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와 역사 - 기후.역사.현대 세계
H.H. 램 지음, 김종규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기후변화에 관한 역사적 사례를 살펴볼 수록 흥미로운 점이 많이 발견된다. 기후가 인간의 삶 전반을 '결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라 할 수 있으며 여러가지 다른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틀림 없다. 허나 분명한 사실은 '기후변화'가 삶의 근간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잘 따져보면 그러하다. 빈부나 부귀 그리고 빈천의 차이 따위는 '사회적으로' 조형된 것이다. 이에 따라서 사람마다 누리는 삶의 질이 다른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기후변화'와 같은 것들은 부귀빈천의 차이를 가볍게 넘어서서 모든 인류의 삶에 '평등하게' 영향을 미치는 현상이다. 이런 이유로 '기후변화'가 많은 변화를 불러왔고 지금도 그렇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먼저 역사적으로 드러난 사례들을 살펴본다면, 인간의 역사가 전개된 약 1만여년의 기간 동안에, 주로 '한랭화' 시기가 문제가 되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특히 그린란드의 '붕괴' 사례는 가장 결정적이었다. 이 점은 제레드 다이아몬드 저작 '문명의 붕괴'에 생생히 묘사된 바 있다. 그의 책에서 고고학은 분명 또 하나의 '과학' 지위를 획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쓰레기'가 그토록 풍부한 정보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가령 영국의 '램'이라는 사람이 저작한 '기후와 역사'라는 책에서도 이런 '음식물 쓰레기' 연구 사례가 나타난다. 점점 어족의 종류가 줄어들면서 생선뼈가 발견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는 사실과 같은 것이다. '한랭화'가 이러했다. 더불어, 예전에 얼음이라고는 눈을 씻고 보아도 찾을 수 없었던 바다가 얼음으로 덮힌다는 사실 같은 것이 기록으로 남게 된다. 영국의 동쪽과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으로 펼쳐져 있는 '북해'가 바로 그런 바다였다. 영국의 북단에는 여러 작은 섬들이 있는데 바로 이 섬들에서 이런 변화를 즉각적으로 볼 수 있었다. 한랭화란 이 섬들 북쪽 바다에 커다란 얼음덩어리가 떠내려 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점점 증대되면서 날씨가 전반적으로 추워진다. 바로 이런 '한랭화'가 중세의 유럽에서 일어났고, 1300년쯤의 시기였다. 북해가 얼음으로 뒤덮혀서 노르웨이의 배들이 그린란드로 물품 보급을 할 수 없었다. 약 백여년간 뱃길이 끊어졌고 엄청나게 추워진탓에 경작지 면적의 감소와 목초의 생산량 감소가 겹쳐서 그린랜드 거주지는 견딜 수 없었고 결국 북쪽에서 침입한 '이누이트'들의 습격으로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한랭화' 사례는 사실 내 어린 시절의 서해바다에서도 발견된다. 강화도 북쪽은 3개의 강이 합류하는 바다이다. 지금은 겨울이 와도 이 지역에 '얼음'이라고 할 만한 덩어리들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한강이 결빙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다. 허나 내 어린 시절, 이 곳은 겨울이면 얼음덩어리들이 내려오는 해역이었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에서 얼어붙은 민물 얼음덩어리들이 내려와서 이 해역을 뒤덮는다. 기온이 내려갈수록 얼음의 양과 두께는 늘어나고 작은 목선 정도는 전혀 다닐 수 없는 해역이 되고 만다. 물론 '철갑선'이라 하더라도 얼음이 심각하게 많이 뒤덮히는 경우에는 항행이 금지되었다. 바로 이 시기의 '해난' 사고 중 빈번했던 것이 '얼음'과 충돌하여 여객선이 침몰하는 사고였다. 당시 이 해역을 운항했던 '갑제호'라는 이름의 여객선이 그러한 사례였다. 인천항에서 출발하여 5-6시간의 항해를 하면서 서해의 작은 섬들에 여객들을 내려 놓고 실어 날랐다. 이 여객선이 겨울의 '얼음' 에 충돌하여 침몰했다. 당시 선장은 자신의 가족을 그 배에 태우고 있었음에도 자리를 이탈하지 않고 승객을 한 사람이라도 더 구해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미담'을 남긴 바 있었다. 물론 그의 가족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런 정도로 1970년대까지만 해도 겨울은 정말로 추웠다. 한강은 여전히 꽁꽁 얼어 붙었다. 하지만 1950년대만은 못했던 듯 하다. 아직도 1970년대 한강에서 얼음 지치던 추억을 가진 어른들이 많이 있다. 허나 1950년대에는 얼음 지치는 정도를 넘어서서, 한강 자체가 꽁꽁 얼어 붙었다. 얼음의 두께가 아주 두꺼워서, 얼음장이 부서져서 물에 빠져 죽는 일 같은 것은 없었다. 1960년대의 '반공도덕' 교과서에는 6.25 전쟁에 관한 글들이 많았는데, 특히 인상적이었던 글이 '한강의 얼음' 위를 걸어서 남쪽으로 피난한다는 이런 내용이었다. 물론 6.25 사변의 개전 시점이 아니라, 중공군이 남하했던 1.4후퇴 무렵의 일어었다. 그러니까 1951년 1월 4일에는 한강의 얼음이 굉장히 두텁게 얼어 있었다는 기록이 되는 것이다.

