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전쟁 - 알 카에다에서 9·11까지
로렌스 라이트 지음, 하정임 옮김 / 다른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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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9․11이 있은 지, 8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9․11은 현재진행형이다. 미국은 9․11이후 테러를 지원한 세력을 공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이라크, 아프간 등에 전면적인 공격을 가했고, 한편으로 미국 내에서는 이러한 보복 공격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또 9․11 사건의 희생자의 가족 및 주변 사람들의 이야기 역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해지며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마도 2000년 이후, 전세계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을 꼽자면 9․11이 거의 그 첫손에 꼽힐 것이다. 따라서 이 9․11을 이해하는 것은 어쩌면 2000년 이후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주는 하나의 커다란 단초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여전히 9․11은 안개에 싸여 있기도 하다. 사건의 자세한 배후 및 내막은 물론이거니와, 9․11이 미국의 자작극에 불과하다는 음모론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고, 한 때 사망설이 제기되었던, 배후의 중심축인 오사마 빈 라덴의 행방도 여전히 묘연하다. 여기에 이 책 <문명전쟁>은 밝고도, 구석구석까지 스며드는 세심한 불빛을 제공한다. 이 책은 5년 동안에 걸친, 11개국 6백 여명의 인터뷰를 통해 알카에다의 발족 이전부터 9․11에 이르는 성실하고도 자세한 길을 추적한다. 그 길에서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길의 전체 여정을 요약해서 보여주기도 하고, 중간중간 옆으로 살짝 눈을 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길의 중간에 머물러 발 밑에 차이는 돌부리를 자세히 관찰하기도 하면서 길의 끝까지 독자를 성실하게 안내한다. 그러나 그 길은 명확한 단선주로가 아니다. 그 길은 복잡하고 군데군데 깊이 파인 러프가 있는 으슥하고 여러 갈래가 나뉘어진 오래된 길이다.

그 하나의 길은 테러를 일으킨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와 그와 함께 여러 가지 것들을 계획하고 실행한 아이만 알 자와히리의 알 지하드를 세심하게 추적하는 길이다. 저자 로렌스 라이트는 사우디에서 성장한 빈 라덴과 이집트에서 세력을 키운 자와히리를 그 출생부터 조금씩 추적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조금 더 거슬러 오르면 이들에게 어떤 영감을 준 사이드 쿠투브가 있다. 저자는 이들의 출생에서부터 그들이 살아온 경로, 그리고 그들이 저지른 여러 일들까지 여러 사람들의 증언과 다양한 자료를 통해 밀도 있게 조명해 보인다. 이집트 의과대학에서 공부하고, 의사로서 여러 사람의 생명을 살린 자와히리가 왜 알 지하드를 조직하고 거대한 지하드(성전)에 나서게 되었는가, 그리고 사우디의 부유한 집안에서 자라나, 사우디 왕가와도 깊숙한 관계를 맺고, 크게 사업을 일으킨 명망있는 사업가 빈 라덴은 왜 알 카에다를 만들고 동굴 속에 숨어 지내게 되었는가.

그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문명전쟁'이다. 즉 이들은 미국으로 대표되는 물질주의적이고 세속적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탐욕적인 향락적인 문화에서 금욕적이고 신실한 이슬람 문화를 지켜내는 것을 어떤 하나의 사명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것의 뿌리는 위에서 말했던, 사이드 쿠투브의 사상과도 일치한다. 어렸을 때부터 사이드 쿠투브의 저작들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던 이들이 사실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코란의 말씀을 그대로 체화하는 거대한 이슬람 제국의 건설이었고, 그것의 반대편에 있는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미국을 세상에서 사라지게 하는 것이었다. 어떤 정신적인 부분만이 아니더라도, 미국은 또한 이슬람 세력에게 눈의 가시인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후원하는 국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보면, 이들의 적은 꼭 미국만은 아니었다. 이들의 눈으로 보면 혁명적이고 이단적인 의미를 가지는 공산주의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고, 그외 이슬람 신자이지만, 이단이거나 이슬람의 하나의 분파인 시아파 세력 역시 이들의 적이었다.

