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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의 도전 - 위기의 한국경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 김광수경제연구소 경제시평 01
김광수경제연구소 엮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8년 3월
평점 :
한국경제에 대한 통찰과 경제학자의 임무 - 위기에 정직하게 직면하기
김광수 경제연구소 지음 "한국경제의 도전"
1997년 1월은 이른바 외환위기 약 10개월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점점 줄어드는 외환 보유고를 보면서 한국경제에 어떤 위기가 닥치고 있다고 생각한 경제학자들이 몇 있었다. 이미 1996년 수출은 '격감'했고 이 때문에 외환보유고 또한 크게 감소하고 있었다. 게다가 김영삼 정부의 섣부른 '세계화'는 사실상 외환과 금융에 대한 급진적 규제철폐로 나갔고 '감독기구' 같은 것도 없이 '종금사'와 같은 금융업체 설립히 허가되었다. 이 '종금사'가 이른 바 '만기 불일치' 방식의 금융업 돈벌이를 처음 선보였다. 금리가 싼 엔화계열의 단기대출을 얻어다 금리가 비싼 동남아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것이었다. 이런 일들이 '세계화'라는 명목으로 진행되었다.
1995년은 이른 바 역플라자 합의로 '일본'에 가해졌던 '엔화절상' 형극의 고통이 조금 완화되던 시점이었다. 이 역플라자 합의는 일본의 '수출 대체국'으로 떠올랐던 한국과 동남아시아 나라들에게는 타격이었다. 엔화의 가치가 다시금 '하락'(환율상승)하면서 원화 포함 동남아 통화의 가치는 '상승'(환율하락)해 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1997년 1월쯤 원화의 '달러환율'은 기적적으로 700원 정도 하였다. 이러다 보니 '유행'을 타기 시작한 것이 '해외여행' 바람이었다. 1997년 여름까지 엄청난 '해외여행' 붐이 생겼다. 외환은 점점 줄어갔다.
문제는 1달러 700원 환율이 과대평가된 환율이라는 사실이었다. 1996년 격감한 무역흑자 때문에 외환에 문제의 조짐이 생겼다. 1997년 종합금융사의 '만기 불일치' 해외차입 투자가 늘면서 이런 문제의 '조짐'들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당대의 김영삼 정부가 '몰랐다'는 것에 더하여, 언론의 '비호'를 받았던 만큼, '경제문제'에 대하여도 그러했다는 사실이다. 막강한 의제설정 기능을 갖고 있었던 한국의 언론은 당시 '간간히' 흘러나왔던 한국경제 '위기직면설'에 대하여 한마디로 일축했다. 당대에는 박찬종 같은 사람조차 '외환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를 했었다지만 전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한국언론이 한마디로 '부정'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런 과정속에서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아는 사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경제'와 '금융'을 연계시켜 보는 '관점'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오늘 '김광수 경제연구소'를 꾸리는 김광수 소장도 이런 사람들중 '탁월한' 하나였다. 이 분은 '이미' 당시에 외환위기를 예견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까닭은 이 분이 '수학'하던 시점이 일본의 '황금빛 재테크 시기'였던 때였기 때문으로 보인다. 1985년을 정점으로 일본의 1980년대는 글자 그대로 '황금시기'였다. 물론 '동경 물가 세계 1위'와 같은 '부작용'도 없지는 않았다. 허나 미국에 대한 수출은 끝없이 증가하고 달러화 흑자는 끝없이 쌓여 가는 것처럼 보였던 시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 일본은 적어도 '경제'에서 만큼은 이제 '미국을 추월할 수 있다'는 자심감의 팽배속에서 다시금 세계의 '열강'중 하나 또는 최소한 아시아의 패권국으로 재부상한다는 분위기속에 있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속에서 김광수 소장은 경제학 공부를 했고 일본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당대의 일본은 넘쳐나는 달러화 흑자를 어찌하지 못한 채, 역시 국내의 '유동성' 또한 막대하게 증대되었다. 수출로 벌어들인 달러화를 쓰는 방법은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미국에 다시 투자하거나 아니면 '엔화'로 바꿔서 사용한다. 전자를 일본인들은 미국 국채를 사들이는 것으로 해결했다. 후자의 결과로서 1980년대 일본의 유동성은 크게 늘었다. 바로 이런 분위기가 '자이테크'를 조장하는 '금융'의 만개시대로 나아갔다. 돌이켜 보면, '튜립투기' 직전의 네덜란드가 그러했고, '대공황' 직전의 미국도 그러했다고 한다. 막대한 무역흑자로 국내 유동성이 엄청나게 증대되었고 사람들은 '부자'가 되었다는 만족감에 젖어 있거나 나도 부자가 되겠다는 '황금빛 꿈'에 젖어들었다. 이런 것들은 예외없이 '금융거품'을 형성했던 셈이다.