 

지금은 지구 온난화로 이런 사실들이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다. 정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한강에서 스케이트 탄다는 말이 '옛말'이 된 것처럼, 시청앞 광징이 스케이트장으로 조성된다. 오늘 어린이들의 기억속에서 '시청앞 광장' 스케이트장이 기억될 따름이지 한강이 결빙됬는지 어떤지는 관심사항도 아니다. 한강은 언제나 '흐르는' 물로 기억될 것이다. 이 뿐 아니라 두터운 '솜옷'은 오래전에 사라졌고 이것을 대체했던 오리털 잠바도 점점 얇아지고 가벼워졌다. 이제 두터운 잠바 보기 어려운 시점이 되었다. 겨울 옷도 밝은 색깔로 대체되면서 여름옷의 얇은 겉옷을 털과 같은 것드로 보강한 이런 수준으로 변화했다. 변화가 큰 것이다. 2월 중순이면 한강 갈대밭에는 하루살이들이 출몰할 정도이다. 모기들은 겨울동안 지하 보일러실에서 살아 남아서, 1월 하순경이면 벌써 조금씩 활동을 시작한다. 세상이 이렇게 달라져 있다. 그럼 다음 문제는 지구가 어떻게 될 것인가인데 그 대답이 '기후변화'라는 것이다.

 

지구온난화에 대한 '역사적 기록'들은 많이 남아 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실상 한랭화이지 온난화가 아님을 역사적 기록에서 찾을 수 있다. 아니, 온난화이건 한랭화이건 사실상 인간의 문명에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과학기술이 아무튼 양방 모두 극복의 방향으로 진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 문제는 '한랭화'이지 온난화가 아니다. 온난화에서 궂이 문제를 찾는다면 인간의 활동이 지나치게 왕성해져서 전쟁과 같은 사태들이 빈번해질 수 있다는 정도이다. 이것도 문제라면 문제가 된다. 가령 중세의 유럽은 극히 좋았던 한 시절의 절정을 보냈다. 앞에서 언급한 '램'의 저작에서는 이렇게 언급하고 있을 정도이다.

 

"유럽에서 확인할 수 있는 최고 온난기는 클라크가 최초의 유럽 문명의 대부활이라고 부른 시기인 중세의 뛰어난 성당 건축 시기와 일치한다. 특히 논쟁이 되고 있는 십자군 활동이라는 유럽인들의 지속된 에너지 분출도 기후가 유리한 시기와 일치하고 있다."

 

이 저자는 '트레버로퍼'라는 역사학자의 저작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의 저서에서도 중세의 온난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유럽의 중세 절정기는.... 이 시점까지 우리는 - 약 1050년부터 그 이후로- 진보만을.... 인구성장, 농업혁명, 기술발달을 보아왔다. 경계는 모든 방향으로 확대되었다. "

 

중세의 온난화 시기를 '유럽의 중세 절정기'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점은 오늘날 '지구 온난화' 관련한 논쟁속에서 많은 점을 시사한다. 램과 트레버로퍼의 역사에 대한 해석과 평가에 따른다면 중세는 유럽문명의 황금기이면서 '확장기'라고 할 수 있다. '중세 암흑기'라고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해석과는 좀 다른 해석이다. 물론 단순히 기후조건만 갖고 중세 황금기라는 해석을 했을 수도 있으니 보다 복합적인 고려가 필요할 것이다. 허나 르네상스 시기가 중세 유럽 '온난화'의 절정기였다는 사실 정도는 떠올릴 수 있겠다. 그리고 특히 주목할 만한 해석은 '십자군 전쟁'이 중세 온난기에 걸쳐서 전개되었고, '온난기'가 종식되고 '한랭화'가 진행될 무렵에 즈음하여 중단되었다는 해석일 것이다.

