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휴와 침묵의 제국
이덕일 지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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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역사란 화석화된 학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의 드라마입니다. 인간과 사건이 살아있는 역사는 읽기의 재미를 넘어 같은 상황이 도래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묻게 합니다." - 이덕일

 

<윤휴와 침묵의 제국>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나니 자연스레 지금의 우리 사회를 생각해보게 된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또 다른 윤휴가 있고, 윤휴의 존재를 두려워하며 제거하려 정치공작을 폈던 서인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또다른 서인이 있다.


3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역사는 반복되고 있다. 백성들을 자신들을 위해 봉사하는 노예 쯤으로 여겼던 사대부와 같은 기득권층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들만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인도 여전히 존재한다.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법안보다는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유지하는 데 유리한 법안 만들기에 혈안이다. 권리는 누리고 있으면서 병역 기피에 누구보다 앞장 서 있다는 것도 지난 300여 년 전과 다를 바가 없다. 인사 청문회에 나선 이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하나같은지 한숨만 푹푹 나온다.

역사학자 이덕일님 신간이다. 저자의 유명세에 비해 윤휴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더군다나 침묵의 제국이라니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면 어느 나라겠는가. 도대체 윤휴가 누구이기에 그의 이름에 '침묵'이라는 무서운 단어가 따라 붙었을까 궁금해하며 책을 읽어내려갔다.

여기에는 윤휴 못지 않게 송시열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의 다른 책인 <송시열과 그들의 나라>를 언제고 읽어보려 마음 먹었었는데 윤휴는, 노론의 수장이었으며 송자로까지 불리며 시대의 추앙을 받았던 송시열이라는 인물과는 반대 정파인 남인으로서 모든 면에서 송시열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운다.

국사 교과서에 북벌과 함께 늘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면 송시열인데 그는 단지 명목상으로만 북벌을 외쳤을 뿐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실제로 북벌을 대의로 내세운 윤휴가 등장하자 송시열을 수장으로 한 서인(노론)들은 당황할 수밖에.

윤휴과 송시열의 평생에 걸친 싸움은 나라 안팎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견해의 충돌(70쪽)이었다. 나라 밖으로는 청나라의 운명을 뒤바꿀만한 대란이 발생한 때였다. 복명을 기치로 내걸고 삼번의 난이 일어난 것. 나라 안으로는 각종 폐단으로 백성들이 신음하던 때였다. 여기에 전 세계적인 소빙하기와 맞물려 흉년이 들어 곳곳에 도적과 유민이 창궐하고 있었다. .

윤휴는 이 시기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북벌과 민생폐단 해소를 위한 지패법과 호포법 실시를 주장했다. 신분에 따라 재질과 기재 내용이 다른 기존의 호패법 대신 신분의 구분 없이 같은 재질의 종이로 호적을 기재한 것이 지패법이었다. 그러나 지패법은 반상의 구분이 없다는 이유로 사대부, 특히 조정의 서인 계열 사대부들의 반발을 샀다. 

호포 [戶布 ]은 양반 사대부들의 군포 납부가 면제되었던 것을 없애고 신분의 구별 없이 모든 호가 군포를 납부하게 하는 제도이다. 먹고 살 걱정 없는 양반이 오히려 군포 납부 대상에서 제외되고 그 부담을 이중 삼중으로 백성들이 지고 있었다. 윤휴는 지패법과 호포법을 동시에 실시하면 백성들의 질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서인들은 여러 이유를 들어 두 제도를 실시하면 백성들의 민심이 사나워질 것이라 반박했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대부들의 민심이었다.윤휴는 스스로를 평민이라 낮추었고, 실제로 만 58세의 늦은 나이로 출사하기 전까지는 포의지사로 살면서 백성들의 질고를 직접 목격했다. 그렇기에 그가 시종일관 주장했던 제도들은 사대부의 기득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어깨에 놓인 무거운 짐을 실질적으로 덜어줄 수 있는 것들이었다