그리하여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1980년대를 관통하면서 일본에서 고스란히 '재현'되었다. 물론 1920년대 미국의 '사태'들은 주로 국내적 요인에 의해서 증폭되었지만 1980년대 일본에서는 국내외적 요인이 합쳐져서 발생했다. 이 한복판에서 공부를 한 김광수 소장은 따라서 '금융'이 어떻게 경제에 영향을 미치고 바꿔가는지를 '통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 벌어지는 '금융화'가 어떤식으로 전개되고 한국경제를 바꿔 나갈 것인가를 사실상 '초기'부터 통찰해온 경제학자로는 그가 거의 유일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김광수 경제연구소의 '통찰'에 힘입어 이른 바 '금융'이란 것의 실상을 알 수 있었는데 나도 그 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분의 통찰에 힘입어 한국경제에도 금융거품이 끼어들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금융거품의 초기조건중 하나는 막대한 무역흑자의 누적이다. 외환위기 이후 한국에서도 짧은 기간 동안 이런 일이 벌어졌다. 엄청난 환율의 '절하'(환율하락) 덕분에 2003년까지 수출이 급속하게 늘었고 다시금 흑자가 쌓였다. 현대자동차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것은 원 달러 환율이 무려 2000원까지 치솟은 덕분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외환위기 시점에서 우량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고 수출중심 대기업들만 크게 혜택을 입으면서 이른 바 '고용없는 성장'이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여기 금융에 대한 급진적 개방까지 겹쳐서 대략 2004년까지 한국에는 막대한 무역흑자와 더불어 '금융시장 투자목적의 외화 반입'이 있었다. 이런 것들은 당연히 원화 유동성의 엄청난 증대를 불렀고 금융거품 형성의 '초기조건'이 되기에 너무도 충분했다. 여기에 기름을 끼얹은 계기가 2004년 1년동안 지속된 한국역사상 가장 낮은 3.25%의 초저금리였다. 당시 재벌경제연구소에서조차 금리을 올려야 한다고 했지만 김진표와 교감한 당시 한국은행장은 금리를 오히려 내렸다. 이유는 오직 하나였는데 '금융허브'의 조건을 위해서 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연히 2003년의 10.29대책을 완전히 무력화하면서 다시금 금융주택거품이 부풀어 올랐던 것이다. 사실 돌이켜 보면 '일본'이 갔던 바로 그 길을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다. 이 때문에 거품의 한복판에서 바로 그것을 연구하고 돌아온 김광수 이분이 탁월한 통찰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김광수 이분의 남다른 점이 또 있다. '통찰'에 윤리성이 곁들여 있다는 사실이다. '윤리성'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바로, 박현주와 같은 사람과 대비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두 사람은 연령이 비슷하다. 허나 걷는 길은 전혀 다르다. 하지만 공통점이 많다. 바로, 한국경제의 '금융화'에 대하여 '예지'와 '통찰'과 '선견'이 있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하여 이 비슷한 통찰을 갖춘 두 사람은 모두 '한 사람'과 인연을 갖고 있기도 한데, 바로, 이헌재라는 사람이다. 이헌재 이 분 또한 김대중 정부하에서 '구조조정'을 진두지휘한 사람이다. 일본과 한국을 비교할때 흔히 '초기'의 구조조정을 얼마나 빠르게 했는가를 대조하는데, 과감하게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부실기업을 정리하는 '구조조정'을 밀어 붙인 사람이 진념과 이헌재였기에 그렇다.