   
  신병은 끝없는 육체적 훈련을 견뎌내야 했을 뿐 아니라 알 카에다의 세계관도 주입 받았다. 그들의 강의 노트에는 다음과 같은 조직의 유토피아적 목표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

1. 전 세계에 신의 지배를 확립한다.
2. 신을 위해 순교한다.
3. 모든 타락으로부터 이슬람을 정화한다.

이 세 가지 목표에서 알 카에다의 매력과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알 카에다는 정치의 유일한 목적이 종교를 정화하는 것이고, 사람들에게 신의 지배가 어떠한 모습일지 의문을 가져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이상주의자들을 끌어들였다. 개인의 목표인 순교는 여전히 많은 신병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p. 446-447)
 
   


그러나 저자가 이들을 어떤 악마로서만 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또한 한편으로 자와히리와 빈 라덴의 수많은 주변 사람들의 목소리를 담아내며 이들을 다각도로 조명하려 노력한다. 이들은 또한 한편으로 가족들에게 따뜻한 아버지이기도 했으며, 주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선뜻 내어주고,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잘 도와주는 그런 사람들이기도 했다. 그것은 단지 자와히리나 빈 라덴에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그들 주위에서 같이 테러를 계획하고 실행한 많은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깊은 신앙을 가지고, 생활을 해나가는 인간적이고, 어떤 의미에서는 순수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빈 라덴의 아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빈 라덴을 신앙심이 깊고 비타협적인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언젠가 파티마가 카세트테이프를 빌리려고 할 때였다.
"네 아빠가 못 들으시게 해야 한다."
자이나브는 빌려주는 조건으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빤 그런 거 던져 버릴 사람은 아니야. 실제로 그렇게 엄격하지 않으시거든. 남자들 앞에서만 그런 척하실 뿐이야."
"노래도 들으신단 말이야?"
자이나브가 놀라서 물었다.
"그럼, 전혀 신경쓰지 않으셔."
말을 좋아한 빈 라덴은 움 칼레드의 집에 말에 관한 책들로 서재를 만들고, 말 사진이 있는 책이나 달력도 걸어두었다. 자이나브는 빈 라덴이 아주 마음이 넓다고 결론지었다. (p. 372-373)
 
   


이 책을 읽는 또 하나의 길은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반대편에 있는, 즉 미국에서 이들을 잡기 위해 여러 정보를 수집하고, 테러를 막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FBI나 CIA, NSA(미국국가안전보장국)의 여러 인물들, 특히 그 중에서도 그의 중심에 있었던 FBI의 존 오닐을 중심으로 읽는 것이다. 미국은 사실 초창기에는 빈 라덴과 자와히리의 이슬람 세력을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리고 몇몇 테러들이 일어난 이후에도 이들에 대한 탐색은 꾸준히 이어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높은 강도로 행해지지는 않은 듯 하다. 실제로 9.11 직전에도 이들의 이러한 테러를 암시하는 몇몇 징후들이 감지되었고, 9.11의 실행에 직접적으로 간여된 몇몇 인물들이 미국에 입국한 정보도 수집되었지만, 이러한 정보들은 때로는 묵살되고, 때로는 별로 중요치 않은 것으로 취급되었다. 이것에는 한편으로 CIA와 FBI의 오랜 반목도 큰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관이 가진 정보를 상대방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때로는 정보를 교묘히 감추어 버렸고, 그 때마다 테러 세력들은 새로운 일을 하거나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이들은 물론 큰 사건에는 공조하기는 했으나, 때로는 거의 공조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의 중심에는 FBI에서 이들을 꾸준히 추적한 수사관 존 오닐이 있다. 그는 단순히 정보를 수집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여러 조직들을 이끌어 나가며, 이들을 꾸준히 추적하였고, 예멘에서 미 군함 콜호가 테러 공격을 받아 거의 침몰할 뻔한 상황에서는 직접 현지로 날아가 관련자들을 심문했고,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나 흥미로운 것은 이 존 오닐이라는 인물은 또한 한편으로는 세속적이고 향락적인 미국을 대변하는 듯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는 여러 여자들과 동시에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많은 빚을 가지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는 그는 한편으로 불안한 상태였고, 일에 몰두하는 것으로 여러 불안함을 잊으려고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러나 그는, 거의 빈 라덴에 비견할 정도로 머리가 좋고, 추진력이 뛰어났으며, 여러 지략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거의 빈 라덴을 잡거나, 혹은 그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빈 라덴이 어떤 거대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고, 거의 9.11을 암시하는 발언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주 사소한 선택 몇 가지가 빈 라덴이 9.11을 성공시킬 수 있도록 했다. 