서인들은 윤휴가 '진짜 북벌'을 들고 나오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그들에게 북벌은 자국 임금을 내쫓는 쿠데타용이나 자국 정권 장악을 위한 국내 정치용 슬로건(142쪽)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회복 또는 유지에 급급했던 서인들과 청나라 눈치 보기에 바빴던 숙종은 결국 윤휴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온갖 정치공작을 펴 윤휴 죽이기에 혈안이 된 서인들의 속마음을 숙종이 몰랐을 리 없고, 윤휴가 역모를 꾀했다는 것이 정치공작이라는 사실 또한 몰랐을 리 없을 테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학습했던 숙종은 서인들의 쿠데타로 왕위를 내어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나와 다른 너를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 나와 다른 너는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시대,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죽여왔던 시대(서문_9쪽)는  아기장수설화 [─將帥說話 ]의 맥락과 비슷하다.  윤휴는 비록 아기장수처럼 평민 출신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여느 사대부와 달리 백성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보고 그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잘 헤아릴 줄 아는 선비였다. 백성들은 윤휴가 세제의 개혁을 통해 시대의 변화를 가져다 줄 인물이라 믿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윤휴가 형신(추국장에서 곤장 30대를 치는 것)을 몇 차례나 당하고 피투성이가 되어 동대문 밖으로 나왔을 때 양쪽 길가에 모여서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였을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죄목을 만들어 일단 죽이고 보자고 정치공작을 폈던 서인(노론)들은 그런 정치공작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도 집권했으며 게다가 멸망 뒤에는 일제에 가담하기까지 한다. 지금도 우리는 국사 교과서에서 윤휴의 이름 대신 송시열을 올려놓고 윤휴는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이덕일을 통해 재조명된, 그리하여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 윤휴를 지금에라도 만나게 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이제 우리는 긴 침묵을 깨야 하고 시대의 금기를 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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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레지스탕스 -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레지스탕스 총서 1
박경신 외 지음 / 해피스토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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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레지스탕스. Homo Resistance.  저항하는 인간.

이 책의 부제가 표지의 노란 상자에 적혀있다. '저항하는 인간, 법체계를 전복하다'.

'만인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는 명제가 더 이상 참이 아닌 게 되어버린 오늘날이다. 돈이든 권력이든 가진 자들이 법 앞에서 존중 받았던 사례들은 무수히 많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법에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말하면 검사님들 변호사님들 노하시려나?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소설 위주로 읽어온 내 독서이력을 올해는 좀 다양하게 폭을 넓혀보자 싶어 두루 살피던 중 이 책을 발견했다. '저항'이라는 단어만 봐도 움찔하는 반골기질이라 끌린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목차에 열거된 사례들은 충분히 가치있게 보였다. 강남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는 판자촌 주민의 사연, 나 역시 경힘이 있는 비정규직-정리해고 문제-관련된 이야기, 야간집회 금지에 대한 이야기, 새만금 사업을 둘러싼 법정공방, 또 온 나라를 들어다 놓았다 했던 미네르바 사건, 이른바 손담비 Ucc 사건 등 하나같이 억눌린 자들의 투쟁이었다.

 
'법'이라는 단어는 왠지 가진 것 없는 나를 주눅들게 하는 힘이 있다.  법을 잘 아는 사람이 그것을 잘 이용 또는 악용하는 반면 모르는 사람은 맥없이 당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에서 소개된 사례들은 사회적 약자(또는 소수)가 부당한 현실에 맞서 싸우고 결국 "법적"으로 승리했다.  특히 가장 앞에 언급된 구룡마을, 잔디마을 주민들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개발 논리에 등떠밀려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사람들이 강남 한복판에 판자촌을 형성하고 살아간다. 티브이 뉴스에서나 시사 잡지에서 자주 접해서 하나의 번지에 1300여 가구가 살고 있는 강남 판자촌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의 땅'에 살고 있는 이들이 전입신고를 당당히 할 수 있게 된 사연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그것도 2년의 법정 싸움을 통해서 말이다.

 
90% 이상 진행된 공사도 멈추게 한 사례가 있다. 바로 새만금 사업. 신부님과 스님들의 삼보일배 등 사회 각계 각층에서 새만금 사업 반대에 나서 투쟁했던 게 생각났다. 막대한 자본을 투자해서 무리하게 공사에 돌입했지만 결국 완성한 뒤에 따를 환경재앙이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면 손실이 없을 터인데 결국 환경가치의 중요성이 재판을 통해서도 인정된 셈이다. 이 대목에선 4대강 사업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다. 새만금 사업이 긴 법정 공방을 마치고 사업중단이라는 판결까지 나왔는데 불과 10년도 안 된 이 사건을 잊은 자들이 너무 많다. 4대강 사업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데 안 들리는 것처럼 행동하고, 듣는 것처럼 보이더니 편법이나 쓰고 있고... 그들이 제발 가까운 과거에서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종전에 알던 법과는 달리 쉽게 설명하려고 애쓴 흔적들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문외한이기 때문에 연필로 밑줄을 그으면서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여전히 온전히 이해못한 부분이 있지만 읽을 수록 용어에 익숙해지고 문장도 술술 읽혔다. 그럼에도 법조계 자체가 워낙 이해하기 힘든 용어와 부자연스러운 문장을 애용하기 때문에 이 책도 그런 점은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이런 점에서 별 한 개 뺐다). 판결문을 통째로 인용한 부분은 말할 것도 없고 쉽게 썼다고는 하나 어디까지나 종사하는 사람 입장에서 하는 말이다. 나같은 독자가 좀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다시 책을 써준다면 별 다섯 개는 기꺼이 바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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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 - 행복한 삶을 위한 인문학
김종엽 지음 / 가즈토이(God'sToy)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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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이 너무도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제목 아래에 작은 글씨로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자신과 타인 그리고 삶을 사랑할 수 있다"라고 적힌 문구.

