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로마 제국 쇠망사 - 한 권으로 읽는
에드워드 기번 지음, 나모리 시게나리 엮음, 한유희 옮김 / 북프렌즈(시아)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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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드워드 기번은 그의 책 <로마제국 쇠망사>를 서기 96년 네르바 황제의 즉위, 즉 5현제 시대의 개막에서부터 다루고 있다.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를 요약한 이 책 <한 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의 편역자 가나모리 시게나리는 기번이 그 이전의 시대, 즉 포에니 전쟁, 카이사르, 클레오파트라 등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기번이 살았던 18세기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서 그 이전의 '역사'는 이른바 상식이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아마도 기번은 궁금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 거대한 로마를 돌아보면서 말이다. 이 거대한 제국, 도저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로마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일까. 로마는 어떤 이유로 쇠약해지고, 멸망에 이르게 된 것일까. 기번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로마의 쇠퇴는 뛰어나게 위대한 문명의 종착지로서 지극히 자연스럽고 불가피한 결과였다. (중략) 따라서 인공적인 이 대건축물을 떠받치고 있던 각 부분이 시대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흔들리기 시작하자마자,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로마의 멸망은 단순한 요인에 의한 것이고 불가피한 것이었다. (p.288)- '옮긴이의 말' 일부분    
   

 

그래서 아마도 기번은 <로마제국쇠망사>라는 자신의 글을 로마 제국이 가장 융성하던 시기인 5현제 시대부터 다루기 시작했을 것이다. 역설적으로 보면, 무릇 어떤 것이건 간에 최정점에 오른 시기가 쇠퇴가 시작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기번의 설명식으로 보자면, 로마를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이 생겨나는 그 순간 이후부터 필연적으로 이 기둥에는 조금씩 균열이 생겨나기 마련이었을 것이고, 그 균열은 결국 로마라는 거대한 건물을 무너뜨렸던 것이다. 로마가 멸망하게 된 이유를 여러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기번이 말한 그런 것일 것이다. 즉 로마라는 이 대들보가 너무 거대해졌다는 것, 상대적으로 그것을 떠받드는 기둥들보다도 말이다. 따라서 이민족의 침입과 같은 것들은 근본적인 이유라기 보다는, 그 기둥에 가해지는 도끼질 같은 것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미 허약해진 기둥들은 몇 번의 도끼질로도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

책의 내용으로 미루어, 로마가 쇠퇴하고 멸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다. 먼저 무상으로 제공되는 밀과 끊임없는 전차시합과 검투시합과 같은 볼거리의 제공이 야기한, 로마 제국민들의 정신적인 나약함, 또 하나는 로마 제국 내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권력 암투, (그리고 그것에 기름을 부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제국의 4분할통치책), 부르군트족, 고트족과 같은 이민족들의 거듭된 침입과 로마제국 후기에 이르러 이민족들의 동화와 융합 정책에 실패한 점, 이슬람 세력의 급격한 성장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점 등등. 이 중 과연 어느 것이 로마 멸망의 가장 큰 이유인가라는 물음에는, 아마도 기번의 말에서 힌트를 찾아야 할 것이다. 즉 이 중 어느 한 가지가 근본적인 이유였다기 보다는, 로마가 이 모든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에는 이미 너무 몸집이 거대해져 버린 거대한 공룡과 같았다는 점 말이다. 다만, 기번이 그 이유 중의 하나를 기독교에서 찾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기번은 말한다. 내세 지향적인 성격을 가진 기독교가 로마에 널리 퍼지고, 국교가 되면서, 제국민들은 현세의 황제에 충성할 필요를 느끼게 되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 그것이 로마 제국 멸망의 주요한 이유 중의 하나였다고. 흥미로운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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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한권으로 읽는 로마제국 쇠망사>는 제목에서 말하듯이, 기번의 6권으로 된 <로마제국 쇠망사>를 한 권에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5현제 시대 이전의 로마의 역사가 궁금한 독자들을 위해, 앞 부분의 역사까지 요약하여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러다보니 잃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6권의 이야기를 한 권으로 축약하다 보니, 인물들의 등장과 사건의 전개 중심으로 급박하게 설명이 이루어져, 어떤 부분에 대한 심도 깊은 이해나, 의미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지는 못하다. 즉 가끔 TV에서 시간 때우기 용으로 하는, 몇 부작의 이야기를 짧게 축약한 드라마 스페셜 편을 보는 것처럼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해하게 되지만, 그 안의 세부적인 잔재미(?)들을 놓치게 된달까. 그리고 사실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은 그렇게 앞부분의 이야기들을 무리하게 집어넣다 보니, <로마제국 쇠망사>라는 이 원저의 본질적인 의미, 즉 '로마 제국이 왜 쇠망하게 되었는가'를 근본적으로 이해하기는 무리가 따른다는 점이다. 즉 각각의 사건들을 흐름을 알게 되기는 하나, 이 모두를 아우르는 근본적인 시각을 얻기는 아무래도 모자르다. 나 역시도 기번의 이 원저를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앞에 옮긴이의 말 일부분과 몇 가지 주워들은 이야기들을 가지고, 이 무리한 리뷰를 쓸 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물론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독특하게 각 장이 질문을 던지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고, 사건들에 대한 서술을 통해 질문에 대한 답도 나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용어의 설명들도 충실하게 잘 되어 있는 편이며, 사진이나 연표도 잘 제공되고 있다. (일본애들이 참 이런 거 잘한다.) 다만 나는 그저 아쉬울 뿐이다. 그 아름답다는 기번의 문장들을 읽지 못해서 말이다. ('훌륭한 건축물은 자신의 무게 때문에 붕괴하고 말았다'라니..아 표현좋고!) 그러니 아마도 언젠가는 그것들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때는 조금은 덜 무리한 리뷰를 써야만 할 것 같다.

