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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자본 발전사전 - 자본주의의 세계화 흐름을 뒤집는 19가지 개념
볼프강 작스 외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카이브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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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어려운 일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원적지 '케냐'는 19세기 말 부터 '벌써' 유럽인들이 애호하는 지역이었다. 야생동물 때문이었다. 이런 흐름은 지금도 지속된다. 특히 미국 대통령의 원적지가 되면서 이제 '인류의 발생' 지역으로 재발견되고 있다. 헌데 1인당 지디피는 여전히 2천달러대에 머물러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왜 한국을 상찬하는가? 1960년 케냐는 1천달러, 한국은 3백달러였는데 지금 케냐는 2천달러, 한국은 2만달러이니 칭찬 안할 수 있는가?  

'빈곤'의 문제는 과연 나라도 해결하지 못하는가? 

정말 어려운 문제이다. 사람들은 '나라'를 평소에는 무척 싫어 하는 것 같으며 특히나 간섭을 무지 싫어한다. 헌데 무슨 '일만' 생기면 다 '나라'를 찾으니 어찌된 일인가 말이다. 대표적으로 주식시장이다. 폭등 할때는 아무도 나라 따위는 관심도 안갖다가 폭락하면서 자살자가 생기고 이러면 '나라 뭐해'라고 한마디씩 한다. 

좀더 편하게 '국가'라고 해 보자. 또는 더 편하게 '정부'라고 해 보자. 한때 유행했던 개콘의 코너중 운동권 학생이 있었다. 팔뚝질을 해댄 끝에 내리는 결론은 '정부는 000 하라'라는 것이다! 결국 폭락장의 주식시장과 운동권은 동일하게 '정부는 00 하라'라고 요구하게 되는가? 

다음 문제는 이거다. 빈곤의 문제는 정말 국가도 해결하지 못하는가? 인류가 만일 '무정부'로 살 수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다. 헌데 불가능하다. 이유가 뭘까? '잉여' 때문 아닐까 한다. 그날 벌어 그날 먹는다면, 그해 생산한 것으로 그해 먹고 만다면 요컨대 '달랑거리듯' 산다면 그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생산력이 너무 커서 문제 아닐까.  

나는 그래서 '빈곤' 문제의 해결은 매우 쉽다고 여기는 편이다. 중국에서는 이미 '수나라' 때 100만 대군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침공'하는 역사가 있지 않았는가. 그정도로 농업 생산력이 뛰어났다는 것인데, 100만명이 '군대'에 동원되지 앟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군량'을 백성들이 나눠 먹을 수 있으면 '빈곤'은 퇴치 가능하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지구에서 별 의미있는 행위자가 아니라서  

그래서 또 문제다, 왜 생태주의적 발상은 꼭 '최정점'의 발전을 이룩한 사회에서 나오는가 이런 문제이다. 쉽게 말해서, 너무도 잘 먹고 잘 사는 듯 보이는 선진국에서 나오는 배부른 발상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영국에서는 1800년대 말엽에 존 스튜어트밀에 의해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이 제시되었다. 그는 '고원에서의 정상적 상태 지속유지'라는 개념을 사용했다던데 오늘날의 '지속가능발전' 개념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사유였다. 

이 발상은 다시금 반복되어, 아마도 1970년대 초반의 '로마 클럽 보고서'가 원천일 것이다. 이로부터 1972년의 '유엔인간환경회의'가 촉발되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서, 이미 논점은 해결되지 않았다. '산업화'로 나아가고 싶은 개도국은 '오염' 문제에 별 관심이 없었다. 선진 산업화가 되어 있는 스웨덴은 영국의 석탄연소 오염물질이 문제였지만 말이다. 

이후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은 지속적으로 확대 재생산중이다. 이 '반자본발전' 사전은 이렇듯, 생태주의나 지속가능발전의 이념에 바탕한 '사유'를 몽땅 집대성했다.  

문제는 이 책에서 '거론'되는 사유의 바탕에 여전히 '나라'가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어쩌고 저쩌고 담론이 많다. 발본적 사유를 자랑하는 독일인들도 마찬가지처럼 여겨진다. 독일인들이야말로, 전국시대의 제나라 관중처럼, '나라'를 이용하여 '빈곤'을 퇴치한 대표적 사례를 남긴 사람들인데, 지속가능발전과 생태주의 사유에서도 그야말로 발본적으로 '바닥까지' 생각해 본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국가'가 이제는 월드컵 '국가대표'를 파견하는 어떤 지구의 지역 정치단위처럼 되었다는데 있다.  

과연 새로운 산업국가의 탄생이 가능하기나 할까?   

그래서 다음 문제는 새로운 산업국가의 탄생이다. 아니 그냥 '지속가능발전이 확립된' 사회의 생성이라고 해보자. 바로 이런 것이 문제이다.  

문제를 '나열'하기는 정말 쉽고 비판을 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데, 새로운 길과 전망을 여는 것은 더욱 어렵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는 발전된 선진 산업지역과 '원료 혹은 농산물' 공급 지역으로 나눠서 성립해 있다. 농산물과 광물 공급지역은 여전히 빈곤의 문제를 안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아무리 농업지역이라고 해도 그 생산력은 100년전에 비교하여 거의 100배 수준이다. 오늘날에는 유전자 조작 기술까지 가세하여 농업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올려 놓았다. 사실 농업만으로도 인류는 살만한 조건을 갖출 수 있다.  

무엇이 문제인가? 지속가능발전이나 생태주의 사유의 문제는 여기에 내재된다. 나는 그것을 단순히 정리한다. '비관주의'이다. 여기에는 별로 전망이 없다. '생태주의' 사유는 게다가 과거를 늘 낭만주의적으로 왜곡하는 경향마저 보인다. 그리운 고향마을의 정자나무 깊은 그늘이 있던 풍경 이런 것이다.  

헌데 춘궁기에 곡식이 떨어져서, 산과 들로 먹을 것을 찾아 헤매던 바로 그 마을이기도 했다. 인간의 관심과 시선은 어찌 이리 다른가.  

'지속가능한 사회'를 이룩하기 위한 인류의 전망은 무엇인가? 

이것은 물음으로 남겨둔다. 아무리 생태주의 운돋가의 선의를 인정한다고 해도 결과는 전혀 엉뚱해서 그러하다. 헬레나 호지는 그가 소개한 생태주의 히말라야 산록을 결국 관광지로 바꿔치기하고 말았던 것이다. 나는 그래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의 '가차없이' 냉정한 사유가 적절하다고 본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이다. '당위'로 채색하지 말라는 것인데 생태주의는 거의 '당위'로 채색하여 과거를 미화하는 사유에 이른다.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사유와 뭐가 다를 것인가. 이런 소박한 무정부주의적 사유가 그 귀결인가. 하지만 이 순간에도 인류는 수백만의 '젊은 청년'을 군인으로 보내고도 먹고 사는데 지장이 없는 경제를 유지하고 있지 앟은가. 소박함음 미덕일 수 있지만 어떤 조건에서 무지로 바뀌며 결국 '비열'에게 당하고 만다는 교훈을 새겨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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