑자로 국내 유동성이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거나 나도 부자가 되겠다는 '황금빛 꿈'에 젖어들었다. 이런 것들은 예외없이 '금융거품'을 형성했던 셈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일본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물론 1920년대 미국의 '사태'들은 주로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 증폭되었지만 1980년대 일본에서는 국내외적 요인이 합쳐져서 발생했다. 이 한복판에서 공부를 한 김광수 소장은 따라서 '금융'이 어떻게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바꿔가는지를 '통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지는 '금융화'가 어떤식으로 전개되고 한국경제를 바꿔 나갈 것인가를 사실상 '초기'부터 통찰해온 경제학자로는 그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광수 경제연구소의 '통찰'에 힘입어 이른 바 '금융'이란 것의 실상을  알 수 있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분의 통찰에 힘입어 한국경제에도 금융거품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금융거품의 초기조건중 하나는 막대한 무역흑자의 누적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도 짧은 기간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환율의 '절하'(환율하락) 덕분에 2003년까지 수출이 급속하게 늘었고 다시금 흑자가 쌓였다. 현대자동차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것은 원 달러 환율이 무려 2000원까지 치솟은 덕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외환위기 시점에서 우량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고 수출중심 대기업들만 크게 혜택을 입으면서 이른 바 '고용없는 성장'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금융에 대한 급진적 개방까지 겹쳐서 대략 2004년까지 한국에는 막대한 무역흑자와 더불어 '금융시장 투자목적의 외화 반입'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당연히 원화 유동성의 엄청난 증대를 불렀고 금융거품 형성의 '초기조건'이 되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계기가 2004년 1년동안 지속된 한국역사상 가장 낮은 3.25%의 초저금리였다. 당시 재벌경제연구소에서조차 금리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김진표와 교감한 당시 한국은행장은 금리를 오히려 내렸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는데 '금융허브'의 조건을 위해서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2003년의 10.29대책을 완전히 무력화하면서 다시금 금융주택거품이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일본'이 갔던 바로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 이 때문에 거품의 한복판에서 바로 그것을 연구하고 돌아온 김광수 이분이 탁월한 통찰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광수 이분의 남다른 점이 또 있다. '통찰'에 윤리성이 곁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윤리성'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로, 박현주와 같은 사람과 대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연령이 비슷하다. 허나 걷는 길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이 많다. 바로, 한국경제의 '금융화'에 대하여 '예지'와 '통찰'과 '선견'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슷한 통찰을 갖춘 두 사람은 모두 '한 사람'과 인연을 갖고 있기도 한데, 바로, 이헌재라는 사람이다. 이헌재 이 분 또한 김대중 정부하에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사람이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할때 흔히 '초기'의 구조조정을 얼마나 빠르게 했는가를 대조하는데, 과감하게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구조조정'을 밀어 붙인 사람이 진념과 이헌재였기에 그렇다. 

