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례자
파울로 코엘료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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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헌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이것조차 소설의 일부일까. 아니면 정말 진실함이 묻어난 헌사일 뿐일까. 책의 첫장은 보통 "...에게 바칩니다"라고 간략히 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파울로 코엘료는 헌사를 한 장 반이나 작성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 때문에 구구절절하게 적어야 했을까. 

헌사를 보면 십 년 전, 영적 탐색을 목적으로 한 순례의 길에 대한 후회가 담겨져 있다. "시간 낭비"라는 단어를 써 가면서. 람이라는 단체를 떠날 생각까지 했던 그에게 마스터는 순례의 길을 추천했는데, 그 길에서 페트루스를 만났다. 그리고 처음의 후회와는 달리 그 깨달음의 의미를 알게 되고 쓴 책이 출판되었을때 페트루스는 연락을 거절했다. 의도적인 것인지 아니면 그저 세월의 힘에 못이겨 연락이 끊긴 것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저자는 이 책을 그에게 바친다고 말한다. 그 이야기가 장장 한장반이나 되는 페이지 속에 설명되어져 있다. 그래서 이 헌사가 진짜인지 아닌지 헷갈린다고 말하는 것이다. 

순례자의 길은 고난와 가난이 함께 하는 길이다. 알고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 깨닫고자 떠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인공은 처음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그저 칼을 찾기 위한 목적성 여행을 떠났으며 그것으로 인해 여행길이 내내 짜증스러웠다.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당신은 죽을 때까지 아주 사소한 결정 하나라도 당신 인생에 관해 다른 사람이 결정하도록 용납할 사람이 아니에요."라는 아내의 말을 빌어 보더라도 그가 얼마나 고집스러운 사람인지 우리는 알 수 있다. 

"로마의 방랑자"라고 불리는 성 베드로의 무덤으로 가는 길, "수상가"라고 불리는 예수의 성묘로 향하는 길, "순례자"라고 불리는 사도 야고보의 성 유골에 이르는 길. 이 세가지 순례길 중에 그는 순례자의 길을 택했다. 그 길을 걷는 동안 그의 머릿속은 온통 검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그 본질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었다. 검은 하나의 결과일 뿐인데, 그는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여행길에 올랐다. 그리고 그 길에서 깨달음을 발견해냈다. 순례자의 길이 그를 변화시킨 것이다. 기적에 가까운 깨달음은 아니었지만 그는 이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의 삶은 같아 보이면서도 결코 같지 않아졌다. 이것은 진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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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클라베
로베르토 파치 지음, 전영미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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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lave. 콘클라베는 "열쇠로 잠긴 방"이라는 뜻이다. 라팅어로, 가톨릭 교회의 교황 선출 선거 방식을 의미하며 선거에 참여하는 추기경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선거를 진행한다.  이미 콘클라베는 대중들 앞에 많이 드러나 있다. 여러 작가들에 의해 소설화되고 영화화 되었기 때문이다. 굴뚝으로부터 흰연기가 나올때까지 수차례 계속되는 검은 연기의 향연. 그 지루함이 끝나고나면 가톨릭은 가장 지지받는 수장을 얻게 되는 것이다. 

흔히 종교라고 하면 순교와 희생, 봉사를 떠올리기 쉽상이지만 이젠 종교도 정치권력이 배여있는 집단임을 어른이 되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사람들의 모임 속에는 반드시 그 권력구도가 생성되며 종교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른이 되어 있다. 

로베르토 파치의 소설 [콘클라베] 속에서도 역시 그러하다. 가장 희생적이면서 믿음,소망,사랑을 실천할 하나님의 숭고한 종을 뽑는 의식이 아니라 저마다 자신들의 이권을 행사할 수 있는 추기경을 천거하고 반목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었다. 이래서는 새 교황의 선출을 알리는 하베무스 파팜이 공표될리 없었다. 

127명의 추기경들이 모두 투표를 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그럴 수 없는 것이 80세 이하의 추기경들이 모이다보니 건강상의 이유를 핑계로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인원들도 속출했다. 124명이 투표해 참석했던 11회차 투표 결과도 무산되면서 12회차 투표를 준비하던 추기경들은 서서히 지쳐가기 시작했다. 반드시 이탈리아에서 교황이 선출되어야 한다며 신경질적인 반응을 해오던 알폰소 체리니 밀라노 대주교나 교회에서 반대하는 마술에 심취한 레오폴드 탄자니아 주교, 회의에 불참하곤 하는 압둘라 조셉 레바논 주교 등등 많은 개성있는 대주교들이 모인 가운데 의견일치의 길은 멀고도 험해 보였다. 