박현주와 김광수는 무엇이 다를까? 전자는 '돈'의 흐름을 꿰뚫고 이제 한국을 쥐락펴락하는 증권회사를 설립한, 말하자면, 21세기의 '이건희' 비슷한 사람이다. '금융화'에 대한 통찰과 선견, 게다가 '금융화'를 잘 아는 '인맥'의 도움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을 해 냈고 하고 있다. 후자는? 본인 스스로 '경제연구소'가 아니라, '증권연구소' 같은 것을 하면서 돈을 벌 '기회'를 만드는 쪽으로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안했다. 간단히, 이 분은 '컨설팅'과 '프로젝트'의 수행에 몰두했고, 나아가 그런 것들을 '국민경제의 순항'라는 큰 원칙속에서 수행했다. 바로 이점에서 나는 이 분이 '윤리'에 입각한 경제학자로서의 임무를 수행했다고 보는 것이다.
김광수 이분이 가장 먼저 '수행한' 임무는 한국경제의 '거품'을 예보하는 것이었다. 이미 2003년에 그는 '부동산 거품'을 예보했다. 당시 40% 가량 거품이 끼워져 있고 이것을 빼내서 가계소득분을 '이자'로 돌려줘야 경기를 살릴 있다고 했다. 이 흔치 않은 통찰은 사실 당시에 이헌재 같은 분의 '지지'를 받는 정도였지만 그의 이 '예보'는 실현되지 못했다.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참여정부는 김광수 같은 '예보가'의 통찰을 제대로 받아 안아서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하는 '역량'이 없었다. 오히려 다른 '역량'만 갖췄는데 아마 가장 이름을 떨칠만한 분으로 당대의 '관료' 김진표 이분이었을 것이다.
사실 한국의 '금융거품'에 대한 예보는 여러군데서 '이미' 나오고 있었다. 엘지경제연구소도 이 중하나였다. 여기서는 이미 2001년 요컨대 지금 돌이켜 보면 금융거품 형성의 '초기' 국면으로서 '아이씨티 버블'이 꺼져가던 그 무렵이었다. 부동산에 거품이 끼기 시작했다는 예보가 이곳에서 나왔다. 그리하여 2001년과 2002년의 아파트 폭등은 선거에도 반영되었다. 바로, '분양원가 공개'라는 공약형태로 노무현 후보의 공약에 집약된 것이다. 문제는 이행이었다. 바로, 노무현 정부의 출범 첫해였던 2003년, '기선을 제압'해야 마땅했던 시기였다. 그런데 당대의 '경제부총리'로 취임한 김진표 바로 이사람이 '그 모든 초기조건'을 다 '금융거품'을 조장하는 방향으로 밀어 붙여버렸다. 이 '놀라운' 사태속에서 대통령은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간단히 국면을 정리해 버렸고 나아가 2004년경에는 '10배 남는 장사도 장사다'라고 하여 아예 '폭리실현' 자체를 정당화해 버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는 '부동산'에 대한 '대응'을 지속적으로 해 왔는데 5년에 걸쳐서 무려 30여차례 이상이었다. 허나 전혀 효과를 내지 못했다. 이렇게 된데는 참여정부의 청와대와 관련 경제부처들이 다 따로따로 제갈길을 갔던데도 원인이 있지만 가장 큰 것은 '관료'들 스스로 '자이테크 거품'의 길로 줄달음질했다는데 있었다. 그리고 그런 '줄달음'을 합리화하는 것이 '금융허브'였다. 만일 김광수 소장이 제언한대로 정책이 실행되었다면 박현주의 '성공' 또한 좀 작아졌을 테지만 그만큼 '위험'은 작아졌을지도 모른다.