박현주와 김광수는 무엇이 다를까? 전자는 '돈'의 흐름을 꿰뚫고 이제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증권회사를 설립한, 말하자면, 21세기의 '이건희' 비슷한 사람이다. '금융화'에 대한 통찰과 선견, 게다가 '금융화'를 잘 아는 '인맥'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 냈고 하고 있다. 후자는? 본인 스스로 '경제연구소'가 아니라, '증권연구소' 같은 것을 하면서 돈을 벌 '기회'를 만드는 쪽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안했다. 간단히, 이 분은 '컨설팅'과 '프로젝트'의 수행에 몰두했고, 나아가 그런 것들을 '국민경제의 순항'라는 큰 원칙속에서 수행했다. 바로 이점에서 나는 이 분이 '윤리'에 입각한 경제학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광수 이분이 가장 먼저 '수행한' 임무는 한국경제의 '거품'을 예보하는 것이었다. 이미 2003년에 그는 '부동산 거품'을 예보했다. 당시 40% 가량 거품이 끼워져 있고 이것을 빼내서 가계소득분을 '이자'로 돌려줘야 경기를 살릴 있다고 했다. 이 흔치 않은 통찰은 사실 당시에 이헌재 같은 분의 '지지'를 받는 정도였지만 그의 이 '예보'는 실현되지 못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참여정부는 김광수 같은 '예보가'의 통찰을 제대로 받아 안아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역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역량'만 갖췄는데 아마 가장 이름을 떨칠만한 분으로 당대의 '관료' 김진표 이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금융거품'에 대한 예보는 여러군데서 '이미' 나오고 있었다. 엘지경제연구소도 이 중하나였다. 여기서는 이미 2001년 요컨대 지금 돌이켜 보면 금융거품 형성의 '초기' 국면으로서 '아이씨티 버블'이 꺼져가던 그 무렵이었다. 부동산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는 예보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2001년과 2002년의 아파트 폭등은 선거에도 반영되었다. 바로, '분양원가 공개'라는 공약형태로 노무현 후보의 공약에 집약된 것이다. 문제는 이행이었다. 바로, 노무현 정부의 출범 첫해였던 2003년, '기선을 제압'해야 마땅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대의 '경제부총리'로 취임한 김진표 바로 이사람이 '그 모든 초기조건'을 다 '금융거품'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밀어 붙여버렸다. 이 '놀라운' 사태속에서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간단히 국면을 정리해 버렸고 나아가 2004년경에는 '10배 남는 장사도 장사다'라고 하여 아예 '폭리실현' 자체를 정당화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부동산'에 대한 '대응'을 지속적으로 해 왔는데 5년에 걸쳐서 무려 30여차례 이상이었다. 허나 전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된데는 참여정부의 청와대와 관련 경제부처들이 다 따로따로 제갈길을 갔던데도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것은 '관료'들 스스로 '자이테크 거품'의 길로 줄달음질했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줄달음'을 합리화하는 것이 '금융허브'였다. 만일 김광수 소장이 제언한대로 정책이 실행되었다면 박현주의 '성공' 또한 좀 작아졌을 테지만 그만큼 '위험'은 작아졌을지도 모른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 한국경제의 '금융거품'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찰'은 정말 각 국면보다 거의 빛나는 예견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2006년 연구소는 이미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예견했다. 나아가 미국 금융의 현재 상태와 서브프라임 사태의 파장까지 정교한 분석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통찰'은 이 책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만일 주식투자가라면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상당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거시경제적' 안목에서 세계경제를 보는 눈을 열어주면서도, 세부적 쟁점에 대한 '통찰'까지 제공해 주고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견'하는 안목까지 열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점점 더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만, 가령 이헌재와 인연이 닿은 역시 '예견'과 '통찰'의 천재 박현주와 김광수가 어떻게 '판단'을 달리하기 시작했는지까지 잘 드러난다. 사실 이 두사람이 '합쳐진' 것이 아마도 한국의 '금융'을 한국의 '경제'와 연관지어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이제 '승부'는 분명해 지고 있는 듯 한데 말하자면 경제의 '펀더맨틀'이 뭔지가 점점 드러나는 시점으로 이행하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가격'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펀더맨틀'이 경제적 재생산의 원활을 보장할때 가능하다는 테제 말이다. 사실 박현주 이분은 '베어족'으로 어느 시점에서 '전환'했어야 했는데 그 시점을 놓쳐 버렸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서 떠오르는 금융회사가 있으니 그 이름이 제이피 모건이라고 한다. 베어스턴스를 인수하여 이제 세계 1위로 등극했다는데 골드만 삭스 같은데서 '모기지 채권' 영업을 지속하는 동안 제이피 모건은 그 '위험도'를 평가한 후 아주 조금씩 모기지 채권을 매도해버렸다. 사태가 확산될 즈음 제이피 모건에는 모기지 채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데는 가령 '박현주' 같은 애널을 '김광수' 같은 애널로 바꾼 제이피 모건 경영진의 탁월한 선택도 있다 한다. 사실 뒤늦었지만 모건 스탠리 같은 데도 '베어족' 애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다. 그 유명한 '스티븐 로치'는 아시아지역 총괄 사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영원한 상승'이 없듯 '영원한 하강'도 없지만 상승과 하강에서 어떤 포지션을 택하는가에 따라 금융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한국경제의 도전"은 한국경제가 하강을 앞두고 있다는 '경보'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해야 국민경제적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가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 책의 제안은 사실 단순하다. 근면, 저축, 빚갚기, 낭비 줄이기, 아끼고 절약하기. 가계와 개인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부의 거시경제 정책도 이리 가야 한다. 물론 단순 '저축'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가장 먼저 이 책의 제안은 금융거품을 조금씩 빼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2003년에 이 연구소의 제안대로 했다면 지금쯤 한국경제는 세계적 '위기'를 비교적 담담히 직면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허나 그렇게 안했기 때문에 이제 금융거품은 '저절로' 꺼질 지경으로 부풀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빼고 가계와 개인의 '소비'를 진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제안한다. 문제는 지금의 정부정책이 거꾸로 간다는데 있다. 이렇게 하려면 다른 조건들의 맞물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금리인하'와 더불어 '금융거품'을 빼면서 동시에 거품형성에 맞닿는 정책들을 제한하는 것인데 노무현 정부의 말기에 이르러 겨우 손댔던 '주택담보대출 제한'과 같은 제도를 말한다. 말하자면 '금리인하'가 실제 경기진작으로 이어지려면 단지 '생산자'인 기업에 대한 금융부담을 덜어 주는 정도로 미흡하며 금융거품 제거와 가계와 개인의 부채이자 경감 등이 아울러 진행되면서 더 큰 금융거품의 발생원인은 차단해 가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정부는 오히려 반대로 나아간다. '금융거품'을 부추기는 정책수단만 '골라서'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금리인하와 더불어 LTV나 DTV를 풀어헤치는 이런 방향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이제 2-3년정도면 한국경제가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언'이 틀리면 명성에 흠이 생기므로 경제학자들은 잘 예언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부담'을 피하기 위해 '교육'과 같은 부업을 하는 것인가? 경제학자들이 요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이 책은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에 값하는 '논거'들이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어 저자의 생각에 동의 하건 안하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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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yonara 2008-11-17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훌륭한 책은 리뷰도 훌륭합니다.
 