아무래도 패스트푸드가 가끔 맛있고 편하기는 한데, 배는 금방 꺼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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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5-20 0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지금 쓰다니..큰일이야..큰일.

cyrus 2010-10-06 1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어떻게 보면 독자들에게 딜레마를 안겨 주는거 같네요.
저도 원전으로 된 6권을 볼 것인지 아니면 축약본을 읽을 것인지 고민을 했거든요.
지금도 고민중이라서 아직도 읽을 엄무도 안 나고 있답니다^^;;
맥거핀님의 축약본 관련 리뷰 덕분에 어느 정도 고민이 해결되었네요.
좀 시간이 걸리고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원전을 읽어봐야겠네요.
안 되면 축약본으로..^^''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맥거핀 2010-10-06 22:04   좋아요 0 | URL
저도 원전을 읽어봐야겠다..계속 그러고 있지만, 엄두를 못내고 있습니다. 뭐 정 안되겠다 싶으면, 축약본이라도 읽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그리고 나름 이 책은 축약이 잘 되어 있는 편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구요. (물론 원전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하하하 - haha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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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지도 못할 바에는, 좋은 것만이라도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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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웃었다. 하하하.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의 인장들이 물씬 드러나는 영화다. 예를 들어 영화에서 사용한 몇몇 장치들. 등장인물들을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하나, 다르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거기에서 일종의 '반복과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밤과 낮>에서 사용한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등장인물이 과거를 회상하여 그것에 논평을 가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도 그렇다. 또 꿈은 어떠한가. 이 영화에서도 예전의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독특한 꿈 씬이 등장한다. 그리고 또 어떤 장면들은 예전 영화에서처럼 꿈인지 아닌지 약간 모호한 면도 있다. 또한 이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 역시 홍상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소위 '홍상수 사단'임을 하나의 인장 요소로서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물론 가장 중요한 점은 이것일 것이다. 즉 구조든 내용이든 간에 아무튼 이 영화 <하하하>는 홍상수 영화의 빼놓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요소, 즉 '관객들의 웃음'을 여전히 유발한다는 점. 그런데 그 웃음이 예전과는 약간 다른 점도 있다. 예전의 웃음들이 관객들을 계면쩍게 만들어서 웃음을 유발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이 영화의 웃음은 조금 더 귀여운 웃음이랄까, 상쾌한 웃음이랄까.

