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나아줌마가 들려주는 아프리카 옛이야기
씨나 믈로페 지음, 조선정 옮김, 레이첼 그리핀 그림 / 북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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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하면 가장 먼저 서양을 떠올리게 되는 사람은 비단 나뿐일까?

가까이는 아시아 국가도 있을 테지만 굳이 우리 머릿속에는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의 눈 파랗고 얼굴 하얀 사람들이 왠지 외국인의 전형으로 느껴진다. 아마도 학창 시절 세계사 시간에 서양 열강 중심으로 배웠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언젠가부터 내게 검은 대륙 아프리카가 친숙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비야의 책을 읽고 기부를 시작한 지가 벌써 만 5년이 넘었단다.(구호센터에서 알려줬음) 우리가 후원하는 두 아이는 모두 아프리카에 살고 있다. 부끄럽게도 돈만 내고 아직 편지는 한번도 써보지 못한 건조하기 짝이 없는 후원자이지만 이것이 계기가 되어 아프리카라는 대륙은 늘 내 관심을 끈다. 이영희 PD가 쓴 <헉!아프리카>도 그래서 얼른 집어들고 읽었었다.

 

아프리카 각 나라별로 전해내려오는 이야기들을 한데 묶은 책이 여기 있다. 사실 이 책이 아동을 대상연령으로 한다는 것도 모른 체 냉큼 골랐는데 아이와 부모가 같이 보기에 손색이 없다. 어느 나라(민족)나 그렇듯 옛이야기(설화)에는 그 나라만의 고유한 풍습 뿐만 아니라 그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묻어있기 마련이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의 특성상 구조가 단순하고 내용은 비현실적이지만 그 뻔한 형식과 내용의 이면에는 더 많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권선징악적 주제는 어디나 똑같지만 착한 사람 복받고 못된 사람 벌받는다는 이 단순한 교훈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가슴에 새겨야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기대했던 것만큼 아주 많은 이야기가 실려있지는 않았지만(아동 대상이니 당연한 노릇이다.) 우리가 잘 몰랐던 아프리카 각 나라의 이야기들이 참 유익하고 재미났다. 그나마 이름을 자주 들었던 나라의 이야기가 나오면 얼씨구나 반가웠지만 내가 아는 건 딱 나라 이름뿐이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아프리카 대륙 지도가 펼쳐진다. 나라별로 이야기가 진행될 때마다 다시 맨 앞으로 책장을 넘겨 위치 확인하기를 여러 번. 그러는 과정에서 아프리카와 더더욱 가까워진 느낌이었다.

 

아프리카는 수많은 종족이 살고 있는 대륙이지만 지도를 잘 살펴보면 특이하게도 국경선이 자를 대고 그은 듯 반듯반듯한 곳이 참 많다. 이게 다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의 짓(?)이라고 어느 책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그 책은 아마도 이원복의 <먼나라 이웃나라>인 듯하다). 그래서 아프리카는 식민지 시절의 아픈 상처가 참 많은 곳인데 유일하게 식민지가 되지 않았던 곳이 에디오피아라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아프리카의 옛이야기에 너무나 어울리는 일러스트도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었다. 일러스트 작가 레이첼 그리핀이 아프리카 여행을 하며 직접 모은 천과 단추, 장식물로 꾸민 일러스트는 색감이나 문양들에서 절로 아프리카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야기마다 거기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도 좋았지만 면지의 문양들이 참 인상깊었다. 이야기에서도 소개된 아난세(가나 편)의 형상을 본뜬 문양이었는데 아난세는 커다란 배를 가진 거미인데 아프리카의 옛이야기에 자주 등장한다고 한다.