존 오닐은 그러나 공교롭게도 9.11이 일어난 날 세계무역센터 안에서 죽었다. 그는 이런저런 문제가 겹쳐 그 이전에 FBI에서 사직했고, 그가 새로 시작한 일의 사무실은 세계무역센터 안에 있었다. 9.11이 일어나기 며칠 전부터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대목은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상당한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그는 건물이 비행기와 충돌한 당시에 건물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으나, 자세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위험을 무릎쓰고 다시 건물로 돌아갔고, 그의 시신은 10여 일이 지난 후에야 잔해더미 속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공격을 예견했고, 그 공격을 막아내려고 온 힘을 다해 애썼지만, 바로 그 공격으로 인하여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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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문명전쟁>은 그 외에도 많은 흥미진진하고도 숨겨진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책의 중심축은 자와히리와 빈 라덴, 그리고 존 오닐이라는 세 인물이지만, 그 세 명을 둘러싼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와 알려진,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뒷 배경의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때로 표면에서 하나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흥미진진하게 전달되기도 하고, 때로는 멈춰서서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해, 그리고 그 이면의 의미에 대해 독자에게 묻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몇 개의 생각거리들을 제공한다. 자살을 금하는 이슬람의 계율을 반하는 자살 폭탄 테러들은 어떤 방식으로 정당화되었는가, 왜 테러 세력들은 미국을 주 타깃으로 삼게 되었는가, 그리고 하필이면 왜 미국의 세계무역센터를 그 공격목표로 삼았는가, 그리고 빈 라덴이 만약 없었다면, 이 테러들은 일어나지 않지 않았을까...등등. 그리고 이 책은 그 나름의 답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마지막 질문의 제시하는 답은 이렇다.

   
  그러나 빈 라덴이 없었다면 이집트인은 단지 알 지하드에 그쳤을 것이다. 그들의 목표는 하나의 정적이었을 것이다. 많은 이슬람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을 때 그들의 목표는 민족적인 목표에 집중되어 있었고, 국제적인 지하드 연합을 창출한 것은 빈 라덴의 비전이었다. 몰락하여 사그라져 버릴 수 있었을 조직을 다시 결합한 것은 그의 지도력이었다. 수많은 살인에 뒤따르는 도덕적 논쟁에 귀를 막고 반복된 실패에 무덤덤할 수 있었던 것도 빈 라덴의 불굴의 의지였다. 이는 종교 지도자나 광인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엄한 효과를 얻을 뿐 아니라 목숨을 내거는 상상력을 부추길 수 있었던 데에는 예술적 수완도 한몫했을 것이다. (p. 486)  
   


이 책은 9.11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책이 끝나는 시점은 9.11이 발생하고 그에 대한 추적이 막 시작되며, 빈 라덴과 자와히리가 어디론가로 종적을 감춰버리는 시점이다. 빈 라덴은 결국 9.11을 일으킴으로써 그가 바라던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것은 단지 미국의 심장부를 파괴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 목표는 여러 해외에서의 테러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미국의 심장부를 공격함으로써, 미국의 거대한 보복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이슬람 세력들을 공격하게 하여, 전 이슬람적인 대항을 불러일으키는 것, 전(全) 이슬람 세력을 미국에 대항시켜 미국을 무너뜨리고 이슬람 제국을 건설하는 것, 그것이 빈 라덴과 알 카에다의 목표였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보았을 때 빈 라덴의 계획을 완성시켜준 것은 미국이었다. 여러 이슬람 세력에 거대한 보복을 행함으로써 전 이슬람 세력의 반발을 지속적으로 불러일으켰으니 말이다. 그리고 여전히 이 거대한 보복은 진행중이다. 그리고 우리도 그 한 축에 끌려들어가 있다. 아프간 재파병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가. 해답은 자명하지만, 그의 실행은 쉽지가 않다. 우리도 이 거대한 문명전쟁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의 선택은 또 앞으로 무엇을 불러일으키게 될까.

