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촘스키와 푸코, 인간의 본성을 말하다
아브람 노엄 촘스키.미셸 푸코 지음, 이종인 옮김 / 시대의창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최근에 마이클 샐던의 '강의'가 교육방송에서 방영되면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강의를 제대로 듣지 않다가 엉뚱한 질문을 한 여학생에게 '자상이 지나치도록' 설명을 반복하는 모습에서 놀랐다. 

과연, '존 듀이'의 나라 다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글을 쓴 바 있듯, 나는, 대체 왜 이 시점에서 미국의 윤리학자가 제시한 '정의'가 화두로 떠오르는지 모른다. 

차라리 나는 '사실'이란 무엇인가부터 규명해야 하지 않나 싶다. 장하준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은 이런 점에서 의미있다. 그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에서 규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헌데, 왜 이 시점에서 장하준이 '갑자기'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는지 이것도 의아스럽다. 장하준이 유효했던 것은 지금부터 5-6년전인, 참여정부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그는 '우익' 개발독재론자처럼 보였다. 헌데 지금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에 대하여 '국가'를 방패로 사용하는 반신자유주의 전사처럼 보인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그래서, 오연호와 조국의 대담집에 대하여 글쓰는 것이 내키지 않은 것 만큼 이 책도 그러하다. 미셀 푸코에 대하여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기 때문이다. 촘스키도 '알고 있는 것' 같기도 아닌것 같기도 하다. 그의 '변형생성문법론'과 '미국 지성의 대표자'처럼 되었다는 것 때문에. 

한국으로 치면 오랫동안 '백락청' 이분이 누리는 지위 같은 것일까? 허나, 마이클 샐던과 비슷하게 이성과 정의를 내세우는 칸트주의처럼 보여서 좀 그러하다. '칸트주의'는 한국인에게 별로 낯설지 않기 때문에. 절에가서 열심히 염불수행 해 보면 안다. '칸트주의'가 뭔지 전혀 몰라도, '일체유심조'가 뭔지는 안다는 것. 그저 모든게 마음이 지어내는 것이라고. 칸트는 그것을 좀더 멋지게, 복잡하게 그리고 '난해한' 독일어로 풀었을 뿐이다. "사물을 인식하는 선험적 형식이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촘스키 이론으로 '번역'하면 이렇다. 

"언어를 사용하는 선험적 형식을 타고 난다"   

한국 속담을 좀 응용하면 이렇다. "모든 얘들이 제먹을 것 타고 나듯이, 제가 말할 것 타고 난다.(말 못할까봐 걱정하지 마세요!)" 

아니 이게 대체 뭔가? 이 순간, 미셀 푸코의 '광기'에 부닥친다. 나는 이것이 적절하다고 보는 편이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철저'하기 시작하면 못말리게 철저하다. 프랑스의 지식인들은, 언제나 '2등'인 신세속에 있는 나라 사람들의 특징을 반영한다고 할까? 아마도 1815년에 '빛나든 지성'이었던 라플라스가 '잠시동안 1등'을 했던 프랑스 황금시대 정점의 대표적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그때 이후, 프랑스는 언제나 '영국'의 '절친'으로서, 영국군 가는 곳에 함게 갔다. 북경에도 갔는데, 제2차 아편전쟁이라고 한다. 그 댓가로 베트남의 '영유권'을 '불하' 받았다. '불하' 받아서 오랫동안 베트남을 '경영'했는데, 그런 이유로, '베트남 전쟁'은 프랑스와 관련된다.  

'광기'라는 푸코의 개념은 '감옥'과도 관련되지만, 그야말로 열광적인 프랑스인의 특징과도 관련되는 것 같다. 우리는 가미가제가 일본인들이 원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원조는 미드웨이 섬 주둔 공군의 핸더슨 소령이었다. 이 소령의 비행대가, 일본군 함대에 그냥 달려든 바 있었다. 그러니까, 광기는 결국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어느 시기'에 나타나는 양상인 셈이다. 특히 전쟁시기에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다. '좋은 민족' 혹은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은 애초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마이클 샐던만큼이나, 촘스키가 내내 주장하는 '이성'을 도무지 납득하지 못한다. '이성' 즉 '리즌'을 샐던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촘스키하고 똑같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을 그토록 비판했다. 같은 전쟁을 보고 푸코는 '광기'를 떠올렸다. 1971년 대담했으니, 베트남 전쟁이 '새로' 시작된지 무려 20년 가까이 된 시점이었다. 사실, 프랑스의 식민지 영유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베트남 전쟁은 거의 100년이나 지속된 것이다.  

일본군이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을 '점령'하자 갑자기, 식민지 경영의 주인이 바뀌었다. 베트남인들은 또 저항했다. 1945년 전쟁이 갑자기 종료하자, 이번에는 서에서 영국군, 북에서 중국군이 들어왔다. 이 두 군데는 곧 나갔지만, 아니, 1954년, 프랑스군이 다시 되돌아온 것이다.   

베트남인들은 디인 비엔 푸에서 프랑스 공정대를 물리쳤다. 그야말로 결사항전이면서 총력전이었다. '독립'을 하나 싶었더니, 이번에는 미군이 들어온거다! 이런! 대체 무슨 운명이기에 당대 '제국주의'라고 칭해지는 나라의 군대들이 '러시아' 빼고 다 들어오는거야? 

그 미군들이, 프랑스군을 인계하여, 베트남의 남쪽을 장악하면서 다시금 기나긴 전쟁이 지속된 것이다. 무려 20년간 지속된 이 전쟁은 고엽제 같은 인류 최악의 발명품이 사용될 정도로 인류의 극단을 보여준 전쟁이었다. 이런 이유로, 미셀 푸코는 '광기'를 말한 것이다. 물론 그 '광기'는, 베트남에서 비록 철수 했지만, 프랑스인에게서도, 1950년대까지 가령 지중해 건너편 알제리 같은데서 나타났지만.  

나는 그래서 서양에서 유래한, 칸트가 그토록 강조한 '이성'이란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게 있는가? 미셀 푸코가 아니더라도, 붓다께서 간결히 정리하셨다. '탐 진 치' 삼독이라고 말이다. '삼독'은 실체이면서 인간의 본성이기도 하다. '탐 진 치' 말고 '이성'이란 있는가? 아마도 정신 바짝 차려서 '마음챙김과 알아차림'이 선명하여, '속지' 않게 되면 그 마음상태를 '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차 하는 순간 '속아' 넘어가는게 인간의 마음이다. 그래서, 맹자가 아니라 순자이듯, 촘스키가 아니라 푸코이다.  

이 글은 여기서 종결된다. 한국인들은 이제 다시금, 사마천의 사기나 한서의 반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읽어야할 시점에 도래했다. 이성보다 광기가 더 인간을 파악하는데 맞어 떨어진다고 여긴다면, 그 광기를 역사적으로 어떻게 진정시켜왔는지 사례를 연구해야 한다. 하다못해 십팔사략을 읽는게 이런 대담집을 읽는 것 보다 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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