 

최근 얼마 전부터 아시아 주변국이나 아프리카에 관심을 많이 두고 있어서 골라본 책이었는데 동화책 형식임에도 불구하고 어른인 내가 봐도 읽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누군가는 글로벌시민이란 막대한 자본력을 갖추고 가난한 나라를 손에 쥐고 흔드는 사람으로 착각하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진정한 글로벌이 되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민족과 국가, 또 그들의 전통과 풍습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기반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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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마지막 저녁 식사 - 살아가는 동안 놓쳐서는 안 되는 것들
루프레히트 슈미트.되르테 쉬퍼 지음, 유영미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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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피스. 죽음을 앞둔 환자에게 연명의술 대신 평안한 임종을 맞도록 위안과 안락을 최대한 베푸는 봉사활동. 또는 그러한 시설.

'등대의 불빛'이라는 뜻의 로이히트포이어 호스피스에는 특별한 요리사가 있다. 루프레히트 슈미트. 그가 호스피스에서 인생의 마지막을 앞둔 '손님'들을 위해 일하는 모습을 다큐멘터리로 제작된 이야기를 책으로 엮었다.

 

루프레히트는 아침마다 병실을 돌면서 먹고 싶은 음식이 있는지 묻는다. 사실 그곳 사람들은 그다지 배고프지 않다. 먹는다 하더라도 소화시킬 힘이 없어 토해내기 일쑤다. 하지만 먹고 싶은 음식을 기억해낸다는 것은 마지막 순간을 앞둔 그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다. 먹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인 행동일 테니까 말이다.

 






p.102
 
"먹는다는 건 살아있다는 증거예요! 먹을 수 있는 한 숨을 쉬고 자신을 느낄 수 있죠. 먹는 것은 우리 실존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예요."



  





p.142
 
스스로 무엇을 결정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죽음을 앞둔 이들의 자존감을 북돋우는 경험이다. '무엇을 먹을 것인가'는 다른 사람의 뜻에 따르지 않고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마지막 위안이다.



 

하지만 루프레히트가 호스피스 입주민들에게 위안을 준 방식은 음식 대접뿐만이 아니다. 그의 기억에 남아있는 핀란드 출신의 노부인과의 사연은 참으로 감동적이다. 그 부인은 호스피스에 들어올 당시 정맥주사로만 영양을 취했고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그녀를 위해 자신이 해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자 너무나 아쉬웠다. 그는 실패와 노력 끝에 노부인에게 '핀란드 탱고' 음악을 담은 시디를 선물했고, 그 음악의 연주자가 마침 그 노부인이 좋아하는 연주자였던 것이다. 너무나 감동한 노부인은 친구를 통해 구한 핀란드 술을 요리사에게 선물하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며칠 뒤 그 노부인은 세상을 떴지만 인생의 마지막 순간 자신의 추억을 들추어 낼 수 있는 음악을 들으며 행복해했을 그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했다.

 

어떤 면에서 호스피스에서 요리사는 단지 음식을 만들어주는 사람만은 아닌 듯하다. 음식을 통해 그동안의 삶을 돌이킬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그보다 더 행복한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것은 꼭 음식이 아니라 음악이나 향기, 또는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라도 충분할 것이다. 이 요리사는 자신이 대접하는 음식이 하는 입주민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태도는 참 다양하다. 초연한 사람, 우울해하는 사람, 격하게 분노하는 사람, 냉담한 사람, 블랙 유머로 일관하는 사람, 냉소적인 사람.

그곳에 머무는 '손님'들과 그 가족들의 면면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내가 호스피스의 '손님'이 된다면 어떤 사람이 될까. 요리사 루프레히트는 이 곳에서 수년간 일하면서 죽음을 앞둔 사람들을 숱하게 보아왔다. 또 아침이면 촛불이 켜져있는지를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일 정도로(촛불이 켜져있으면 간밤에 세상을 등진 누군가를 추모하기 위한 뜻이다) 죽음을 맞이한 사람도 숱하게 보아왔다. 나처럼 그도 죽음 앞에서 어떤 감정이 될지 상상해보기도 한다.

