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푸른 바다로, 보리스 바르넷, 1936

 

 

 

정복자 펠레, 빌 어거스트, 1987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올해도 어김없이 열리고 있는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올해 소개될 100편의 시네마 오딧세이 중 한 편인 보리스 바르넷 감독의 1936년작 <저 푸른 바다로>와 장준환 감독이 추천한 빌 어거스트 감독의 1987년작 <정복자 펠레>를 보았다. 특별히 그럴 의도는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 <저 푸른 바다로>를 유토피아적인 세계로만 소개한 것으로 볼 때도 그렇지만 - 보고 나니 두 편의 영화가 묘하게 연결이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주 단순하게만 말하자면, 이 두 편의 영화는 바다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저 푸른 바다로>는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시종일관 거칠게, 또 때로는 아름답게 일렁이는 바다가 매우 인상적이며(표현 기법 면에서도), <정복자 펠레>는 바닷가 주변의 어느 농장의 이야기로서, 중간중간 그들을 위협하는 존재로서(바다에서 얼어죽은 사람들, 난파한 선원들) 바다가 등장한다. 그리고 <저 푸른 바다로>는 바다에서 난파하지만, 도리어 유토피아적 공간에 도착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게 되는,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다시 그 공간을 떠나 자신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기 위해 바다로 나아가는 두 선원의 이야기이고, <정복자 펠레>는 힘들게 바다를 건너 아무도 그들을 반겨주지 않는 외로운 땅에 도착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 다시 거친 바다로 향하는 아들로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다. 즉 이 두 영화의 주인공들은 모두 바다에서 귀환하여, 미지의 공간에 도착하지만, 결국 다시 바다로 나아가며 이야기가 끝난다. 다만 그 미지의 공간이 일종의 유토피아인가, 아니면 또다른 지옥인가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층 더 생각해보면 이 두 영화를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 있는 또다른 지점이 존재하는 것 같다. 영화 속에서 정확한 배경이 제시되지 않아 추측해 볼 수밖에 없지만, <정복자 펠레>는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덴마크 바닷가 어느 농장을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19세기 스웨덴에는 기근이 만연했고, 아버지 라세(막스 폰 시도우)와 아들 펠레(펠레 베네가아르드)는 먹을 것과 살 방도를 찾아 무작정 바다를 건너 덴마크로 온다. 배 안에서 펠레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일을 안해도 살 수 있으며, 버터를 빵에 발라먹는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는 말을 듣지만, 아무도 데려가려 하지 않는 그들에게 스톤 농장 관리인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을 합쳐 1년에 100만 크로네를 주겠다."라는 제안을 하고, 그들이 살 곳을 안내 받는다. 그들이 이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수락하고, 앞으로 살게 될 마구간 문을 열어보는 영화의 짧은 순간, 그들에게 펼쳐질 고난은 불을 보듯 뻔해지고, 영화의 모든 내용은 거의 결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어진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이 시기, 산업혁명이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으로 믿어진 시기이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스톤 농장은 거의 중세의 어느 시점에 정체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말로는 고용되어 있다고 하지만, 아버지 라세와 아들 펠레는 거의 노예에 가깝게 일을 하며, 그것은 이 농장에서 일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크리스마스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겨우 식은 청어만을 먹는 인간 이하의 삶을 이어가며, 그 와중에도 라세와 펠레는 끊임없이 자존감을 유지하려 애쓴다. 호색한 농장주와 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하는 부인은 이들과 거의 완전히 분리되어 있으며, 이들과 농장주 부부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로서 탐욕스럽고, 거친 농장관리인과 차갑고 펠레를 괴롭히는 수련생(관리인 수련생)이 등장한다. 이들 중간관리인의 존재는 영화 내내 꽤 인상적인데, 그것은 중세 이후부터 영주가 농노들을 관리하는 방식인 중간 관리인, 마름의 존재를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즉 중세 이후부터 근대,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조직의 최고 우두머리는 결코 직접 나서지 않는다. 그들은 뒤에서 은밀하게 지시하며, 모든 상황이 마무리 된 이후에만 등장한다. 농노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그들을 괴롭히는 것은 지시를 받은, 그리고 항상 지시 이상의 것을 해내는 중간관리인이었고, 영주는 그 중간관리인만 적절히 이용하면 되었다. (도리어 농노들에게 직접 위해를 가하는 영주는 이상한 취급을 받았으며,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더' 이상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는가.)