김광수경제연구소의 이 책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 한국경제의 '금융거품'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이라 할 수 있다. 이 '통찰'은 정말 각 국면보다 거의 빛나는 예견을 가능하게 했다. 이를테면 2006년 연구소는 이미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예견했다. 나아가 미국 금융의 현재 상태와 서브프라임 사태의 파장까지 정교한 분석이 가능하게 했다. 이런 '통찰'은 이 책 전체를 일관하고 있다. 만일 주식투자가라면 이 책을 읽는 것으로 상당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거시경제적' 안목에서 세계경제를 보는 눈을 열어주면서도, 세부적 쟁점에 대한 '통찰'까지 제공해 주고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예견'하는 안목까지 열어준다는 사실이다. 사실 점점 더 '윤곽'이 드러나고 있는 것이지만, 가령 이헌재와 인연이 닿은 역시 '예견'과 '통찰'의 천재 박현주와 김광수가 어떻게 '판단'을 달리하기 시작했는지까지 잘 드러난다. 사실 이 두사람이 '합쳐진' 것이 아마도 한국의 '금융'을 한국의 '경제'와 연관지어 가장 바람직한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데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허나 이제 '승부'는 분명해 지고 있는 듯 한데 말하자면 경제의 '펀더맨틀'이 뭔지가 점점 드러나는 시점으로 이행하고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주식이나 부동산과 같은 '자산가격'은 기본적으로 경제의 '펀더맨틀'이 경제적 재생산의 원활을 보장할때 가능하다는 테제 말이다. 사실 박현주 이분은 '베어족'으로 어느 시점에서 '전환'했어야 했는데 그 시점을 놓쳐 버렸다.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에서 떠오르는 금융회사가 있으니 그 이름이 제이피 모건이라고 한다. 베어스턴스를 인수하여 이제 세계 1위로 등극했다는데 골드만 삭스 같은데서 '모기지 채권' 영업을 지속하는 동안 제이피 모건은 그 '위험도'를 평가한 후 아주 조금씩 모기지 채권을 매도해버렸다. 사태가 확산될 즈음 제이피 모건에는 모기지 채권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되는데는 가령 '박현주' 같은 애널을 '김광수' 같은 애널로 바꾼 제이피 모건 경영진의 탁월한 선택도 있다 한다. 사실 뒤늦었지만 모건 스탠리 같은 데도 '베어족' 애널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한다. 그 유명한 '스티븐 로치'는 아시아지역 총괄 사장이 되었다고 하지 않는가. '영원한 상승'이 없듯 '영원한 하강'도 없지만 상승과 하강에서 어떤 포지션을 택하는가에 따라 금융에서 삶과 죽음이 결정된다.
"한국경제의 도전"은 한국경제가 하강을 앞두고 있다는 '경보'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해야 국민경제적 '피해'를 최소로 줄이는가에 대한 '지침서'이다. 이 책의 제안은 사실 단순하다. 근면, 저축, 빚갚기, 낭비 줄이기, 아끼고 절약하기. 가계와 개인은 이 방향으로 나아가고 정부의 거시경제 정책도 이리 가야 한다. 물론 단순 '저축'만을 말하고 있지는 않다. 가장 먼저 이 책의 제안은 금융거품을 조금씩 빼자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2003년에 이 연구소의 제안대로 했다면 지금쯤 한국경제는 세계적 '위기'를 비교적 담담히 직면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허나 그렇게 안했기 때문에 이제 금융거품은 '저절로' 꺼질 지경으로 부풀었다. 그리하여 이것을 빼고 가계와 개인의 '소비'를 진작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 책은 제안한다. 문제는 지금의 정부정책이 거꾸로 간다는데 있다. 이렇게 하려면 다른 조건들의 맞물림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금리인하'와 더불어 '금융거품'을 빼면서 동시에 거품형성에 맞닿는 정책들을 제한하는 것인데 노무현 정부의 말기에 이르러 겨우 손댔던 '주택담보대출 제한'과 같은 제도를 말한다. 말하자면 '금리인하'가 실제 경기진작으로 이어지려면 단지 '생산자'인 기업에 대한 금융부담을 덜어 주는 정도로 미흡하며 금융거품 제거와 가계와 개인의 부채이자 경감 등이 아울러 진행되면서 더 큰 금융거품의 발생원인은 차단해 가야 한다는 것인데, 지금 정부는 오히려 반대로 나아간다. '금융거품'을 부추기는 정책수단만 '골라서' 한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가? 예를 들어 금리인하와 더불어 LTV나 DTV를 풀어헤치는 이런 방향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이제 2-3년정도면 한국경제가 더 큰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예언'이 틀리면 명성에 흠이 생기므로 경제학자들은 잘 예언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부담'을 피하기 위해 '교육'과 같은 부업을 하는 것인가? 경제학자들이 요즘 교육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면 그러하다. 이 책은 그런 '부담'을 감수하면서 예언을 하는데, 그 예언에 값하는 '논거'들이 상세하게 제시되고 있어 저자의 생각에 동의 하건 안하건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