그리고 <하하하>는 여름의 이야기이다. 夏夏夏. 여름여름여름. 그 세 번의 여름이야기. 첫 번째 여름은 문경(김상경)의 회상. 어머니를 만나러 간 통영에서 관광 해설가인 성옥(문소리)을 만나, 그녀에게 반해 쫓아다니는 이야기. 그리고 두 번째 여름은 중식(유준상)의 회상. 통영에서 그의 애인 연주(예지원)와 밀회를 즐기며, 후배 정호(김강우)와도 어울리는 이야기.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여름은 우리가 그 두 사람의 이야기로서 추론하여 만들어내는 이야기. 우리는 이 둘의 회상을 통해, 이들 각자가 알지 못하는 몇몇 중요한 사실을 안다. 예를 들어 가장 대표적인 사실. 문경은 성옥과 그녀의 애인에 대해 알지만, 그녀의 애인이 바로 중식이 말하는 후배 정호라는 사실은 모른다. 즉 우리는 두 사람이 하는 몇몇 얘기들을 통해서, 두 사람보다 이 이야기 전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전지적 관찰자'의 시점에서, 이 두 사람의 얘기를 본다('듣는다'가 아니라 '본다') 어쩌면 이 유머의 상당 부분은 여기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우리는 이들보다 많이 알고 있을까.

아니, 나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뭐 이런 류의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왠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전작의 내용과 연결되는 것 같다. 이 영화의 메시지는 여러 가지를 말할 수 있겠지만, 아마도 그 중의 중요한 한 가지는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씨네 21>에서 정한석이 말한 것처럼 좋은 것, 나쁜 것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정한석은 말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철학>에서 도덕은 선악의 가치판단에 관계 되지만, 윤리는 좋음과 나쁨의 질적 차이에 관계된다고 설명해주었다. 좋음과 나쁨! 좋은 것만 보아라! 그러면서 들뢰즈는 "슬픈 정념은 언제나 무능력에 속한다"고 하였으며 윤리학이 해야 하는 삼중의 실천 중 첫 번째로 "(자연 속에서의 우리의 처지로 인해 우리는 나쁜 만남들과 슬픔들을 가질 수밖에 없는데)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하고 물었다.' 그러면서 이러한 것을 설명해주는 장면으로 문경이 성웅 이순신과 만나는 장면을 들었다. 그 장면이 이 철학적 내용에 대한 홍상수 식의 설명이라고 말이다. 

그저 몇 가지 잡설을 여기에 덧붙여 보자면, 이 내용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전작의 제목을 연상시킨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고 한다면 그것의 의미는 전체를 온전하게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는 부분의 문제이며, 동시에 선악, 즉 도덕의 문제 또는 윤리의 문제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전체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때로 누군가를 비난하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충고를 건네기도 한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일 수 있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일 수도 있다. 우리는 (누구나에게 동일하다고 착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만의 윤리의 관점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답이 어쩌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아닐까. 즉 우리에게 누군가가 '이 전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렇게 말하지 마'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너의 섣부른 도덕적 혹은 윤리적 잣대를 나에게 들이대지 마'와 거의 비슷한 의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더 이상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말 하지 말고, (도덕이 아닌) 너 자신만의 윤리적 관점을 만들어갈 것,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도 그 사람의 윤리적 관점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그것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들여다 볼 것. 그것을 실천하는 가장 간단하고도 좋은 방법이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 방법은 간단하기는 하나 매우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편으로 잘 알지도 못하면서..라는 것에 대한 하나의 대답은 '내가 전체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좋은 것만 보려 한다'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홍상수의 관점에서 볼 때, '전체를 그대로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순신에게 문경은 묻는다. '아 그러면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되는 거...뭐 그런 겁니까?' 이순신은 답한다. '아니지. 있는 그대로를 보는 게 아니지. 그런 게 어딨냐?')

사실,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괴이쩍게 생각했던 부분은 이 영화의 구조였다. 즉 두 사람의 여행을 교차하여 보여주는 형식이 아니라, 두 사람이 여행을 다녀온 후, 술자리에서 만나 지나간 이야기를 주고받는 구조. 그리고 그 형식도 좀 수상쩍은 것이, 굳이 현재의 술자리를 스틸사진으로 처리하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 물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이야기를 회상하는 형식은 홍상수의 영화에서는 그렇게 낯선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일기를 도입하거나, 씬의 번호를 매겨서 장면을 나누는 형식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이 스틸사진들도 그렇게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의 주제를 '좋은 것만 보라'라고 생각했을 때는 이것이 이해가 된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이 아니라 내용이었던 것. 즉,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야기를 보여주는 것은 한편으로, 실제 그들이 그곳에서 행한 행동과 그 후의 논평과의 불일치 - 예를 들어, 문경이 정호에게 맞았을 때도 문경은 그것을 '의연하게 대처해서 좋았다'고 회상한다. 사실은 어쩔 도리가 없어 맞은 것에 불과했으면서도 말이다 - 에서 생겨나는 솔직함이자, 예의 그 홍상수 식의 유머를 유발하기 위한 장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형식보다는 내용이라는 점이다. 