 

영화 속에서도 이와 연관된 장면이 몇 번 등장하는데, 호색한 농장주의 아이를 내세우며 돈을 달라고 말하는 거지 여자를 관리인이 힘겹게 몰아낸 후에야, 모든 상황을 먼 창문으로 관찰한 농장주가 느긋하게 등장하는 장면이라든가, 관리인의 일방적 지시를 더 이상 견디지 못한 에릭을 위시한 일꾼들이 일종의 봉기를 일으키는 장면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작은 봉기는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봉기의 규모가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타겟은 중간관리인이지 그 뒤에 숨은 농장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중간관리인 이상의 것, 즉 농장과 연관된 커넥션 자체를 이겨낼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 커넥션은 미카엘 하네케가 <하얀 리본>에서도 잘 보여줬듯이 농장주(영주)-목사-학교로 이어지는 커넥션이다. 즉 농장주는 돈으로 이들의 현재를 관리하고, 학교는 그들의 미래(자식)을 담보하여 관리하고, 목사는 하느님으로 그들의 내세를 관리한다. 그러니 그것을 모두 지켜본 펠레가 결코 수련생이 될 수는 없었다.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 그가 아무리 잘된다고 하더라도, 그의 위치는 봉기에 나서다 바보가 된 에릭을 어딘가로 몰래 데려가 버리는 관리인의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다.

 

자..그럼 이제 그는 어디로 갈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서부터다. 그는 바다를 건너 어디로 갈 것인가. 당시의 청년들에게는 그다지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미국의 자유주의, 혹은 자본주의, 러시아를 필두로 한 공산주의 혁명, 제국주의의 전쟁들에의 투신, 혹은 지독한 파시즘. 물론 그 세계 중의 하나는 보리스 바르넷이 <저 푸른 바다로>에서 그려내려고 한 유토피아, 즉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다. 이 영화 <저 푸른 바다로>는 소비에트가 탄생하고,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1930년대의 어느 집단농장이 배경인 것처럼 보인다. 즉 이 유토피아는 그들이 유토피아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리고 믿고 싶었던 그런 공산주의 유토피아다. 보리스 바르넷은 이 영화에서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대한 선전, 의식고취와 약한 비판의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예를 들어 집단의 가치와 개인의 가치 속에서 개인적 가치를 추구하는 개인을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면서도(농장의 유일한 기술자인 알료샤가 자리를 비운 것에 대한 비판, 서로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가 가장 소중한 것을 잃어버릴 뻔한 두 선원 알료샤와 유수프), 이러한 집단주의의 추구에 우스꽝스러운 시선을 내비치기도 한다(싫다는 유수프에게 억지로 옷을 입히는 농장 사람들). 또한 태평양 전쟁에 참가한 남자를 기다리는 여자를 그려내고, 결국 (영화의 전체적인 내용이 의미가 없어지는) 그녀의 뜻을 따르는 두 남자의 모습은 일종의 프로파간다적 뉘앙스를 풍긴다. 그러므로 이들이 이 집단농장을 떠나 고향으로 가겠다며 다시 바다로 향하는 이 결말은 체제에 대한 비판인것도 같고, 체제선전인 것도 같은 묘한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공업화 정책, 집단 농장화 시기는 흔히 공산주의 혁명이 변질되어, 소비에트가 망가지기 시작하는 시기로 불리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몇 가지 키워드들은, 계획경제와 공업화, 농업 집단화로 시작되어 대기근과 대숙청으로 마무리된다. 스탈린 시기 소비에트 연방에서 죽어나간 소련 사람들이 500-600만명 정도로 추산될 정도로, 이 시기의 소비에트 연방은 그렇게 유토피아라고 불릴만한 곳은 아니었다. 대외정책으로 볼 때도, 소비에트 연방은 영토에 대한 욕심을 공공연하게 드러냈으며, 파시즘의 독일과 독소불가침 조약을 맺었고, 독일이 폴란드에 침공할 때, 소련은 핀란드를 침공하였다. 그러므로, 이 당시 스탈린에 반하는 공산주의 청년들을 실망시킨 것은 스탈린이 아니라 도리어 그 혁명을 열성적으로 일궈낸 그들 자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이러한 세계를 만들어내자고 혁명을 하였던가?

 