이 책 <문명전쟁>은 9.11에서 끝나지만, 9.11 이후의 세계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시점을 제공한다. 그리고 또한 이 책은 수십명에 달하는 주요 등장인물들을 책 뒤에 색인으로 제공하고 있고, 성실한 색인을 덧붙임으로써 이슬람 지하드 세력들을 이해하는 하나의 백과사전으로써의 기능도 겸하고 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한다. 분명히 기대만큼의 역할은 해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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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 강탈자 - 당신의 심장은 나의 것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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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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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0월4주

 

제작 과정에서부터 여러 관심이 갔던 영화,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가 드디어 개봉을 하는 모양이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이창동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영화라고 여러 관심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이 영화에 대한 여러 글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먼저 이창동 감독의 경우에는,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본인의 역할을 한국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도록 여러 여건을 마련해주는 입장에 한정짓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어떠한 영화이든, 영화는 결국 감독 그 자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가 감독의 어린 시절 자전적인 경험이 모티브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를 온전히 감독 자신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보육원에 있다가 외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경험은 감독 자신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그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가슴 아픈, 아니 단지 가슴 아프다는 것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런 일들이 또하나의 역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많은 아이들의 소리없는 눈물들이 이 영화의 생생한 디테일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스틸컷만 보아도 먹먹해지는 이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영화 속 아이들은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 여행들은, 또 하나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삶 속 그 어떤 부분을 건드려 줄까. 아..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 김새론의 연기는 상당한 격찬을 받고 있으니, 그 부분에 주목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빠와의 행복한 데이트를 보낸 진희는 내일이면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진희를 보육원에 맡긴 채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진희는 말도 안하고 밥도 먹지 않고 보육원을 벗어나려 저항도 해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진희는 조금씩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는데… (네이버 펌)  





 

아..그리고 이번 주에는 이 영화의 예습이 될 만한 영화를 소개하기 보다는 다음의 또다른 영화에 주목해 보고 싶다. (아...이번주는 땡기는 영화가 많다. <파주>도!) 

43년만에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되는 영화 <알제리 전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영화'라는 수식은 제쳐두고라도, 우리나라에서 43년만에 개봉되어야만 했던 이 영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한번쯤 보아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영화의 어떤 부분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을까. 운영주체가 바뀐 씨네큐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영화를 틀어준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54년에서 1962년 사이, 9년간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항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정치적 폭력행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 1957년 10월 어느 새벽, 알제리민족해방전선(Font de Lib ration Nationale/FNL) 소속의 나이 든 반군 한 명이 프랑스 부대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마지막 남은 지도자 ‘알리’의 은신처를 누설하고 만다. 은신처를 포위한 프랑스 군은 당장이라도 폭파할 태세이다. 오직 해방을 목표로 투쟁해 온 지도자 ‘알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긴 채 치열했던 지난 3년을 회상한다….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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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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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에게 묻고 싶다. 영화가 어떻게 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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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변하지 않는 건 없지요.