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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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는 영어로 conservatism이라고 하죠. 환경보전할때의 '보전'을 conservation이라고 사용할때가 있습니다.  preservation과 섞어서 사용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말 '보존'은 그냥 '지킨다'는 의미를 가지는데 '보전'은 동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숲을 '보존'하면 그냥 놔두는 것이고 숲을 '보전'하면 '재생'을 감안하여 적절히 사용한다는 의미입니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숲은 정말 잘 '보존'되었습니다. 나무를 건축에 사용하긴 했지만 우리나라의 숲은 황폐화되지 않으면서 잘 '보존'된 것입니다. 일제시대 들어서 '남벌'이 이루어지면서 그 숲과 원시림의 나무들이 모두 베어졌다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숲은 사실 박정희 시대 이후의 '인공적 조림사업'을 통해서 새롭게 조성된 것입니다. '식목일'을 정부에서 지정하고 나무심기 사업을 대대적으로  펼친 결과라는 것이며, 이보다는 연료용 화목채취를 금지시키고, 석탄과 천연가스 그리고 석유로 난방연료를 대체한 결과라 합니다. 

말이 나온김에, 박정희 정부는 엄청난 '통제'의 시대이고 '반민주 반민족' 이런 수사로 비난되어 왔지만 '보존'의 측면에서 여러가지 '선구적'인 업적이 있습니다. 가령 1970년대 중후반의 자연보호운동 같은 것이 있습니다. 이 시기에 '입산금지'가 이루어짐과 동시에 식목일을 활용한 대대적 조림사업과 더불어 난방용 연료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월드워치의 창립자 레스터 브라운 조차도 한국의 숲이 모범적으로 복원된 사례로 인용할정도로 숲의 복원은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허나 이제 '생태적 관점'에서 사실상 '어거지 조림'이었다는 점이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한편 또 다른 모범사례가 있는데 영국 런던을 모방한 '그린벨트'의 설정은 정말 시대를 앞선 조치였습니다. 