이 술자리의 대화의 주제는 몇 번 반복되어 제시되듯이, '여름에 좋았던 일'을 서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그 논평들은 '응, 좋았겠구나' '어, 좋았어'로 마무리되고 있다. 즉 이 영화의 주제인 '좋은 것만 보라'라는 것은 성웅 이순신의 말로써 직접 전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주인공들의 아주 직접적인 행동을 통해서 실천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스틸사진들. 사진들이란 결국 무엇인가. 사진들은 결국 '좋았던 것'을 담아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여행을 다녀온 후, 동영상으로 기록을 남기는 것과 사진으로 남기는 것, 그 차이. 동영상과 달리 사진은 철저하게 좋았던 내용만이 담겨있다. 물론 동영상 역시 일정 부분 그런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사진은 거의 철저하게 우리가 원하는 것, 즉 우리에게 좋았던 것만 담기게 된다. 이 두 사람이 술잔을 나누면서 보여지는 스틸 컷들은 어떠한가. 대부분 이 두 사람이 잔을 부딪히고, 웃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가 이 사진만을 놓고 이 술자리를 판단한다면 어떨까. 우리는 이 사진들을 놓고서는 이 술자리가 '화기애애하고 좋았다'라고 밖에 추측할 수밖에 없다. 즉 우리는 이 스틸사진들을 통해서 이 술자리의 '좋은 것'만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이 영화의 전체를 둘러싸고 있는 액자인 이 스틸사진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로 이 영화의 전체 주제를 상징한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스틸 사진들과 회상 장면의 동영상들과의 대비, 그 놀라운 형식과 주제와의 결합.

즉 어떤 의미에서 본다면 이를 주인공들의 성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통영에서와 달리, 서울 근교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이 술자리는 주인공들의 '좋은 것만 보라'의 실천적 체험 현장이다. 좋은 것만 말하고, 좋은 것(사진)만 남기는 자리. 그리고 심지어는 이 술자리는 깔끔하게 끝나기조차 한다. '이제 마지막 잔하고 일어설까' 이런 류의 대사가 맨 마지막에 나오다니, 이게 홍상수 영화에서 가능했던가. 아무튼 망가져서야 끝장을 보는 것이 홍상수 영화의 술자리가 아니던가. 아니, 그것은 어쩌면 통영에서부터 미리 예고되어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중식은 비록 불륜이기는 하나, 연주에게 청혼을 하고, 문경도 성옥에게 같이 캐나다로 가자며, 청혼 비스무리한 것을 한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주인공들이 다른 영화에서도 있었던가. 그들은 대체로 어떻게든 빨리 넘어뜨리고 보자는 쪽이었지, 청혼을 하자는 쪽은 아니었다. 청혼을 하는 홍상수의 남자들, 그 성장의 표식들은 상당히 놀랍기까지 하다. 이제 마지막 문제가 남았다. 이 표식들을 홍상수 영화에서 긍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부정의 의미로 읽어야 하나. 내 생각에는 아무래도 그 전자 쪽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 그래서 아무튼 긍정의 의미에서 하하하.

