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오는 오후다. 촉촉하게 습기 밴 바람이 꽤나 상쾌하다.
오랜만에 책 몇 권 사기위해 알라딘에 들어 왔다가 플래티넘에서 골드로 강등당한 굴욕(?)을 겪었다. 일군에서 이군으로 밀려난 프로야구 선수 신세다. 이젠 VIP가 아니다. 몇 권 더 사면 회복시켜준다고 꼬드기는 문장이 새삼 웃긴다.
책을 안 본지 꽤 되었다. 핸드폰을 바꾸면서 어플도 사라졌다. 굳이 다시 깔지는 않았다. 얼마동안 열심히 보다 물리면 눈길 한 번 주지 않다가 또 쏠리면 보고....그런 리듬이 어제 오늘 일은 아니었으니까.
책을 열심히 읽을 땐 짬만 나면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늘 시달렸다. 와이프가 드라마라도 볼라치면 안방으로 쫒아 버리고 아이들이 떠들면 신경질을 냈다. 마트에서 쇼핑하는 와이프를 기다리던 차안에서 책 없이 흘러가던 아까운 시간에 대한 짜증 섞인 집착은 늘 불편했다.
그런데 막상 책을 놓으니 내가 왜 그랬나 싶다. 보고 싶던 드라마를 요일 별로 외워놓고 신나게 봤다. 퇴근 후 밥 먹고 드라마 한두 편 보다 보면 저녁 시간이 금방 지나가 버린다. 엄청난 시간의 낭비다. 책을 보지 않은 시간 조각들은 왜 그리도 빨리 허망하게 지나가는지 모르겠다.
언제 저 책들을 다 볼 것인가? 순서를 정해 놓고 조바심 내던 내 앞에 가지런히 꽂혀 있던 책들이 내 시야의 초점을 벗어난 순간 나는 자유고 책도 자유다.
인테리어로 전락한 서가 속 빽빽하게 진열된 책들은 꼼짝없는 주인 없는 개 신세다.
담배를 입에 문 채 니코친이 땡겨 무심코 담배곽에서 또 한 개비 꺼내다가 어이없어 하던 황당한 일이 떠오른다. 먹으면서 고프고 마시면서 갈증을 느끼는 연옥의 삶(?)
이 끝없는 갈구의 욕망을 책은 결코 채워줄 수 없었다. 다만 일시적인 위안이 될 뿐.
하지만 그건 책 탓은 아니다. 내 탓도 아니다. 그 누구 탓도 아니다.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는 판에 막힌 허튼 소리도 귀에 거슬리는 씨부렁거림일 뿐.
오늘 다시 무협지라도 펼치련다. 독서 외의 삶이 다시 무료해지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