맥거핀 2009-10-14 23:26   좋아요 0 | URL
아..물론 그렇지만요, 예전의 허진호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조금은 달라진 영화톤이 살짝 예전 생각들을 나게 하더라구요.ㅎㅎ
 
호우시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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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허진호 감독의 장점은 그의 어떤 디테일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디테일하다'라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처럼, 영화적인 디테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표현할 마땅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디테일함', 즉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아련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정,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리는 설레임..이런 것들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나 대사들을 이용하여 잘 형상화하여 우리 눈에 드러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 지닌 장점들이었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아있어야만할 아버지를 위하여 비디오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내려가던 남자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면 먹고 갈래요?"와 같은 대사들, 혹은 <행복>에서의 산길을 걸어오다 슬며시 손을 잡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 좋은 장면들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장면의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는지 싶다. 즉, 아..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었지, 혹은 저런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라고 어느 틈에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한편의 이유는 그것이 전체적인 드라마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쪽에서 무언가(아마도 '사랑'이) 얻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한쪽에서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상실되고 있는 것을 그려내보이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그만 발걸음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봄날은 간다>에서 다가가는 한편, 동시에 멀어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서 어떤 것(순수?)을 잃어버리는 남자의 모습(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렇고), <외출>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의 집약판이라고 느껴지는 <행복>. 즉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어 내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그러나 사실 한편으로 보면 허진호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은 이 방해요소에는 왠지 상당히 초연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그렇다)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실들, 그리고 한편으로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을 잘 버무려내어 보여주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고, 그것 자체가 감독의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아마도 한국 감독 중에, 사랑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의 감정과 진행양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면 가장 잘 써낼 수 있을 듯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이라고나 할까.




근데 왠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 허진호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취하는 듯 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에 관계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면서, 즉 이야기를 초반부터 만들면서 시작하는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개인사를 보여주는 별다른 장면을 할애하지 않고, 대뜸 두보초당에서 남녀주인공을 대면시킨다. 청두로 출장차 온 동하(정우성)와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고원원). 그리고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어떤 밀고당기기(?)를 통해 관객은 조금씩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동하의 유학시절, 이미 이들은 만났던 사이라는 것, 서로 간에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여차저차첫차막차하다보니, 이들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간의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어야 했다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거의 추억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질 뿐, 정작 중요한 현재의 이야기는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감정의 파고를 급속하게 보여준 후, 다시 중간을 생략해버리고, 마무리를 제시한다.

즉 이 영화 <호우시절>이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밀도있게 쌓아나가며, 관객들에게 그 감정선을 서서히 따라오도록 했던 전작들에 비해, 중반을 넘어 갈 때까지 일종의 로맨스코미디 식으로(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녀주인공의 일종의 '사랑만들기(혹은 밀고당기기)'를 보여준 후, 정작 드라마는 후반 짧은 시간에 몰아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초중반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후반부의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동하 역의 정우성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로 감정선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정우성에게 관객을 그 감정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들이 후반부에 짧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설혹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것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이 말은 정우성의 연기 '자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의 몇몇 씬들이 - 예를 들어 정우성의 급정색 씬 같은 - 조금은 이해되지 않으며, 혹은 약간은 우스워보인다면, 그것은 감독에게 더 책임을 물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뭔가 좀 어정쩡해진 감이 있다. 어떤 잘 짜인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들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귀여운 대사들을 내뱉는, 풋풋하고 상큼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그것도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중국 청두에 대한 관광홍보물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남녀주인공의 좋은 비주얼을 감상할 그냥 눈만 즐거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이 영화에 대한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한 큰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그저 중국 청두의 멋진 풍광이나, 정우성, 고원원 그 자체의 청두라는 공간에 못지 않은 비주얼을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포스터에 박힌 '허진호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와, 그의 필모그래피들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의 그 좋은 감성들은 다 어디에 던져두고...허진호 감독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그의 필모의 정점은 여전히 <봄날은 간다>다.

(비주얼이 좋은 영화니 사진이나 많이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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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 '행복'보다 훨씬 좋았어요.^^
맑고 담백하고 아릿한 감흥이 있더군요.
화면 가득한 연초록 진초록 물빛 색감도 좋았구요.

맥거핀 2009-10-14 23: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두보초당도 그렇고, 팬더들 나오는 부분도 그렇고, 자전거 타는 장면들도 그렇고..전체적으로 자연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찍힌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살짝 관광홍보물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요.)
저도 개인적으로 맑고 담백한 감성은 느꼈지만, 너무 맑고 깨끗하다고나 할까요..그래도 허진호 영화의 몇몇 인장들은 여전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