p.s. 이 영화의 문소리의 연기는 압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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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3 20: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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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5 13: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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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6 01:2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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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27 00: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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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 Enlightenment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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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영화. 아마 보통의 영화감독이라면 자신의 영화에 이런 제목이 붙기를 원치 않을 것이다. 계몽이라는 말이 거의 사어(死語)에 가까울 뿐더러, 혹여 쓰인다고 해도 요즘에 들어서는 '계몽'이라는 말은 거의 조소나 모욕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니까 말이다. 내가 너를 계몽해야겠다...라고 말한다면, 그 상대방은 아마 나에게 가운데 손가락을 내밀며, 이거나 드시죠, 라고 말할 것이다. 계몽..아니, 굳이 계몽까지 가지 않더라도 요즘에는 누군가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 시대니까 말이다. 인터넷 시대에 게시판에서 가장 분란이 많이 일어나는 경우 중의 하나가 "어디 나에게 가르치려 들어?"인 것은 거의 주지의 사실. 그래서, 어쩌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감독의 시대에 대한 냉소일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삼대(三代)는 조금씩, 조금씩 비틀어져 가고 있기 때문이다. 친일로 부와 지위를 쌓은 1대, 그리고 군부독재의 시대에 독재에 빌붙어 폭력적이고 기형적으로 성장한 2대, 개인주의의 시대에 이기적으로 성장한 3대. 그들이 보여주는 비틀어진 가족극의 굴레. 그러나 그들에게는 몇 번인가 선택의 순간이 있었다. 비틀어진 것들을 조금씩 바로잡아나갈 기회들이 말이다. 그러나 단지 그들은 그 때마다 '자신을 위하는' 선택을 해나갔을 뿐이다. 주위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자신들만 앞으로 나아가려는 그러한 선택들을 말이다. (이 영화의 팜플렛에는 이 영화는 '태도에 대한 영화'라고 밝히고 있다.)

아니, 사실 그렇게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그들의 그러한 선택들이 단순히 자신들만을 위한 것이었을까? 그것에는 한국 사회의 어떤 대물림에 대한 처절한 욕구가 담겨 있다. 때때로 수많은 선택들은 자식들을 위한 것이라는 미명 하에 모든 것이 정당화된다. 자신들이 가진 부, 지위, 명예...등등을 자식들에게도 그대로 대물림하려는 욕구, 그것들은 영화 속에서의 주인공들의 반복되는 행위들의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가 된다. 그것은 영화 속에서 주류사회에 대한 욕망으로 표현된다. 초등학교 앨범 사진촬영에서조차 중심에 서야 한다는, 주류사회에 대한 그 처절한 발버둥질. 그러나 그 처절한 발버둥질은 주류사회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게 하는 것과 동시에, 몇몇 대물림되지 말아야 할 것 - 폭력, 이기심, 탐욕 등등 - 까지 동시에 대물림되는 결과를 낳았다. 아니, 아마도 그것들 역시 대물림되기를 스스로 원했던 것들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결국 대물림되는 그것의 결과물들이 결국 무엇을 초래하는지 영화는 밀도 있는 서사 속에서 흥미롭게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이렇게 놓고보면,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은 흥미롭게 읽힌다. 이 3대는 어떤 의미에서는 한국의 주류 사회의 모습들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역으로 말해서 한 두가지 장면들을 제외한다면, 이 가정의 모습은 60-70년대 '대한뉴우스'에 실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권장할 만한 가정의 모습이다. 즉 이 모습들은 한국의 나머지 비주류들이 그토록 원하는 부와 지위와 권력을 약간이나마 소유하고 있는 모습이며, 나머지 비주류들에게 이상적인 형태로서 '계몽의 표본이 될' 만한 가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하고, 실제로 상당 부분 그렇게 계몽되어 오기도 했다. 그러므로, 결국 이 영화는 이 '계몽의 표본으로서 내세울만한 가정'이 실상 그 내부적으로 전혀 '계몽의 표본'이 아님을 드러냄으로써, 그간 '이 정도 수준'이 계몽, 혹은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지던 한국 사회의 수준이 과연 어떤 것인가를 이 <계몽영화>라는 제목을 통해 물으며 조소한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지난 모습들을 직접적으로 상징하고 있는 3대의 각 인물들을 펼쳐보임으로써 이것이 단지 한 가정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지나간 모습들과 그 때의 선택의 결과들이 초래한 현재의 모습임을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묻는다. 우리는 그간 역사 속에서 어떠한 선택을 해왔는가? (예를 들자면 아마도 이런 질문들일 것이다. 친일파를 청산하자던 '반민특위'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 선택에 당신은 자유로운가? 아마도...아마도, 그것에 거의 자유로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주류이건 아니건 간에, 어쨌든 그 주류 사회의 끄트머리라도 잡고 매달려보고자 이들과 같이 발버둥을 쳐왔으니 말이다. 즉 이 영화의 3대는 타자화된 당신들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저 '우리 사회 그 자체'일 것이며, 그것이 이 영화가 묵직한 뒷맛을 남기는 이유이다.   

............................................