 





p.68
 
"때로 나는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지 상상해보려고 해요. 하지만 상상은 한계가 있어요. 그건 그냥 상상일 뿐이죠. 사색에 불과해요. 나는 그럴 경우 공황 상태에 빠지는 대신 침착하길 바라죠. 모두가 그러기를 바라겠지만요."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생명이 언제가 다할 것이라는 생각을 까맣게 잊고 산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최근에 읽은 책을 통해 나는 생명을 부여받고 삶을 산다는 사실에 격하게 감사했다. 나를 포함해서, 자신의 삶에 늘 100% 만족하며 사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누군가 지금 당장 내게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감사하게도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만큼 내가 누리고 있는 삶에 상당 부분 만족하고 살고 있다. 마치 이것이 영원할 것처럼 말이다. 인생의 유한성을 자각하고 산다면 감사하는 만큼 1분 1초에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

 





p.120
 
우리의몸 속에 어느 날 멈춰설 게 분명한 시계가 째깍거리고 있지 않는다면 인생은 지옥일 거예요.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삶의 의욕을 느끼지 못할 것 같아요."



 

 이쯤 되면 궁금해질 것이다. 요리사 루프레히트가 어떤 사람인지. 입주민과 그 가족들을 대하는 그의 섬세한 배려심은 너무나 감명 깊다.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속칭 '잘 나가는' 요리사인 그가 돌연 호스피스에 자리잡은 까닭이 무엇일까. 책을 읽는 내내 그가 호스피스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너무나 궁금했다. 아주 짧게 언급되었지만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했던 루프레히트의 배경에는 부모님의 훌륭한 가르침이 있었다 

 





p.168
 
루프레히트는 동료가 실수하면 속으로 비웃고 고소해하는 것이 어째서 가장 큰 즐거움처럼 되어 있는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째서 손에 손을 맞잡지 않고 서로 적대적으로 일을 하는가.



  





p.170
 
"어릴 적 남을 밟고 성공하는 건 좋은 일이 아니라고 배웠어요. 싸우고 다투면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요. 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어떤 투쟁의 파편 없이 전진하는 것! 그것이 젖먹이 시절부터 부모님 집에서 내면화한 태도였어요."



 

 책 내용이 워낙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를 경건하게 생각하게 만들다보니 아이가 잠자는 밤시간에 읽느라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마치 내가 죽음을 앞두고 있는 것마냥 지금 내게 주어진 1초의 시간도 헛되이 쓰면 안 될 것만 같았다. 아무도 자신의 생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한다. 내가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 며칠을 더 살지는 신의 손에 달려 있는 것. 어쩌면 그래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삶이 영원할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은 교만일지도 모르겠지만 삶의 끝이 언제인지 안다면 그것만큼 긴장감 없는 드라마가 있겠는가. 언제가 끝인지 모른다는 것은 당장 내일이라도 끝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매 시각 최선을 다해 나를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삶을 충만하게 가꾸어야 한다. 너무 식상한가?  하지만 늘 그렇듯 진리는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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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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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령의 전작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올 가을 쯤에 읽었었다. 세칭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어령이 딸의 영향으로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담은 책이었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 종교에 귀의하게 된 그 속사정이 궁금하여 아버님께 권하시는 책을 받아들었었다. 사실 이전까지 읽어본 이어령의 책이라곤 <젊음의 탄생>이 유일했다. 만족도가 썩 높지는 않았지만 그 책을 읽고서야 왜 사람들이 이어령, 이어령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독서량도 많고 박학다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걸 계기로 이어령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번에 나온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도 그래서 손이 가게 되었다. 더군다나 제목에서 주는 느낌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제목에 낚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실 엄마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고향이자 생명의 근원인 엄마라는 존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특히 나는 10년 전 엄마가 돌아가셔서 그 그리움의 깊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제목에 엄마와 관련된 단어가 포함되면 여지없이 집어들게 된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1장이 바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이다. 다음 장에서는 작가의 사색이 담긴 글들, 문학인으로서의 회고, 라디오에서 한 인터뷰 전문이 이어진다. 작가가 열한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무척 애틋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들이 내 마음을 후벼팠다. 1930년대 출신인 작가가 말하는 어릴 적 고향 모습과 경험들은 요즘 사람들에겐 좀 낯설 수도 있겠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오히려 익숙했다. 특히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 갔던 외갓집 부근의 풍경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우리 외갓집 풍경과도 닮아있었다. 이제는 엄마도 안 계시고, 외할머니도 안 계신데다 나는 결혼한 이후 어릴 적 살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일부러 여행을 계획하지 않으면 다시는 갈 수 없는 외갓집이 돼버렸다. 작가의 어릴 적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기억 저편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 내게 한다.

