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중단이 모두의 문제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질문들은 비단 임신중단에 관한 논의뿐 아니라 정치공동체와 사회적 삶의 토대를 이루기 때문이다. 여기에 답하지 않고서 법체계를 운영하거나 공동의 윤리적 규범을 수립하는 건 불가능하다. 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면 나와 타인의 권리를 말할 수 없고, 법적 인간을 명확히 정의할 수 없다면 법이 무엇을 대상으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다. 지금 한국사회가 윤리적 혼란에 빠진 것은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들에 대한 공동체의 답이 여전히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현실적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자신의 권리로 할 수 있는 것을 혼동하고, 외부의 힘이 강요하는 것과 의무로서 해야 하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다. 또한 민주주의란 인민이 정한 법을 인민이 따르는 체제이지만, 시민의 일상에서 법은 오로지 '허용'과 '금지'로만 표현된다. 지난 몇 년간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 사회적/정치적 사건은 대부분 이런 혼란 속에서 발생했다. 요컨대 임신중단의 문제를 다루는 것은 공동체의 생존을 위한 공통 규범을 수립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8~9쪽)
지금 중요한 것은 현대 민주주의 체제가 법적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는가라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임신중단을 둘러싼 혼란 대부분은 법적 인간과 생물학적 인간, 혹은 법적 인간과 종교적 인간을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자신의 지성을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유롭다는 그 사실에 의해 자기 행위에 대한 책임을 지는 존재만이 온전한 의미의 법적 인간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근대 정치체제와 법체계가 태아를 법적 인간으로 인정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의 민법과 형법은 태아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 (16~17쪽)
태아는 생명권의 주체인가? 여기서 생명권, 즉 생명에 대한 권리(right to life)와 생명(life)이 다르다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 임신중단을 둘러싼 혼란 대부분이 이 두 가치를 혼동하는 데서 발생한다. 임신중단에 관한 논쟁에서 결정적인 것은 태아의 생명이 아니라, 생명권이라는 문제다. 동물과 식물은 모두 살아 있지만, 생명권의 주체는 아니다. 그럼 우리는 어째서 생명권의 주체인가? 그건 단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법이 우리를 권리의 주체, 즉 인간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태아가 법적 인간이라면 당연히 권리의 주체일 것이고, 법은 태아의 생명권을 보호해야 한다. 반면 태아가 법적 인간이 아니라면 법은 태아의 권리와 생명권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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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끝까지 다 읽지는 못했지만 이미 서문에서 저자는 자신의 주장을 간결하고도 치밀하게 서술하고 있다. 사실 뒷 부분은 이 책의 주장(태아는 법적 인간이 아니며 생명권의 주체도 아니다)을 논리적으로 탄탄하게 뒷받침하는 데 할애하고 있다. '임신중단에 대한 권리'에 대해서 알고 싶은데 혹여나도 시간이 촉박한 분이 있다면 이 책의 서문과 1장과 2장만이라도 읽으시길 바란다. 고수의 문장력과 문장법이 무엇인지 제대로 느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