그러므로 펠레는 어디로 갈 수 있을 것인가? 펠레는 사람들을 구획을 지어 분리시키고, 가장 약한 자를 짓밞아 무너뜨리는 중세 봉건주의와 근대의 경계선을 보았다. <하얀 리본>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정복자 펠레>의 농장과 주변의 아이들은 펠레나 후트와 같은 자신들과 다른 것으로 믿어지는 가장 약한 자를 배제하고 먹잇감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이 파시즘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하얀 리본>은 숨막히게 드러내보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다른가?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그렇다면 가장 약한 자들을 보호하는 사회인가? 앞에서 이야기한 스톤 농장의 모습들은 현재의 자본주의, 그리고 스탈린 이후 공산주의 사회에서도 그대로 반복된다. 죽어나간 것은 늘 가장 약한 사람들이었다. 그것은 똘똘 뭉쳐 스웨덴에서 온 가장 가난한 소년인 펠레를 배제하는 마을 아이들의 모습에서 상징되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약하거나 다르게 보이는 자들은 늘 타겟이 되고, 지배층은 이를 교묘히 이용한다. 지배하는 자들은 밑의 사람들을 구분짓고, 서로에 대한 반감을 더 부추겼다. 그런 부추김으로 중산층은 늘 최상층보다 빈곤층을 두려워하며, 자신들이 가진 조그만 것마저 잃어버릴까 두려워한다. 그리고 스웨덴과 덴마크의 반목을 이용하듯이, 지속적으로 외부의 더 큰 적을 만들어내고, 지배당하는 자들에게 우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뭉쳐야 한다고(그러니까 우리 지배층에게는 그만 관심을 끊으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최후에 가족을 내세운다. 가진 자들만 자신의 가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니까. 없는 자들일수록 믿는 것은 가족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가족은 이들의 최후의 아킬레스건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반복적으로 가족의 가치를 강조하며,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그리고 이 반복된 효과는 결정적일 때 빛을 발한다. 그들은 억압된 가난한 사람들이 일어나려 할 때마다 최종적으로 가족을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한다. 가족들 봐서라도, 그러면 되겠어? 펠레도 고민한다. 아버지가 이토록 좋아하시는데, 수련생의 하얀 옷을 입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그러나 펠레는 아버지 때문에 주저앉지 않았다.

 

노예로 살 것인가, 아닌가? 제기되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 질문마저도 우리는 답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도리어 쉽다. 여기에 펠레는 답했고, 바다로 나왔다. 그러나 대답하기 어려운 문제는 그 다음이다.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바꾸자면 이 영화들에서 우리는 어떤 대중을 보아야 하는가. 그 대중은 <정복자 펠레>에서 펠레가 스웨덴인이라고 채찍질하고 놀려대는 그 대중이기도 하고, 같이 흥겹게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는 대중이기도 하고, 좌초될 뻔한 선원들을 구해내는 대중이기도 하고, 동시에 농기구를 들고 중간관리자에게 나아가는 대중이기도 하다. 동시에 <저 푸른 바다로>에서 거친 바다에서 서로를 도와가며 열심히 물고기를 잡는 대중이기도 하고, 동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대중이기도 하고, 유수프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헹가래를 치며, 억지로 양복을 입히는 대중이기도 하다. 이 대중들이 만들어낸 여러 매우 다르지만, 또 조금은 비슷해보이기도 한 세계들. 자본주의, 공산주의 혁명, 파시즘. 우리는 지금 어떠한 사회로 나아가고 있는가. 이 사회들에서 수많은 펠레들에게 우리는 버터를 바른 빵을 내밀 수 있는가. 여전히 잘 모르겠다.

 

 

덧.

물론 <정복자 펠레>는 성장드라마의 측면에서 보아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감탄한 것은 이야기의 흐름이 고조와 이완이 적당히 반복되어 끊임없이 리듬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그러면서도 그것이 단순한 지루한 반복으로 그치지 않고, 결론적으로 최종의 메시지에 다가간다는 점일 것이다. 장준환 감독이 이야기한 스토리텔링이라는 측면에서 본 이 영화의 가치나, 캐릭터와 이야기에 집중하는 말 그대로의 '영화'에 가까운 이야기라는 데에도 기꺼이 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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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2-22 2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킥이 안하니까 뭔가를 끄적거리게 되는군...

네오 2012-02-23 12:17   좋아요 0 | URL
어~ 그거 어떻게 끝났어요?

맥거핀 2012-02-24 12:11   좋아요 0 | URL
아직 안 끝났어요. 이번주는 내내 스페셜방송이라는 명목으로 때우는 중...;

꽃도둑 2012-02-28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으면서 이거 동물농장 냄새가 나는걸 그러다가,,,
주체와 객체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게 만들고... 국가의 체제라는 것이 곧 폭력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선 가장 약한 자는 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보게 되네요.
스스로를 보호하려면, 노예로 살지 않으려면 '저 바다 넘어'를 사유하듯 체제를 전복하고 상황을 역전시킬 만한 혁명 같은 역동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네요..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좋은 영화 같아요..^^

맥거핀 2012-02-28 16:55   좋아요 0 | URL
자본주의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약한 자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다른 많은 사회들에서도 가장 먼저 희생당한 것은 늘 약한 자들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의 상당수의 혁명들이 결국 어떠한 것을 불러왔는가는 많은 역사에서 증명이 되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혁명이라는 것의 가치와 의의를 부정하는가...는 아니구요. 다른 방식의 혁명, 다른 의의의 혁명을 생각해봐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