박정희 정부가 만약 '보수적'인 정부였다고 한다면 '보수적'인 조치중에 속하는 '숲의 조성과 보존'과 같은 정책은 그 이념지향에 딱 알맞은 것입니다. 하지만 박정희 정부는 결코 '보수적'인 정부가 아니었습니다. 정부 기구에 '경제기획원'을 두고 거의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 체제 비슷한 것을 정부가 이끌어 나가는 상태였습니다. 개발독재 보조금 경제라고 불릴 이런 체제속에서 한국경제는 엄청나게 확대되었습니다. 그 중심에 경제기획원이 있었고 거의 소련의 '고스플란' 수준으로 '산업적 기획'을 한 곳이었습니다. 경제가 성장하고 군사정부가 무너진 후  경제기획원이 사라지고 재정경제원이 등장했습니다. 국가 '규제'는 전부 '군사독재의 유물'로 치부되면서 민간정부는 '시장원리'에 따라 경제가 운용되도록 가능한 모든 정부규제는 풀어헤치는 방향을 선택했습니다. 물론 여기에는 외환위기라는 외부적 변수가 엄청난 압력을 작용한 것도 있습니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부터. 

다름아닌 이 순간, '보수'가 아닌 '보수'가 등장할 빈틈이 벌어졌습니다. 그린벨트는 이제 훼손될 대로 훼손되고, 건설업과 유착한 정부의 재정-건설 관료들이 그린벨트의 '공유지'를 '규제완화'의 미명하에 해제하면서 아파트 부지로 조성하여 공급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이제 '보수' 아닌 '시장만능주의'가 박정희 시절의 긍정적인 유산마저 모두 훼손하기 직전 상태에 와 있습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의'문명의 몰락'에서는 왜 '보수주의'가 생기는지 한 측면에서 아주 절절하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는 '아이슬란드'를 개척한 바이킹의 사례를 서술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정착이 어떻게 성공했는지 '그린란드'와 대비하여 서술합니다. 한국을 휩쓰는 '시장원리'는 마치 어떤 물질적 환경적 조건조차도 그것 하나만이면 다 넘어설 수 있다는 '주관주의' 또는 '주의주의'의 환상속에 한국사람들을 물들인것 같습니다. 이 순간, 인간의 의식형태 조차 물질적 삶의 조건속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것이라는 테제는 잊혀집니다. 사회주의권의 몰락과 더불어 기억에서 사라져 버린 맑스의 이 '새삼스런' 테제가 맑스주의와 무관한 '환경고고학자'의 눈을 통하여 생생하게 되살아납니다. 아이슬란드의 바이킹은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숲'을 보존하는 것 만이 아이슬란드에서 삶의 지속가능성을 보장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물 에너지 흙 공기 등 '생태계'의 기본 요소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통찰'을 매우 가혹한 환경조건속에서 깨달은 것이죠. 

이렇게 살아남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매우 '보수적'이라고 이 사람은 표현했습니다. 정말이지! '보수적'이라는 말을 '보존적'이라고 바꾸면 딱 맞아 떨어집니다. 이때의 '보존적'이라는 말은 사실 '개발'이라는 말의 반대의미를 갖죠. 나무 하나 베어내고 밭 한뙈기 개간하는 정도의 '개발'만으로도 아이슬란드는 곧바로 '물과 흙'의 문제에 부닥치게 된 경험이 작용한 것이죠. 숲이 사라지는 순간부터 토양이 침식되고 물은 당연히 부족해 질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특히 아이슬란드 같은 화산섬에서는 '토양침식'이 곧바로 생존에 직결되는 문제가 됩니다. 그리하여 아이슬란드의 바이킹이 터득한 지혜는 양이나 돼지처럼 무차별하게 식물과 그 뿌리까지 파헤쳐 먹어치우는 동물은 사육하지 않는다는 것. 숲의 나무는 절대로 베어내지 않는다는 것. 토양침식을 일으킬 개간 등을 하지 않음. 섬 근해의 물고기 잡이를 주산업으로 삼는 산업의 전환을 이룩한다는 것 등등. 