 

책날개에는 에드가 드가의 Mrs Jeantaud in the Mirror라는 간단한 소개만 적혀있을 뿐 설명 따윈 없었다. 당연하다. 이 책은 철학책이지 서양회화책이 아니니까. 비록 그림을 보는 방식이 틀렸다 할지라도 출판사의 전략은 적어도 나에게는 적중한 것 같다. 보자마자 덥석 물었으니까. 거울을 바라보는 여인의 옆모습은 정말 우아하고 품위있지만 거울 속의 여인은 낯빛이 어둡다 못해 저승사자럼 보인다. 거울 밖의 '나'와 거울 속의 '나'가 다르게 표현된 이 그림을 보고 나는 자연스럽게 존재의 분열을 다룬 이상의 시 '거울'을 떠올렸다. 임신과 동시에 직장을 관두고 애 키운답시고 살림도 제대로 못하는 내가 밥만 축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질문을 이따금씩 던지는 나를, 그림과 부제가 강하게 끌어당겼다.



행복을 꿈꾸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해지려고 오늘 이 순간도 달리고, 달린다. 하지만 무엇으로부터 행복을 느끼는가는 개인차가 매우 크다. 자신을 둘러싼 사회적 권력(외모, 집안배경, 학력, 직업, 소속 등)에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사회적 권력에 연연해하지 않고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사랑함으로 행복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테다. 나를 둘러싼 외부 조건도 물론 의미가 있겠지만 누가 보아도 후자가 더 세련된 형태의 행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사랑이 타인에게 확대되려면 어떠해야 하는가.

먼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 그 자체로 생존하며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바로 삶을 자리를 배려하는 '인정'의 행위인 것이다. 이 때의 '자리'는 태어남과 동시에 자연스럽게 세상 안으로 들어오는 한 개인의 '하나밖에 없는 삶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그리하여 진정한 사랑의 형태를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으로 예를 들었다. 잘난 자식이 아무리 많아도 못난 자식의 죽음 앞에 하늘이 무너지는 부모이 심정이 바로 그것이다. 대기업 CEO의 자살과 노숙자의 자살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지점인 것이다.

 

우리는 더 많은 유용가치를 창출한 사람에게 더 크 사회적 존엄성을 부여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어느 누구도 노숙자의 죽음을 오래 기억하지 않는다. 물론 이 두 사람의 사회적 조건은 확연하게 다르다. 하지만 대기업 CEO나 노숙자나  분명 동등한 인격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바로 '하나밖에 없음'이라는 존재의 인식만 가능하다면 둘의 정체성이 동등하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인간적 가치를 경제적 가치와 동일시하는 풍조로 인해 인생이라는 무대에서 작은 배역을 맡은 사람은 인간적 가치도 작다고 평가해버리고 만다. 하지만 맡은 배역이 대통령이든 노숙자이든 각자의 삶은 소중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것이다. 대기업 CEO나 대통령과 같이 경쟁을 통해 우위를 점하고, 일정한 사회적 조건을 형성하는 것은 누군가의 희생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월한 사회적 조건을 가진 사람은 사회적 책임감을 가져야 하고, 그것은 바로 누군가의 희생에 대한 유감의 표현인 것이다. 인간을 신이 연출하는 연극에 참여하고 있는 배우라고 볼 때, 비중있는 배역을 맡음으로 인해 갈채를 많이 받았음에도 베풀지 않았다면 그는 당연히 지불해야 할 것을 지불하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인해 자신이 갈채받은 사실을 망각한 것이다.

 

책 전반에 걸쳐 지은이는 철학사를 되짚어보며 '인간'에 대한 성철을 하고 있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현실과 동떨어져 관념적인 이론들만 늘어놓은 것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오히려 철학이야말로 삶과 가장 밀접하게 연동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이 아쉬웠던 점은 철학 강의서의 느낌이 컸다는 점이다. 물론 지은이가 밝혔듯 대학에서 진행한 철학입문 강의라고는 하지만 교양수업 교재로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통해서 얻은 것은 새로운 무언가를 알고 깨달았다기보다 잠시 망각하고 있던 어떤 것을 학문적 접근으로 상기시켰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이 철학이었다는 것이 새롭다면 새로웠다고 굳이 말하겠다. 왜냐하면 존재 자체의 존엄성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성찰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보면 종교와 철학이 같은 범주에 속할 수도 있겠지만 철학이 우리 사회에서 너무 상아탑의 연구과제로만 취급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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