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
이어령 지음 / 열림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이어령의 전작 <지성에서 영성으로>를 올 가을 쯤에 읽었었다. 세칭 '이 시대 최고의 지성'이라는 이어령이 딸의 영향으로 무신론자에서 크리스천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담은 책이었다. 나이 칠십이 넘어서 종교에 귀의하게 된 그 속사정이 궁금하여 아버님께 권하시는 책을 받아들었었다. 사실 이전까지 읽어본 이어령의 책이라곤 <젊음의 탄생>이 유일했다. 만족도가 썩 높지는 않았지만 그 책을 읽고서야 왜 사람들이 이어령, 이어령 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정말 독서량도 많고 박학다식하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걸 계기로 이어령이라는 작가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이번에 나온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도 그래서 손이 가게 되었다. 더군다나 제목에서 주는 느낌도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결론을 미리 말하자면 제목에 낚였다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사실 엄마와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성장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마음의 고향이자 생명의 근원인 엄마라는 존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의 대상일 것이다. 특히 나는 10년 전 엄마가 돌아가셔서 그 그리움의 깊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래서 제목에 엄마와 관련된 단어가 포함되면 여지없이 집어들게 된다.
책은 네 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중 1장이 바로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이다. 다음 장에서는 작가의 사색이 담긴 글들, 문학인으로서의 회고, 라디오에서 한 인터뷰 전문이 이어진다. 작가가 열한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무척 애틋한 마음으로 어머니를 회상하는 글들이 내 마음을 후벼팠다. 1930년대 출신인 작가가 말하는 어릴 적 고향 모습과 경험들은 요즘 사람들에겐 좀 낯설 수도 있겠지만 시골에서 자란 나에게는 오히려 익숙했다. 특히 작가가 어머니와 함께 나들이 갔던 외갓집 부근의 풍경은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우리 외갓집 풍경과도 닮아있었다. 이제는 엄마도 안 계시고, 외할머니도 안 계신데다 나는 결혼한 이후 어릴 적 살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서 일부러 여행을 계획하지 않으면 다시는 갈 수 없는 외갓집이 돼버렸다. 작가의 어릴 적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독자로 하여금 기억 저편에서 잠자고 있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끄집어 내게 한다.
나는 여태껏 이어령을 문학하는 사람이라고 인식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실제로 그의 소설이나 시가 있는 줄도 몰랐다. 책의 3장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어떻게 해서 문학을 하게 되었는지 고백하는 내용이다. 실제 태어난 날과 호적에 오른 생일이 다른 그는 "모든 서루에 잘못 찍힌 나의 탄생을 바로집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탯줄의 언어"였고 그것이 바로 문학이라고 말한다. 그의 고백이 거짓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12월 29일에 태어나 애먼 살 먹는 걸 안타까워한 작가의 아버지가 1월 15일로 호적에 올렸다는 것이 나는 좀 낯설게 느껴졌다. 작가보다 훨씬 늦게 태어난 내 부모님 세대에도 실제 생일과 호적 생일이 다른 경우가 허다하다. 그 이유는 작가의 경우처럼 고상(?)하지 않다. 병이 나면 언제 죽을지 모르니 몇 달 키워보다 호적에 올리거나 농사일이 바빠서 늦게 출생신고를 하면서 벌금을 물지 않으려고 날짜를 조작(?)하는 경우가 허다했다고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이 꽤 유복했다는데 아마도 그런 성장환경 때문에 당장 먹고 입고 살 문제가 먼저였던 내 부모의 어린 시절 경험담과는 너무나 달랐고 낯설게 했다.
사실 제목을 보고서 이 책에서 기대했던 건 얻지 못했다. 대신 마지막 장에 실린 라디오 인터뷰 내용에서 제대로 건졌다. 나에게 생명을 준 부모님께 감사해야 한다는 것과, 그 생명의 근원에 존재하는 신에게 감사해야 한다는 것. 누구다 아는 당연한 말인 것 같지만 당연하기에 그동안 너무 무감각했던 게 사실이다. 만약 나에게 아이가 없었다면 아직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무감각하게 반응했을 것이다.
작가가 책을 내며 의도했던 것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의도했던 것이든 아니든 어쨌든 한 권의 책을 통해 내가 무언가 가슴 깊이 느낀 바가 있고 또 그것이 내 삶을 질적으로 풍요롭게 만들어준다면 그게 바로 독서의 이유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책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