 

나는 여태껏 이어령을 문학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실제로 그의 소설이나 시가 있는 줄도 몰랐다.  책의 3장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어떻게 해서 문학을 하게 되었는지 고백하는 내용이다. 실제 태어난 날과 호적에 오른 생일이 다른 그는 "모든 서루에 잘못 찍힌 나의 탄생을 바로집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탯줄의 언어"였고 그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의 고백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12월 29일에 태어나 애먼 살 먹는 걸 안타까워한 작가의 아버지가 1월 15일로 호적에 올렸다는 것이 나는 좀 낯설게 느껴졌다. 작가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내 부모님 세대에도 실제 생일과 호적 생일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작가의 경우처럼 고상(?)하지 않다. 병이 나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 몇 달 키워보다 호적에 올리거나 농사일이 바빠서 늦게 출생신고를 하면서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날짜를 조작(?)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꽤 유복했다는데 아마도 그런 성장환경 때문에 당장 먹고 입고 살 문제가 먼저였던 내 부모의 어린 시절 경험담과는 너무나 달랐고 낯설게 했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 이 책에서 기대했던 건 얻지 못했다. 대신 마지막 장에 실린 라디오 인터뷰 내용에서 제대로 건졌다.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과,  그 생명의 근원에 존재하는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 누구다 아는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당연하기에 그동안 너무 무감각했던 게 사실이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아직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무감각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작가가 책을 내며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의도했던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무언가 가슴 깊이 느낀 바가 있고 또 그것이 내 삶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바로 독서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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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정의 결혼식
한지수 지음 / 열림원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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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집에 실린 단편들이 하나같이 묵직하다. 신예작가의 첫 소설집이라 하여 요즘의 베스트셀러들처럼 달달한 이야기이거나 스토리 위주의 가벼운 구성일 것이란 선입견은 맨 처음 읽은 단편 <배꼽의 기원>에서부터 곧바로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다지 문학을 잘 이해하는 독자는 아니다. 그 속에 가득한 은유와 상징이 무얼 빗댄 것인지 명쾌하게 잡아내는 능력도 없고, 글로 표현할 재주도 없다. 그렇기에 이 묵직한 독서를 끝내고 난 뒤 조금은 머리가 복잡했다. 그럼에도 읽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 무언가가 전혀 없었다고는 말 못한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 때문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붙들수 있었을까. 돌아보니 그동안 읽었던 소설들이 죄다 남성작가의 것이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여성작가의 소설을 읽은 까닭인지 작품 속 화자가 남자인 소설조차도 너무나 편하게 읽혔다. 총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있지만 화자가 여성인 소설 중 인상깊었던 세 편에 대한 감상을 적어보고자 한다.

 