마지막으로 2가지 의문점이 남는다. 한 가지 의문은 이 영화의 캐릭터 구성에 대한 의문이다. 이 영화에서 전체적으로 남성 캐릭터들은 심리적으로 불안하게 그려져 있는 반면에, 여성 캐릭터들은 상대적으로 강하게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작은 기업체의 사장이자, 집안의 독재적인 가장이며, 카라얀을 사랑하는 예술 애호가이면서(이 카라얀 역시도 아내가 권해준 것) 동시에 알코올에 찌들어 있는 2대 정학송의 불안한 모습과 그와 대비되는 아내의 모습은 어떠한가. 뒤의 결정적인 사건들을 제외하고라도 이 불안한 남성 캐릭터는 독재적인 군사정권에서 가정과 학교, 군대라는 폭압적인 체제 하에서의 뒤틀린 한국의 남성들을 묘파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면 태선과 그의 남편, 김성호의 관계는 어떨까. 이를 단순하게 태선이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폭력성의 잔영으로만 이해하여야 할까. 이 영화의 주된 화자(話者)인 태선과 그리고 이 영화의 또다른 중심축인 태선의 어머니(학송의 아내)의 병실에서의 모습 등은 꽤나 흥미롭게 보인다.

그리고 또다른 의문은 이 영화의 결론과 관련된 것이다. 문을 전부 뜯어고치겠다는 태선의 태도를 우리는 긍정의 예후로 읽어야 할까. 글쎄. 그러면서도 태선은 여전히 대물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예전의 세대가 직접적으로 부와 지위와 권력을 자식들에게 넘겨 주는 방식을 택했다면, 현재의 세대는 간접적으로 이수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것은 자식을 비싼 돈을 들여서 과외를 시키고, 8학군에 보내고, 조기유학을 보내는 방식이다. 그러나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이 방식이 더욱 효과가 크다. 그러한 교육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사회구조가 이미 공고하게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예전처럼 남들 보란듯이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는 이 세련된 방식이 큰 효과를 가지도록 점점 주류사회는 사회를 그렇게 만들어갔고, 앞으로도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선이 자식을 공항에서 홀로 보내는 이 마무리 장면은 꽤나 씁쓸하게 느껴진다. 우리 사회는 달라질 수 있을까.

이제 조금은 긍정적으로 이 제목 <계몽영화>를 되새겨보자. 현재의 변질된 의미와는 다르게 본래 계몽이란 인간의 이성을 바탕으로 편견이나 미망에서 빠져 나와 자신의 주체적 현실을 구축해 나감을 의미하였다. 즉 신의 거대한 치마폭에 둘러쌓여 있던 중세의 어두운 시기를 밝게 하는 것(enlightenment), 그것이 바로 계몽이었던 것이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는 이제 어쩌면 지금의 시기가 새로운 의미의 '계몽', 그리고 그에 바탕한 '계몽영화'가 필요한 시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 인디포럼 4월 월례비행으로 본 영화인데, 게으름 덕택으로 이제야 어렵게 기억력을 되살려가며 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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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 - 독서의 즐거움
정제원 지음 / 베이직북스 / 2010년 4월
평점 :
품절


'독서의 즐거움'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이 책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는 인문학 책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아마도 자기계발서 쪽에 조금은 더 가까울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은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란 간단히 말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책을 읽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것도, '교양을 쌓게 해주는 책'들을 말이다.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요즘 들어 다양한 교양 매체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독서는 교양을 갖추는 가장 쉽고도 편리한 방법이다. (중략) 책이 전달하는 지식이나 정보가 잊혀도 남는 무엇, 바로 그 무엇이야말로 생각의 소득이며 교양의 원천이다. 그 무엇이 우리가 존재하는 지점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우리는 비로소 물을 수 있다. "나는 누구인가?" (p.17)   
   

 

그러면서 저자는 30권의 책을 통한 30가지의 독서법을 제시하고 있다. 즉 한 권의 책에 대한 간단한 서평을 통해 그 책을 읽으면서 갖추어야 할 독서법을 제시하는 것. 그러면서, 저자는 조금은 특이한 방식으로 각 책들을 연결지으며, 논의를 이끌어간다. 예를 들어 첫번째 독서전략으로 '자투리 시간을 활용하는 책을 읽는다'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지성인을 위한 교양브런치>를 읽을 것을 제안하면서, 다음 책으로는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는다'라는 테마를 제시하며, 강준만의 <행복코드>를 읽도록 하는 것, 그리고 또 그 다음 책으로는 '같은 테마의 책을 읽는다'를 화두로 내세우며, 버트란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을 제시하는 식이다. 즉 저자의 목적은 어떻게 보면 꽤나 명백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 목적이란 30권의 책을 독자가 읽어나가면서 '교양인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이 책의 조금은 더 적합한 제목은 '교양인의 행복한 책읽기'라기 보다는 '교양인이 되기 위한 조금은 덜 행복한 책읽기'가 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싶다. ('조금은 덜'이 붙은 이유는 어떤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 단지 그것의 수단이 될 경우에는 '완전히' 행복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농담이다 -.)

