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4월 15일에 외출하기가 꺼려져서 주말에 사전투표를 했다. 4월 11일 오전 일곱 시였고 행정복지센터 앞에는 체온을 재는 사람과 손소독제를 뿌리는 사람이 서 있었다. 투표를 마치고 인근에 있는 저수지를 몇 바퀴 돌았다. 아마도 팔 킬로미터쯤 걸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2. 미통당이라고 쓰고 수구나, 극우라고 불러야 적절한 어떤 정당의 참패는 예견된 성적이자 뒤늦은 결과이기도 하다. 이 당은 오래전부터 전망이나 가능성이 없었고 부패와 탐욕과 무지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오로지 거짓 선동과 혐오 정서를 이용해서 당의 목숨줄을 지켰다.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자신들이 심판의 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았고 경제와 안보가 취약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면서 본인들도 민생 파탄의 원인 제공자들이자 세월호 참사를 막지 못했던 무능력자들이라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했다. 또한, 이들은 그동안 우리네 역사의 비극적인 사건(광주민주화운동, 제주4.3사건, 세월호 참사 등등) 속에서 희생되었던 이들을 모욕하고 조롱하려는 작태를 공공연히 보였다. 이 당의 무능력과 부도덕과 불합리와 몰염치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서 국민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한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망한 것이고, 망해야 당연했던 것이다.
3. 나는 지역구 투표용지에는 손을 대지 않았고 비례대표 투표용지에만 도장을 찍었다. 미통당(+미한당)은 당연히 도태되어야 마땅한 세력이지만 그렇다고 위성정당 따위를 만드는 집권 여당에게 표를 줄 생각도 없었다. 위성정당, 대의제의 구색만 맞추면서 모당母黨의 간섭이나 받는 일종의 '떴다방'식 정당은 그 존재 가치가 없으며 국민의 한 표가 제대로 행사되는 나라라면 있어서도 안 된다. 민주적 통제와 민중의 검열이 사실상 유명무실해진 국가에서나 있을 법한 정당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다시 나왔다는 사실은 비극이자 넌센스이며 박정희(유신정우회)와 전두환(민주한국당, 한국국민당 등의 관제야당)의 시절을 생각나게 한다. 먼저 원칙을 폐기한 미통당의 책임도 크지만 이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똑같이 책임의식을 망실한 민주당도 비난 받아야 마땅하다. 그리고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산파 역할을 했으면서 이러한 사태를 짐작하지 못한(또는 않은) 정의당까지도 책임이 적다고 말하기 어렵다.
4. 민주당은 87체제가 들어선 이후 최대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반동적이면서 시대착오적인 정치인들(황교안, 나경원, 오세훈, 김진태, 전희경, 민경욱, 이언주 등등)에게 낙마의 고배를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일단은 축하와 응원을 보낸다. 그럼에도 나는 민주당계 정당이 독재의 잔향이나 안보 보수의 망령, 맹목적인 시장만능주의를 극복할 수는 있어도 예전에 대통령이 말했던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 그리고 여기에 노동의 존중(+생산수단의 민주적 분배와 관리)을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사실상 조국 사태에서도 드러났듯이 정치의 민주화를 선도했던 세력은 그동안 기득권의 한 축이었고 이번 선거를 통해서 진짜로, 제대로 '기득권'이 되었다. 내 생각에는 이제부터 적폐파(미통당)와 적폐청산파(민주당)의 대결과 함께 기득권(민주당)과 비기득권(비민주당)의 대립도 본격적으로 가시화될 것이다. 민주당은 사회의 상층부이자 지배층으로서 앞으로 빈발할 각종 사회 문제들을 주도적,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게 되었다. 즉 더 이상 '적폐 때문에 안 돼', '야당 때문에 힘들어'와 같은 류의 변명은 통하기 어렵고 엄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자크의 대작인 "잃어버린 환상"에 나왔던 어느 대사가 갑자기 생각난다. '이제껏 어린아이로서 행동했으니 이젠 어른이 되시오.'
5. 내가 주목하는 것은 미통당의 몰락을 넘어서 민주당에 대항해야 하는 비기득권의 조직화 및 정치화이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거대 양당뿐만 아니라 전망과 지향은 있으나 지지도는 낮았던 소수 정당들의 국회 입성을 도우려던 제도였다. 나는 거대 양당이 산업화(미통당)와 정치 민주화(민주당)에 대한 사고력은 있을지 몰라도 시대가 당면하고 있는 여러 문제적인 사안(페미니즘, 퀴어, 환경, 청년 등등)에 대한 이해도는 적거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황교안의 N번방 관련 발언(호기심으로 N번방 입장한 사람은 판단을 달리해야 한다)과 윤호중의 퀴어 비하 발언(성소수자 문제로 소모적 논쟁하고 싶지 않다)을 들으면 두 정당이 여전히 성의식이 뒤떨어진 중년 남자들의 전유물이라는 인상마저 준다. 이런 이들(+동조자들)에게 경각심과 반성력을 주기 위해서라도 소수 정당들의 의회 진출은 필요했고 나아가 정의당이나 민중당의 약진도 있었어야 했다. 그런데 결론은 꼼수를 부린 당들의 다수 의석 차지였다.
6. 오늘은 주말이니 저녁에 소주와 껍데기를 먹을 생각이다. 사실 어제도 불금이라 소주 먹기는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