이 책에는 여성독자가 여성작가에게 기대하는 것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앞서 언급한 <배꼽의 기원>이 그랬다. 자궁을 화자로 내세워 병든 자신을 돌아보지 않은 주인의 에 고하는 마지막 변론이랄까. 그 자궁의 주인은 나와는 달리 출산의 경험이 없는 서른 아홉 살된 미혼여성이다. 자궁이 하는 말에 귀기울이는 나는 내 자궁에 조금은 덜 미안해하며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다.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고민하며 불임클리닉에 다녀보자고 제안하자 남편은 나에게 안 생기면 안 생기는 대로 살자, 고 했고 나는 그 말에 너무나 서러워 울었다. 그리고 외친 말은 내 몸에 있는 자궁을 써보고(?) 싶어, 였다. 내 몸의 일부가 평생토록 제기능을 못하게 될 것이란 사실이 너무나 싫었다. 그 말을 해놓고 어쩌다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조금은 우습다고 생각했지만 <배꼽의 기원>은 읽은 지금은 오히려 여성으로서  내재된 출산욕구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정의 결혼식>에 등장하는 남녀는 겉모습과 속모습이 다른, 즉 성정체성이 겉모습과 일치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내면에 숨겨놓은 것을 감추고 연애를 지속했지만 서로의 그런 점을 알아챈 듯 영원하지는 않았다. 전시회에 들렀다 뜻밖의 입맞춤을 당했지만 자신의 입술에 포개진 입술이 남자의 것이라는 걸 알고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는 주인공 여자. 그녀 속에 내재된 여성을 지향하는 성정체성. 소설 속 주인공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명확하게 인식하고, 또 그것이 제대로 된 인식이었을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여고시절 선후배 사이에 형성된 모호한 관계들을 떠올렸다. 내 기억 속 '그녀들'은 게이니 레즈비언이니 하는 개념을 알지 못했다. 나 역시 그랬다. 그땐 그런 시절이었으니까. <자정의 결혼식>을 읽는 내내 예전의 '그녀들'은 지금 어떤 모습으로 연애(또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들처럼 중증(?)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그 당시 동성인 친구에게 미묘한 감정을 느꼈던 경험이 있다. 하지만 고등학생의 연애가 탈선의 대표격으로 인식되던 때라서 남학생을 사귀고 싶은 욕망이 그렇게변형된 형태로 표출됐던 것도 같다.  이런 나와는 달리 학교 전체가 떠들썩하게 편지며 선물을 주고 받고, 삼각 사각관계로까지 확장되곤 했던 그녀들의 연애(?)는 어떤 결말을 맺었으지 너무나 궁금해졌다. 그녀들도 나와 별다를 게 없는 감정으로 출발했던 걸까, 아니면 정말로  자기 내면에 감춰진 일반적이지 않은 성정체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일까. 잊고 있던 기억의 조각이 이 소설로 하여금 되살아난다.

 

 <열대야에서 온 무지개>는최근 이주노동자에서 폭이 넓어져 다문화 가정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고 있던 터라 더욱 진지하게 읽었다. 주인공은 태국에서 온 결혼이민자 여성 사이란이다.자신의 아내를 배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봐도 부부라고 할 수 없는 형태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 남편 재석. 왜 우리는 동남아출신 여성을 우리와 동등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걸까. 아니 왜 낮잡아 보는 걸까. 여전히 '외국인'이라는 단어를 보면 백인을 먼저 떠올리는 나 역시 내장 깊숙이 침투한 인종차별주의를다 뱉어내지 못했음을 고백한다. 사이란이 산후도우미로 일하며 만난 이주여성들과 그들의 아이가 놓인 처지가 너무나 안타깝고, 그들을 대하는 한국남자들의 태도에 구역질이 났다. 하지만 사이란과 재석이 온전한 형태의 결혼생활로 접어들 것을 예견한 결말은 그나마 다행스러웠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에서는 동남아 출신 이주민들을 보기가 어려워 가끔 현실감각이 떨어진다. 그래서 우리 사회에서 그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다는 사실을 자주 환기해야 한다고 절실히 느낀다.

 

남성을 화자로 내세운 소설들도 편하게 읽었던 까닭은 남성작가가 쓴 남자의 이야기라면 어쩐지 조금은 변명처럼 들리는 구석이 조금 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여성작가가 남성을 화자로 이야기를 전개하니 기존의 시각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남자'의 아내인 나를 좀더 깊게 돌아볼 수 있었고 이 시대를 사는 남편들을 이해하는 노력에 좀더 진정성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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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 Volume 1, No. 1 - Summer 2006, 창간호
아시아 편집부 엮음 / 도서출판 아시아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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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일본소설에 빠져있던 몇 달 전과 달리 좀더 다양한 나라의 소설에 목말라있던 차 계간지 ASIA를 만나게 되었다. 벌써 18호라니 이미 5년차에 접어든 이 계간지를 왜 여태 몰랐을까 안타깝기만 했다. 사실 이번 호가 인도네시아 특집이라서 끌렸다면 거짓말이다. 영어로 출판되기는 했지만  <들려요? 나이지리아>(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 작가인 베벌리 나이두 지음)나 <연을 쫓는 아이>(아프가니스탄 출신 작가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를 읽은 적이 있는 나는 이른바 3세계 문학에 대한 궁금증이 자못 커져버렸기에 아시아권 문학을 다룬 이 계간지에 호기심을 느꼈던 것이다.