 

중세의 '온난기'에 대한 기후학적 설명은 약 600년경부터 약 1400년에 이르는 800년 정도에 대한 해석이다. 이 시기에 기온은 지속적으로 상승하여 유럽의 기후는 특히 온난해졌다. 램의 저작에서는 여러가지 얘기를 하지만 그중 가령 영국에서 '포도'를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런 것이 있다. 더불어 밀의 재배지역이 북상하며 경작지의 고도가 점점 상승한다는 이런 역사적 '사실'들이 확인되었다. 물론 영국 북부 스코틀랜드 지역에서의 빈번한 폭풍의 도래와 해수면 상승에 의한 피해도 아울러 보고 하고 있다. 역사는 이 시기에, 스코틀랜드 해안 지역에서, 마치 오늘날 인도양의 남아시아가 직면한 '쓰나미'처럼, 엄청난 폭풍우를 겪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떼죽음 당했음을 보고하고 있다. 역사란 이런 것이다!

 

그리하여 이제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한 해석논쟁으로 되돌아올 시점이다. 지구온난화는 요컨대 양날의 칼과도 같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로, 인간의 문명에 대한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 유엔기후패널 예측처럼 기온이 급상승해 간다면 온갖 문제들이 발생할 것임이 틀림없다. 하지만 중기적으로는 기온상승의 결과로서 인간의 활동력은 더욱 증대될 수 밖에 없다.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연구는 이 측면이 더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십자군 전쟁의 문제만은 아니다. 몽고인들이 바로 이 '온난화' 시기에 생산성 향상에 힘입어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힘은 점점 '외부'를 향해서 흘러 나오게 되는데 결정적 계기는 한랭화였다. 자신들의 거주지역이 온난한 시점에서는 웬만한 정도로 인구가 증가해도 지역의 넒이가 감당할 수 있는 시점까지는 궂이 외연적 팽창이 필요하지 않았지만 좋은 기후조건의 도래 결과 인구의 급속한 증가는 이제 감당하기 어려운 환경적 한계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결정적 계기는 중세말의 한랭화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몽고족이 남하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고 역사적 해석중 하나는, 몽고제국의 '건설' 원인이 중세의 온난화와 '한랭화' 모두라는 것이다. 온난화로 번성했고 한랭화로 어려워지니 남하하여 중국을 점령하고 유럽지역까지 진출하며 오늘날 서남아시아지역까지 판도를 확장하여 '칸 제국' 즉 '한국'을 곳곳에 건설하게 되었다는 해석이다.

 

중세의 온난화는 신라게 한반도를 통일했지만 그 북쪽까지 판도를 연장하지 못한채, '발해'가 성립하게 된 이유의 '일단'을 설명해주기도 한다. 중국이 '분열'되어 있다는 정치사회적 사정이 가장 중요했겠지만, 이 시점은 중세의 온난화 시기로서 발해의 '국토' 내부에서 생산성 향상이 두드러진 시기였다는 것이다. 확실히 지구 온난화 방향의 '기후변화'는 가장 우선적으로, 농업생산성의 향상을 가져온다. 재배하는 곡물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도 있다. 발해의 최전성기였던 900년경에는 오늘날 청천강 이북지역에서도 쌀을 재배할 수 있을 정도로 평균기온의 상승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발해는 이 시점에서 크게 번성할 수 있었지만 환경적 요인으로 갑자기 멸말했다. 바로, 온난화의 장기적 추세속에 끼워든 '한랭화' 때문인데 백두산의 화산분출이 가장 큰 원인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에서의 화산분출로 1990년대 초반에 아시아지역에서는 연평균기온이 오히려 '하강'했던 시점이 잠시 나타났다. 바로 이런일이 발해에서도 벌어졌던 것이고, 약 5년간에 걸친 '장기적 온난화' 추세속의 '화산분출물에 의한 단기적 한랭화'가 발해에게 치명적이었다. 요컨대 5년 연속으로 '농업'이 흉작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조건이 형성된 셈이다. 더불어 북쪽에서 거란족들이 한랭화 시기에 '남하'하게 되면서 멸망에 이르렀다는 해석이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지구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의 징후들은 '양날의 칼'을 시사한다. 직접적 문제들은 너무나도 잘 알려져 있다. 가장 극적인 것은 아마도 '투발루'의 해수면 상승과 북극곰의 '눈물'일 것이다. 남아시아지역에서는 2000년 이후 여러차례에 걸처셔 엄청난 규모의 쓰나미가 일어났고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떼죽음 당했다. 특히 2007년의 미얀마 쓰나미는 거의 20만명의 사람들 목숨을 앗아간 것으로 추정된다. 인구밀집지역인 방글라데시에서도 점점 그 빈도와 강도가 아울러 강화중인 태풍에 의해서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연례행사 치루듯 죽어가고 있다.