우리나라 오늘 어떠할까요? '대운하'로 표상되는 '보수'진영의 '개발계획'은 사실 이 사람들이 진정한 '보수'가 전혀 아니라는 점을 입증할 뿐입니다. '보수'는 지킨다는 의미인데 지킬게 없는 것이죠. 그동안 이 사람들이 '지킬 가치'로 여겨져 왔던 것들이 사실 다 의미를 상실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뭐 별로 내세울게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만능주의'에서 한국의 보수는 한국의 '자유주의' 진영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일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시장원리'만 따르는 것도 아닙니다. 요컨데 '입맛에 맞게' 이데올로기는 그저 '담론'으로 활용될 뿐이죠. 이때 '지키고자 하는' 것중에 가령 아이슬란드와 같은 '환경보전'과 같은 가치는 들어있지 않습니다. 아마도 '사유재산'이나 '특권적 지위'가 그들이 지킬 대표적 가치일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킬 가치'와 부르짖는 주장 사이에 틈이 벌어지는데 대운하 같은 사업에서 그러합니다. 

가령 '대운하'와 같은 기획은 '국가중심주의'적인 경향이 강한 사업입니다. 그리고 전혀 onservatism'에 다가서지도 못합니다. 요컨대 이런 것은, 가령 '공공사업'으로서 '전쟁'을 자기 임무로 삼았던 1차대전 패배 직후 독일의 '루덴도르프' 같은 사람이 생성한 이데올로기에 다가서죠. '국가'란 타민족과의 '전쟁'을 수행하는 도구이며 여자들은 튼튼한 남자 아기를 낳고 길러 이런 국가적 목표에 부응해야 한다는, '스파르타'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이런 '이념'은 1차세계 대전의 패배 충격에서 나온, '반드시 복수하겠다'에 바탕을 둔 이데올로기이지만, '국가'를 '전쟁'과 같은 공공사업을 '영구적으로 수행'하는 주체로 상정했다는 점에서 '시장만능주의'하고 또 다릅니다. 이것이 다름아닌 히틀러의 파시즘이었던 것입니다.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아이슬란드의 '경제'를 들여다보는 것을 통하여 왜 그들이 '보수적인지'를 잘 밝혀냈습니다. 나는 이 시점에서 왜 '중세'가 인간이 스스로를 소외 또는 '외화'시킬 수 밖에 없던 시대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 시대에 자행된 '숲의 파괴'가 로마제국을 더 이상 지탱시킬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이루어지면서 '재생'의 시기를 경과하는 동안 '보수적인 중세'가 있을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보수적'이라는 말을 '보존적'이라는 말로 바꾸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중세의 '삼포영농' 같은 것, 장원단위의 자급자족 영농 이런 것 모두 배후가 되는 '숲'을 반드시 전제로, 요컨데 '지속가능한 경제'를 유지하기 위한 방편이었던 셈이고, 이런 체제를 유지하는데 반드시 필요했던 이데올로기가 인간 개체 밖에 '절대적 존재'를 상정하고 그 '존재'의 뜻을 따라 순환적 자연에 순응하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동양과 달리 '순환적'인 자연관보다 직선전 발전관이 만연한  서유럽에서는 비록 '요정'이 숲을 날아다닌다는 믿음이 있었다 해도,  당연히 그것은 유일신 중심의 억압적인 '신정질서'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이나 일본에서 궂이 '신정질서'가 불필요했던 것은 무시간적이며 '순환적'인 자연관 자체가 이미 '환경적 제한조건'을 삶의 기본 조건으로 터득한데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죠.  

