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와 독서는 상극이며 어지간해선 양립하기 힘들다. 영상과 활자의 대결은 늘 영상의 확실한 승리다. 그래서 책을 읽기 위해 TV를 멀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좁은 집의 형편 상 거실에 떡 하니 자리 잡고 있는 놈을 어찌할 엄두는 내지 못했다. 내 생활도 중요하지만 결혼할 때 가지고 온 혼수품인데다 TV 시청이 유일한 오락거리인 와이프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TV를 와이프 몰래 저주하던 어느 날 마치 하늘이 내 소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마냥 기뻐하기에는 손해가 막심한 기적.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큰놈이 TV와 벽 틈에 들어가 놀다가 밀어버린 것이다. 벽이 버팀목으로 힘을 실어준지라 어린아이의 힘이었음에도 대형TV가 허무하게 앞으로 쏟아져 버린 것이다. 그 충격으로 화면이 반 토막이 나버려 더 이상 시청 불가였다. 만세!^^;;
그 뒤 와이프 때문에 아는 사람한테 얻어 대충 보고 살다 그나마 이사 올 때 버리고 왔다. 그래서 이사 온 후 책장을 거실 전면에 배치하고 관리실엔 TV 없다고 신고했더니 수신료까지 면제해줬다. 결국, TV 없이 살 수 없는 와이프 때문에 다시 구해다 놓기는 했지만 안방에 설치한데다 유선이나 케이블방송이 아닌 지상파 3사 것만 볼 수 있는 오리지널이기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TV와 인연을 끊고, 나 혼자 넓은 거실을 독차지하며 뒹굴뒹굴 원 없이 책을 읽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아쉬울 때가 있었으니 바로 집에서 영화를 볼 때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영화관엘 자주 가는 것은 무리고, 또 영화관은 현재 상영작만 볼 수 있을 뿐이어서 지나간 영화를 보고 싶을 땐, 천상 DVD로 보든지 아님 유료사이트에서 다운 받아 보는데 문제는 소형 노트북으로는 영화의 맛을 느끼기 힘들다는 것이다.
가족용이나 멜로물같이 줄거리 위주의 영화는 그럭저럭 보는데 문제는 액션이나 사극처럼 웅장하고 스케일이 있는 영상 위주의 영화를 볼 때다. 전혀 맛이 나질 않는다. 그래서 늘 큰 화면에 대한 욕망이 있었다. 하지만 TV프로그램도 아니고 영화 몇 편 보자고 비싼 대형TV를 다시 살수도 없고, 아쉬운 마음만 담아 놓고 살았다.
그렇게 살다 우연히 인터넷에서 중국이나 중소기업에서 판매하는 대형TV광고를 본 순간 군침이 확 당겼다. 50인치를 불과 50~70만 정도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게 웬 떡이냐? 이정도면 가능성이 보이는 수준이 아닌가? 어차피 가끔씩 영화 몇 편 보는 것이니 다소 품질이 떨어진다 한 들 큰 하자는 없다 싶었다.
“그래 지르자. 확 질러 버리자. 큰 화면으로 보면 재미있을 거야. 인생은 즐기며 사는 거야. 뭐 차도 아니고 영화 좀 보려고 싼 TV 하나 사는데 뭘 그리 고민 하냐. 이 찌질이 인생아”
긴 세월 이러저런 이유로 눌려왔던 욕망은 봉인이 느슨해지자 갑자기 엄청난 기세로 날뛰었고 내 마음 속 반대의 목소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왔다.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저울질만 하며 몽그작거릴 즈음 와이프가 장모님과 하이마트에 간단다. 코딱지 만한 모니터에 머리 처박고 영화 보던 날 평소 짠하게 여긴 와이프가 전화를 했다. 매장에서 50인치 TV 할인 행사를 한단다. 80만원대라는 것이다. 중소기업이나 중국산도 아니고 당당히 삼성TV라는 걸 강조한다. 잘됐다. 사자. 예산이 좀 오버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삼성이라는데. 두말 않고 사라고 했다.
주문 후, 내색은 안했지만 TV가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동안 당당히 거실을 차지하고 있던 책장은 새 주인을 위해 중앙 노른자위 자리를 내줬다. 책장의 자리를 재배치하고 책을 다시 정리하고 청소로 마무리하는데 반나절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모든 지루한 과정 후 만난 TV와의 첫 대면!
악! 악! 악! 화질이 왜 이 모양이야? 요새 대세인 UHD까지는 아니더라도 나름 풀HD급인데 화질이 생각보다 구렸다. 깨끗하고 선명해서 배우 얼굴의 모공까지 훤히 보이던 매장 전시용 상품의 화질에 비하면 한참 실망스런 수준이었다.
아! ××. 실망은 곧 분노로 바뀌었다. 괜히 와이프한테 투덜거렸다 “차라리 50만원 짜리 저가 중국산이 더 낫겠다. 그건 그래도 UHD급인데...이게 뭐야.”
와이프 역시 다소 실망한 눈치였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엎질러진 물인걸.
아쉽지만 맘을 다잡았다. 그런데 사운드가 또 걸린다. 노트북으로 볼 때는 PC용으로 산 스피커를 연결해 봤는데 음질이 나름 괜찮았던 것이다. 비록 화면은 소형이지만 사운드만큼은 영화관 수준이었다. 이 생각이 미치자 난 다시 궁리했다. 다소 허접해보이기는 하지만 연결해서 쓰자. 마트에 가서 잭을 구입했다. 그러나 웬걸 뭐가 안 맞는지 소리가 안 난다. 스피커가 워낙 구형이라 안 맞는지 아님 내가 잭을 잘못 샀는지는 알 길이 없다.
“아 짜증나. 차라리 사운드바를 사버릴까? 80만원짜리 TV를 보면서 10만원이 넘는 사운드바라니...맞는 조합인가?”
뜬금없이 구입한 TV로 인해 오늘도 난 목하 고민 중이다.
스피커 연결 방법을 다시 찾아볼까? 아니야 차라리 사운드바를 사서 확실하게 마무리 하자.
아니야. 저놈의 TV는 마누라 줘버리고 모니터를 좀 큰 걸로 사서 옛날처럼 보는 게 나을지도 몰라.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주말 오후 소파에 온 몸을 깊숙이 묻고 즐기던 영화 감상의 즐거움은 이미 안드로메다 저편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