하지만 콘클라베 도중 이상현상들이 계속되고, 결국 투표절차 없이 만장일치로 에토레 말베치 토리노 대주교가 교황으로 선출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작가는 기적같은 장면을 상상했었던 것 같다. 투표도 없이 모두의 마음에 신심이 일어 동의하는 장면. 하지만 반대로 그 장면이야말로 글로 읽는 순간 가장 모순된 장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시종일관 지루하게 이어지던 콘클라베의 끝이 결국 이렇다니...허무감까지 밀려왔다. 댄 브라운 식의 종미를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좀 더 숭고한 결말을 기대했었는데, 역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기에 작품에 대한 실망이 밀려온 것이 아닌가 싶다. 

하지만 여자로서는 절대 알 수 없을 콘클라베에 대한 좋은 지식들을 이 책을 통해 얻는다. 그리고 상상해 본다. 상상이 진실과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는 미지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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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번 교향곡
조셉 젤리네크 지음, 김현철 옮김 / 세계사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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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신이 인류에게 저지른 범죄가 있다면
그것은 베토벤에게서 귀를 빼앗아간 일이다."
                                                                    -로맹롤랑-

그가 청각을 잃었기 때문에 악성이 더 뛰어나졌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몇 번 쯤은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다. 장애가 있어도 뛰어넘을만큼의 천재라면 정상적인 귀를 가졌을때엔 얼마나 더 대단한 것들을 토해낼 수 있을 것인지는 간과해버린 어리석음 때문이다. 우리는 곁에 있는 것의 소중함은 늘 모른다. 눈으로 보면서, 귀로 들으면서, 코로 맡으면서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먹고 마시면서 느끼는 감정들과 느낌들이 예술가들에겐 그저 지나치는 하루의 일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런 공감각적인 기능들이 그들의 예술혼을 불태운다는 사실을 평범한 사람들이 알리가 없다. 그런데 그는 귀를 거세당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음악을 들을때마다 애잔하다. 

조셉 젤리네크는 후작 [악마의 바이올린]을 통해 알게 된 작가였다. 하지만 그 작품보다 전작인 [10번 교향곡]이 훨씬 더 흥미롭다. 지루한 부분도 없을 뿐더러,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한 모르는 이야기가 뇌를 자극시킨다. 

베토벤. 그의 불행한 일생에 대해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위인전을 통해서, 각종 책과 영화를 통해서도 알려졌던 사생활. 하지만 정작 알려진 것에 비해 너무나 많은 것들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도 미스테리한 일이다. 그 많은 여인을 사귀었으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의 불멸의 연인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어쩌면 단 하나의 인물이 아닌 여러명일지도 모를 그녀 또한 그녀를. 게다가 그의 조카가 그의 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설은 이젠 설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그 가설을 믿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렇게 잘 알려진 한 작곡가의 삶에 어떤 흥미로움이  더 있다고 조셉은 그를 모델로 삼았을까. 

그는 "누구를"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을 목표로 했기에 성공한 셈이다. 그의 10번 교향곡. 그것을 둘러싼 비밀과 진실에 관해서. 우리는 이쯤되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의 음악에 대해 우리가 아직도 모르는 것이 남아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책 속으로 고개를 파묻게 된다. 푸욱-.

서른 다섯의 다니엘 파니아구아는 역사음악학 교수이며 베토벤이 전공인 사람이다. 그의 논문은 언제나 베토벤을 향해 열려 있고, 이번 사건 또한 베토벤이 연류된 사건이기에 그는 뛰어들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 이 소설에서 베토벤이 프리메이슨이였는지 일루미나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누구를 위한 작곡이었는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10번째 교향곡의 원본이 존재하는지 그리고 누구의 손에 있는지가 범인을 찾아내는 것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사실 베토벤을 좋아하지 않거나 음악에 조예가 깊지 않더라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장치들이 책 속에는 가득했다. 살인사건이나 사라진 악보를 찾는다는 설정은 목마른 미스터리를 채우기에, 애너그램과 알베르티의 암호바퀴,트리토누스는 지적호기심을 채워줄만 했다.