'원령공주'에서는 나무의 요정들이 '숲'을 가득 채웁니다. 기계적 도구적 이성의 시대는 사실 그런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도 인간개체가 '시장원리'에 따라 '이기적 욕심'을 채울 수 있는 '생산성'의 시대였던 셈입니다. 물론 '화석연료'라는, 지질시대 45억년의 '잉여분'을 엄청나게 빠르게 소진한 덕분입니다. 르네상스는 고전 그리스 시대 사상의 부흥으로 얘기되죠. 그 시점은 내 '독단적' 해석에 의하면 중세의 '암흑기'속에서 로마제국에 의해 훼손된 숲이 어느정도로 '복원'된 시점이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 로마제국에서 인간개체는 자신을 '밖'의 '신'에 묶어 놓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무와 숲이 여전이 풍부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기초한 경제적 생산력도 풍성했을 것입니다. 허나 인구의 증가에 의해 점점 생산력이 저하되고 결국 숲이 다 사라지면서 숲의 '복원'을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며 그것이 '중세'의 암흑기로 인식되었을 것입니다. '암흑기'가 아니라 '숲의 생산성'이 복원되는 '기간'동안의 절제였다고나 할까요. 그리하여 숲이 다시금 '복원'되는 시점에서 그리스 로마시대의 재발견이 이루어지는 것은 매우 당연하겠죠? 이것이 '르네상스' 또는 종교개혁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지나치게 환경결정론적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원리'에 근거하여 지구의 자원을 엄청나게 낭비하는 현대문명에 대한 '경종'으로 의미있습니다. 

르네상스로부터 인간개체 바깥의 '신'이 다시 인간 개개인의 '마음'속으로 되돌아오게 되면서, 마침내 그것은 '과학혁명'으로 이어졌고 '신의 뜻'이 아닌 자연을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의 발견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그리고 땅속에서 발견된 지구 45억년의 '잉여생산 유기물'을 사용하는 방법의 '발명'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산업혁명'을 낳게 된 셈입니다. 그리고 '산업혁명'이후 인간은 '잉여 유기물'을 엄청 낭비하면서 지구의 생태계를 교란시키는 존재로 드러났습니다. 

이제 다음 단계는 '다음 번 숲'의 복원까지 다시금 인간 개체의 '자유'를 유보하면서 외부의 '신'으로 외화시키는 중세와 같은 시절일까요?

인간에게 '이성'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면, 어떻든 '자유'를 유보하지 않으면서 또 '외부의 신'으로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음번 '숲의 복원'까지 이행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보면 바로 그 '이성'이 작동해야 할 자리를 사람들은 '열광'으로 대체했고 그 '열광'은 '나' 이외의 것을 '적'으로 돌리면서 결국 어떤 식으로든지 다른 생명을 '말살'시키는 전쟁상황으로 나아갔습니다. 인간 이성이 있었다면 제1,2차 세계대전과 같은 일을 벌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 전후 60년에 바짝 다가서고 있습니다. 인간은 60년이면 한 세대가 사라지긴다고 하며 결국 전세대의 '경험'이 생생한 '기억'으로 작용하는 것은 60년이라 하죠. 

양차 세계대전의 경험은 인류역사상 그나마 '나은' 체제로서 사회민주주의를 성립시켰습니다. 보편교육과 보편의료는 인간 2000년 역사의 가장 훌륭한 업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허나 지금 중국에서 보듯. 그나마 괜잖은 것들을 모두 무너뜨리면서 오늘의 지구는 '자원탕진'의 한길로 들어선 것 처럼 보입니다. 여기에 인간의 발명품 중에서 아주 그럴듯한 '금융'이 한계에 이르면서 제2차대전 전의 10년과 같은 상황으로 전지구적 이행의 가능성이 높아져 있습니다.

그런데 어디에서 '이성'을 발견할 수 있을까요? 임마뉴엘 칸트의 책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그의 책에서, '부자'가 되는 꿈은 사실 화석연료를 과잉낭비하면서 '잉여생산물'을 축적할 수 있는 현 시대의 산물에 불과할 뿐임을 암시합니다. '유기체'는 자신의 존속과 유지를 목적으로 합니다. 부자가 되는 꿈 보다 '생존'과 '존속'이 더 중요하죠. 그리하여 '시장의 자유'는 결국 제한될 것이며 문제의 핵심은 그 제한이 다른 '자유'의 제한까지 이어질 것인가 아닌가에 있습니다. 인간에게 눈꼽 만큼의 '이성'이 남아 있기를 기대하는 것은 바로 이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며 결국은 아주 편리한 수단 - 전쟁을 통해 스스로를 파괴하는 - 의 사용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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