 

얼마 전 이주노동자 문제를 코미디적 요소와 버무려 만든 영화 <방가?방가!>를 매우 인상깊게 봤는데 이번 호의 권두언 <프랑스축구와 디아스포라의 미래>에서 우리나라의 다문화가정에 대해 언급하고 있어서 첫 장부터 이 잡지에 관심을 듬뿍 담아 읽을 수 있었다. 부끄러운 대목이지만 베트남 출신 결혼 이민자가 지난 해 기준 8천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더는 못본 척, 모르는 척 무시하고 넘어갈 수 없는 이 나라의 현실이 되었는데 아직 우리 사회가 그에 대한 충분한 기반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현실이 안타깝다.

 

이번 호에 실린 인도네시아의 단편소설 세 편 <미넴이 아이를 낳았다>, <요강>, <신발과 구더기>를 통해 인도네시아의 문화적 특질에 대해 미미하나마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세 편 모두 내가 그동안 접해왔던 단편소설과는 달리, 단편이라고 하기에 너무나 짧아 콩트라 해야 어울릴 정도로 매우 짧았다. 내용 또한 이렇다할 긴장구조가 없었는데 여기에는 싱겁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법하다. 나중에 잡지 중간 쯤에 실린 부디 다르마의 에세이 <내용 없는 형식>에서 내가 이렇게 느꼈던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p. 245 인도네시아의 단편소설에는 갈등이 없으며, 혹간 갈등이 있는 경우라도 그것은 실제로 아주 미약한 것이다.

 

글쓴이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으로 인도네시아인들의 근본적인 가치 중 하나가 기본적으로 갈등을 피하려고 한다는 것으로 해석했다. 과거 수하르토 독재정권 아래에서 모든 갈등은 침묵되었고, 일상생활 속에 수많은 갈등이 존재함에도 겉으로는 갈등을 드러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수하르토 정권이 무너진 오늘날에도 이러한 특징은 여전하다고 한다. 비록 독재정권은 무너졌으나 수많은 정당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탓에 여전히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여전히 등장인물의 대다수는 평면적이고 갈등 또한 성립되지 않는다.

 

인도네시아 문단의 대표 여성작가로 불리는 엔하 디니를 자세히 다룬 부분은 독자인 나 자신이 여성이라서 더 유심히 읽었던 대목이다. 엔하 디니의 단편소설 <살리 아줌마네 식당>도 앞서 단편소설들에서 느꼈던 것처럼 특별힌 갈등구조가 없었지만 차분하고 잔잔하게 읽혔다. 하지만 여성작가의 소설답게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여성의 지위를 부드러운 방식으로 확보하는 인물이 등장한다.

 

특집으로 다룬 인도네시아의 문학 외에도 우리나라 작가 김숨의 단편소설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이나 시인 신달자, 김일영의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된 점도 좋은 경험이었다. 또한 쿠르드족 시인 카잘 아마드가 지은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이라크의 한 귀퉁이에서 자치구를 형성해 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을 표현한 시를 읽고 우리 모두는 조금 더 변방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새삼 깨달았다.

 

잘 읽히지 않았던 글은 연필로 줄까지 쳐가며 읽었던 계간 <아시아>. 아주 오랜만에 접하게 된 계간지여서 한창 계간지를 읽던 대학생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마저 느끼게 해주었다. 여기 실린 모든 글들이 영어로도 실려 있어서 두께에 비해 읽을 거리는 많지 않았지만 그동안 내가 잘 몰랐던, 또는 우리 나라에 잘 알려지지 않거나 번역되지 않았던 문학작품들을 접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계간지를 정기구독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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