 

반면에 사실, 한국인들은 잘 알아차리지 못하지만, 현재 최고의 번영을 구가하는 듯 보이는데, 지구온난화도 크게 영향을 미치는 듯 하다. 예전처럼 겨울이 춥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의 겨울철 활동력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남쪽 지방에서는 이모작을 넘어서서 이제 삼모작 실험까지 이루어질 판이다. 귤재배 지역이 남해안으로 들어와서, 목포와 같은 지역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바나나까지도 남해안 지방에서 시험재배가 이루어지기 시작하고 있다. 조금 더 지나면, 남해안의 가로수는 '종려나무'나 '야자'나무로 바뀔지 모른다. 서울에까지 바나나 나무의 재배가 이루어질 정도로 변화하고 있다. 사시사철 푸른 대나무는 서울지역 곳곳의 아파트단지 등에 산재하여 잘 자라나고 있는 중이다. 제주도의 경우는 앞바다에서 엄청난 양의 '다랑어'를 잡을 정도로 변화했다. 이뿐만 아니다. 사과의 주산지는 대구에서 황주를 거쳐서 점점 북상중이다. 이제 경기도 해안의 섬들에서도 사과재배와 수확이 가능해지고 있다. 경기도 북부에서는 전통적인 쌀과 보리의 이모작을 실험중이다. 본래 여름철 어종이었던 오징어가 이제는 사계절내내 잘 잡히는 어종이 되어, 속초에서는 겨울에도 오징어 풍어를 올리고 있다. 요컨대 이런 모든 변화들은 한국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변화이지 결코 나쁘지 않다. 특히나 겨울철 난방비가 줄어들어서 이산화탄소 배출 요인이 감소된 것도 매우 크다.

 

그리하여 이런 변화들은 사실상 인간의 활동력 '증가'로 귀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북쪽에 위치한 지역에서 더 강화되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이미 한반도의 장마전선은 중부와 남부지역에 주로 걸쳐 있던 시기에서, 북부와 중부에 주로 걸쳐지는 시기로 변화해 있다. 북한에 1998년경 '큰 물'이 일어났던 이유는 바로 이와 같은 기후변화의 직접적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북한지역의 '농업'에 대한 전반적 재검토와 구조조정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다른 측면에서는, 만일 남쪽의 훌륭한 농업기술과 비료, 농약과 같은 '고투입 농업'이 북한에 단시일일내에 보급된다면, 쌀 생산량을 곧바로 증대시킬 수 있는 조건이 무르익었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북한에서 굶어죽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기후변화'까지 고려하면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핵심적 원인은 북한이 중국보다 못하게 달러경제권 바깥에 위치하고 있어서이다. 만일 충분한 '에너지'가 공급되기만 한다면 북한지역은 곧 고성장 지역으로 바뀔 수 있을 것이다. 기후변화 조건은 여기에 '금상첨화'이다. 왜 만주나 연해주가 점점 주목받는 지역으로 떠오를까. 답은 간단한데 지구온난화와 기후변화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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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리 2010-12-09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 이 책을 읽으셨나요? 김종규 교수님에게 이책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입니다. 어렵지만 흥미롭고 도움이 많이 되는 책이죠. 글 잘읽고 갑니다.

leesc314 2010-12-24 10:03   좋아요 0 | URL
이 구석진 곳에 오셔서 댓글을 달아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정말 좋은 강의 듣고 계십니다. 많이 공부하셔서 한국의 미래를 개척하는 젊은이가 되길 바랍니다.

지피지기 2011-11-30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역사적 온난화 사례를 찾아야 했는데 다행이도 여기있군요. 힘들게 영문 사이트찾을 필요없게됐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