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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조각 ㅣ 창비청소년문학 37
황선미 지음 / 창비 / 2011년 6월
평점 :
성인임에도 나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내 안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돌아볼 수 있어서다. 그 모습이란 단지 철없고 미성숙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 치유되지 않은 내 안의 상처로 치환할 수 있는 그 무엇이다. 어린 시절의 상처를 아직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성인은 정말 많다. 하지만 그 상처를 인지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애써 그것을 덮으려고 하다 그것이 상처였는지조차도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다. 성장소설을 읽노라면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르고, 그때 나는 어떤 식으로 나 자신을 방어해왔는지도 떠오른다. (물론 그때 당시는 그것이 방어였는지조차도 인식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 방식을 어른이 된 지금 되돌아아보건대 후회스러운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러나 소설 속의 인물이 갈등을 극복해가는 과정을 통해서 '나는 그때 왜 이렇게 하지 못했나'라고 후회하기보다는 내 아이가 그때의 나와 같은 상황에 놓였을 때 내가 했던 것보다 더 건강한 방법을 선택할 수 있는 사람으로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황선미는 최근 <마당을 나온 암탉>이 애니메이션으로 제작되며 더욱 유명세를 타고 있는 작가이다. 아동문학계에서 이미 유명한 황선미 작가이건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당을 나온 암탉>의 내용을 마치 직접 읽은 것처럼 제법 자세히 알고 있다는 건 그만큼 황선미라는 작가와 이 작품이 널리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일 게다.
회사 중역인 아빠, 조각같은 외모로도 모자라 성적도 최상위권인 오빠, 그리고 아들의 성적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것도 서슴지 않는 엄마, 그리고 이들로부터 어떤 관심도 갖지 못하는 우리의 주인공 유라. 아, 너무도 뻔한 가족 구성원이지 않은가. 이 구성만으로도 충분히 20세기 청소년소설 냄새를 풍기는데 게다가 출생의 비밀, 성폭행 사건이라는 자극적인 것을 소재로 삼고 있다. 그럼에도 작가는 어른들과 아이들이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어떻게 다른지, 어느 쪽이 더 건강한지 잘 보여준다. 하지만 아쉬웠던 점도 분명 있다.
멍청한 자식. 재희랑 논 애가 얼마나 많은데. 그 앨 여친이라고 자기 아킬레스건까지 텋어놓은 건 상연이 실수였어. (176쪽)
재희가 상연이와 나눈 비밀을 못 지킨 것은 손가락질 당할 만하다 쳐도 그렇다고 해서 한번 놀았던 애 두 번이라고 못 놀까 하는 심정으로 몹쓸 짓을 저지른다는 게 합리화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경준은 집안의 배경을 버팀목 삼아 사건의 진실을 흐리려했던 자신의 부모와 한치도 다름이 없다. 최상위 성적권의 학생들이 연루된 성폭행 사건이 해결된 방식은 어른 세계의 복사판이다. 그 사건을 수습한 것이 가해자들의 부모인 '어른'이기 때문이니 당연한 결과지만. 진짜 가해자의 실명이 피해자에 의해 직접 밝혀진다. 가해 학생 중 누구는 자퇴하고, 누구는 해외유학을 떠나게 된다. 어찌 보면 그들이 학교에 얼굴 들고 다니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으므로 잘 마무리지은 듯 보인다. 하지만 돈 많은 범법자들이 구렁이 담넘듯 특별사면을 받아 내듯 그들은 언제가 당당하게, 또 화려하게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또 하나 아쉬웠던 점은 그후 피해 여학생의 이야기가 언급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해 학생의 처벌도 중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건 피해자의 회복이라고 생각한다. 주인공이 핵심 사건을 대면하고 풀어나가는 모습은 보여주지만(주인공이니까 당연하겠지만서도) 피해자가 주인공은 아니었을지언정 성폭행 사건은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사건이지 않은가.
전작의 아우라가 너무 컸던 것 같다. 이 소설은 황선미 작가에 대한 기대가 큰 나머지 실망도 큰 작품이다. 사건들은 묵직했지만 소설책은 얇았다. 다각도에서 깊이를 조금 더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