흔히 음악은 시와 결부시키지만  소설 속에서 음악은 하나의 약속이고 수학이었으며 문학이엇다. 그것이 아주 특별하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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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미스 프랭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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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코스에 악마가 나타났다. 이방인이라는 이름으로.
죽은 남편으로 인해 산 사람은 물론 죽은 사람에게까지 통찰력이 미치는 늙은 베르타.
그녀는 남편이 말한대로 언제나처럼 언덕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드디어 악마가 나타났다. 매우 젊고 핸섬한 남자의 모습으로.

우리가 유혹은 받게 되면 결국 그 유혹에 지고 만다는 것을 발견했소

마을 안에선 젊은 샹탈에게 접근해 온 악마.  악마의 유혹은 CF에서처럼 커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인간 본성에 관한 진실을 알려주겠다고 귓가에 속삭이면서 그는 그녀를 그리고 마을 전부를 유혹해대고 있었다. 그녀도 처음에는 솔깃했다. 그녀가 익숙해져 있는 그 모든 결핍. 삶은 그녀에게 늘 불공평한 것이었는데, 그것을 뒤바꿀 수 있는 부를 그가 약속했으니.

사람들은 모든 것을 바꾸길 원한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것이 변함없이 지속되기를 바란다

로또보다 더 당첨확률이 확실한 이방인의 제안은 "사흘 안에 마을 안의 누군가를 살해하라"는  것이었다. 그들 중 단 한 명. 제물은 단 하나면 족했다. 시험에 빠진 마을은 순식간에 소돔과 고모라처럼 변해갔고,  "한 사람의 희생이 전 인류를 구원했다"는 신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화약고에 붓는 기름이 되어 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희생자찾기에 골몰하기 시작했다.

자기 권리를 주장하기 보다 그냥 물러서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니까

중국인들은 악마를 이미 죄값을 치른 영혼이라고 일컫는다고 했다. 이방인은 이미 죄값을 치른 영혼이 맞는 것일까. 그의 말에 흔들렸던 샹탈은 마을 사람들이 늙은 베르타를 제물로 고르자 대항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부당함에 맞서 싸우기 보다 모욕을 택한 어느 비겁한 사람의 일화처럼 단호한 입장을 취하기르리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나 그냥 물러서는 것이니까. 그게 더 쉬운 일이니까.  쉬운 일이 아닌 옳은 일을 택한 샹탈에겐 악마가 약속했던 금이 주어졌고 마을은 다시 예전처럼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돌아가고 있다.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악마는 정말 외부에서 온 것일까. 혹시 그들 안에서 세상밖으로 나왔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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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밤의 기적
마르코 레이노 지음, 이현정 옮김 / 옥당(북커스베르겐)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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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크리스마스만을 위해서 살 수는 없다.

하지만 365일 중에 단 하루, 그날만을 위해 사는 사람이 있다. 산타클로스.
어린 시절엔 그를 믿다못해, 꾸벅꾸벅 졸면서도 기다리곤 했는데, 어른이 되면서 그의 이름은 서서히 잊혀졌다. 하지만 이 소설은 산타클로스를 우리곁으로 다시 데려다 주었다. 

잘 있어, 우리집!!
어린 니콜라스가 집을 떠나게 된 이유는 혼자 남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일곱 살 인생에 니콜라스는 처음으로 혼자가 되었다. 바다는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있는데, 하나는 아름다운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아주 잔인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 바다의 잔인함이 니콜라스의 가족을 삼켜버렸다. 엄마와 아빠 그리고 여동생 아다까지.

아주 작고 가난한 어부 마을, 크로바요키.
삶이 넉넉치 않았지만 마을 사람들은 번갈아가며 니콜라스를 1년씩 돌보기로했다.  마을사람들은 니콜라스를 사랑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크고, 제일 사랑하는 것을 잃은 니콜라스는 좀처럼 마음을 열지 않았다.  1년을 머물던 집을 떠나게 되면서 니콜라스는 그 집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것이 시초가 되어 그는 매년 아이들을 위해 선물을 만들었고, 그 선물들은 크리스마스 이브에 집 앞에 전달되었다. 이런 니콜라스를 도운 사람이 함께 살게 된 이사키 아저씨였다. 그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니콜라스와의 생활로 달래고 있었다. 슬픔이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니콜라스가 떠났지만 크리스마스 선물은 아이들에게 배달된다. 그의 따뜻한 마음과 정신이 남아 마을에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코르바요키 마을 전체가 니콜라스의 가족이 되어 있었다.  유년시절 우리 곁을 떠났던 산타클로스는 이렇게 어느새 우리 마음 속에 되돌아와 있었다. 따뜻한 마음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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