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생 특별 보급판 세트 - 전9권 미생
윤태호 글.그림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품절


업무 때문에 늘 고민에 휩싸인 중에 우연히 보게 된 만화. 미생.

사회가 요구하는 평균적인 스펙과 전혀 상관없는 배경을 가진 주인공 장그래가 원인터네셔널이라는 종합상사에서 낙하산 고졸 계약직으로 시작해 능력 있는 직원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져 인구에 회자된 이 만화는 사회 초년생의 회사적응기라 할 수 있고 회사로 대표되는 사회에 진입하여 회사(사회)가 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줄거리로 한다.

 

만화는 직장인의 일상을 현실적으로 잘 묘사했다. 만화 곳곳에 배치된 자잘한 업무 팁은 절로 무릎을 치게 만든다. 잊고 있었던 과거의 교훈이 새삼스럽게 소중하다. 그러나 리얼함이 이 만화의 전부라면 우리는 굳이 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진정한 리얼함은 곧 우리 삶이니까. 그래서 장그래와 영업3팀이 주어진 현실에서 한발자국이라도 나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중요하다. 리얼한 현실에서 비상하고픈 우리의 욕망을 장그래는 치열한 삶으로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장그래의 일상을 따라 가면서 그의 성공을 축하하고 실패를 안타까워하는 또 다른 장그래를 내 자신에게서 발견한다. 그가 회사에서 맞닥뜨린 모든 일과 고민들이 내가 직면했던, 그리고 현재도 고민 중인 것들이니 단지 회사의 일만은 아니며 우리가 사는 인생 내내 숙고해야 할 것들이다.

 

먹고 먹히는 치열한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장그래는 끊임없이 자신이 가고 있는 길에 대한 방향을 스스로에게 묻는다. 그의 의문은 우리 모두의 것이고 그의 고민 역시 마찬가지다. 모든 사람들이 나하고 똑 같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움직인다.

내 자신의 이익이 회사의 이익과 일치하기를 바라며 일하지만 때로는 나의 이익이 회사의 손해가 될 수 있고, 나의 이익을 희생해야만 하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현실은 우리의 상식을 자주 깨며, 노력을 허무하게 만들기도 하고, 늘 어떤 선택을 강요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노력의 대가를 주기도 하고 내 삶이 옳을 수도 있다는 가느다란 희망의 씨앗을 심어주기도 한다.

 

끝내 현실의 한계를 깨트릴 수 없기에 장그래는 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제도적 한계와 편견을 뛰어 넘기 위해 오과장이 짜고 있는 새로운 판으로 들어간다. 어차피 픽션이기에 주인공이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기적적인 결말로 끝을 낼 수도 있었지만 작가는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하는 쪽으로 나가며 장그래라는 인물을 담을 수 있는 큰 그릇을 별도로 준비한다.

 

대학교를 다니고 연수를 가고 각종 자격증을 따는 데 들어간 시간과 비용을 지불하지 않은 낙하산 고졸 계약직을 정규직으로 채용할 수 없다는 회사는 뛰어나지만 검증이 불완전한 능력 대신 평균비용을 투자한 예측가능한 안정적인 스펙을 선택한다. 정작 능력위주의 경쟁논리와 배치되지만 딱히 반박하기도 수용하기도 어물쩍하다. 사전에 능력을 선보일 시간도 기회도 부족하다면 이 선택이 오히려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나의 이익과 회사의 이익을 동일시하고자 하는 오과장의 영업3팀은 마치 가족 같다. 아버지와 같은 오과장, 형 같은 김대리는 장그래의 인생 멘토로서 그가 세상 밖으로 나가도록 돕는 가족의 역할을 해준다. 원칙을 중요시하는 오과장의 업무스타일은 언뜻 그를 출세와 먼 인물로 생각하게 만든다. 현실이다. 원칙은 내 이익과 부합할 때 의미가 있다. 원칙이 내 발목을 잡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리거나 바꾼다. 상사가 원하는 것이 그때그때의 원칙이다.

 

그래서 원칙을 버리지 않는 오과장의 영업3팀은 이 사회의 이상적인 모델이다. 장그래가 그러한 오과장을 충심으로 따르는 것은 그의 길이 가치지향적인 삶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기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사회에서 소신을 세우고 간다는 것은 강인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장그래의 진정한 능력은 단지 업무스타일이 아니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때로는 흔들리면서도 계속 나아가는 것. 장그래가 가진 진정한 스펙이다.

 

직장생활을 인생의 모든 것으로 환원시켜버리는 위험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가정이라는 또 다른 주제를 잊지 않고 말하는 치밀함을 보여준다. 먹고 살기가 너무나 치열하기에 우리는 어느 순간 가정을 버리는 모순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직장생활이라는 삶에서 인생의 가치를 발견하고 목표를 성취하고 자아실현의 실마리를 찾고자 하는 것. 그것이 일과 삶을 분리 할 수 없는 현 자본주의 사회에서 풍요로운 삶을 살기 위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최상의 방법이지 않을까?

 

그것이 비록 만화지만 장그래라는 인물의 성공을 바라는 우리의 작은 소망에 대한 이유인 것이다.

하지만 의문 하나. 스펙도 없고, 장그래같은 능력도 없는 나는 도대체 어떤 생각과 선택을 하며 살아야 하나. 스펙 없는 소신은 두렵고 능력 없는 소신은 망상이니 내가 가야 할 길은 어디에 있을까? 만화로는 해결 할 수 없는 내 존재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허무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장그래와 나의 길었던 오버랩이 다시 분리되는 순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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