내가 굳이 이런 딴지 아닌 딴지를 거는 이유는. 이 책의 제목을 혹여 오독하여, 이미 일정 정도의 독서 이력을 갖춘 사람이 이 책을 읽게 되면 살짝 실망하지 않을까 해서 해본 얘기다. 즉 이 책은 독서력에 있어서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른 사람들에게 더욱 풍성한 책읽기를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그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별로 책을 많이 읽지 않는 사람들, 특히 인문학 부문의 책들을 거의 읽지 않는 사람들에게 그런 책들을 읽도록 하는 데에 목적을 두고 기획되어 있기 때문이다. 책들의 선정에서도 보면, 작가가 삶을 살아가는 동안에 읽은 책들을 소개하는 식이 아니라,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거의 새롭게 책들을 읽고, 새롭게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따라서 소개된 책들의 면면을 보면 간간이 인문학의 고전들도 끼어 있지만, 최근에 발간된 책들이 상당수이다. 즉 이 책의 주 목적은 소개된 책들을 읽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소개된 예시의 책들을 통해서 책을 읽어나가는 재미를 깨우치도록 하는 것이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꼭 '그 책'일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것은 작가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서문에서도 언급했지만, 독서법에 관한 책이면서 이렇듯 책을 구체적으로 선정해 일독을 권하는 것은, 독서법만 알고 실제로 그 독서법에 맞춰 독서는 할 줄 모르는 병폐를 없애기 위해서다. 훌륭한 독서법은 독서 행위 밖에서 관념으로 존재하기보다는 독서 행위 내부에서 우리에게 현시될 뿐이다. (p. 17-18)   
   

 

따라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이 책은 서평 모음집으로 보기에는 약간 함량미달이다. 소개된 책들의 내용이나, 그 책들이 어떠한 측면에서 좋은 책들인지, 그 책들이 어떤 측면에서 훌륭하고, 또 어떤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지를 소개하기 보다는 거의 그 책과 그 작가에 대한 맹목에 가까운 찬사로 일관하며, 상당수의 내용이 소개된 책의 일부분을 발췌하여 보여주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당연하게도 이를 가지고 이 책의 글쓴이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책의 목적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그 책에 어떤 평을 가하는 것이 아니라, 그 책을 읽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책을 읽게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그 책의 가장 인상적인 구절을 제시하여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책들을 단지 몇 구절에 반하여 구입했던가.

.........................................

이 책은 '독자들에게 인문학 책을 읽도록 한다'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상당히 효과적인 구성을 가지고 있으며, 책들의 연결된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아마도, 저자가 말한 대로 제시된 책들을 하나하나 읽어나가다 보면 인문한 책을 평소에 잘 읽지 않던 사람들도 인문학의 재미를 조금씩 느끼게 될 것이다. 그리고 책을 따라 30권의 책을 덮은 순간에는 어느 틈에 교양인이 되어 있을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그 다음에는 저자가 제시한 마지막 독서법 대로 '자신의 기준으로 자신이 선택한 책을 읽'으면 될 것이다. 아니, 아마도 그 때쯤이면 어떤 기준 따위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읽으면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마음 가는 대로 읽는 것' 그것이야 말로, 독서가가 갖추어야 할 마지막 단계일 것이다. 어떤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이 책이 읽고 싶어서, 재미있어 보여서 선택한 책들이 나를 더 살찌우고, 삶을 풍족하게 이끈다면 그보다 좋은 독서법이란 없을 것이니 말이다. 어쩌면 가장 최고의 독서법이란 '어떤 필요가 있어서 읽는 책(바로 이 책?)을 집어치우고, 마음 가는 책을 읽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아..참고로, 이 방법은 고수 이상의 독자들만 시연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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