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많이 지나갔어도 과거의 어린이날이나 현재의 어린이날은 똑 같다. 빈곤의 시대에 어린이날은 평소 먹을 수 없었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가질 수 없었던 비싼 장난감을 살 수 있는 신나는 날이었다.

하루 동안의 마법과 특권으로서 어린이날의 추억을 가슴에 새기고 있는 수많은 베이비붐 세대는 자신이 가졌던 추억을 여전히 자신의 자식과 공유하고자 한다.

이미 풍요의 시대로 산처럼 쌓여 있는 장난감에 또 하나의 비싼 장난감을 얹고, 치킨과 피자, 햄버거를 밥처럼 자주 먹건만 또 뷔페에 가 외식을 하는 과정을 반복하고 있다.

 

과거 어린이날은 365일 어른들의 날에서 하루를 어린이에게 양보한 날이다. 어른들의 세상에서 어린이들은 그저 어른들의 부속품에 불과했다. 모든 것은 어른들이 결정하고 어린이는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어린이는 선택권이 없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공부하라고 하면 공부하고, 놀라고 하면 놀고, 먹으라고 하면 먹는 것이 그 당시 어린이들의 일상이었다.

 

그렇다고 어린이들이 불행한 건 아니었다. 먹는 것이 풍족한 것도, 놀 거리가 많은 것도 아니었지만 최소한 학대받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행복했다. 지금처럼 공부에 목을 매는 세상이 아니다 보니 아이들은 시간이 많았다. 학교 갔다 오면 무조건 노는 시간이었다. 친구들과 학교 운동장이나 마을 빈터, 골목길에서 틈만 나면 놀았다. 공부는 학교에서 하는 것. 집에서 까지 공부하는 아이는 별로 없었다. 숙제가 공부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아이의 눈높이니, 아동의 인권이니 하는 고상한 말은 없었어도 아이들이 해야 될 일은 노는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세상이었다.

 

그 때는 눈치 보지 않고 매를 들 수 있었다. 소위 사랑의 매라는 것이 교육의 한 방편으로 인정됐을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까지 됐다, 내 자식이 나쁜 짓을 하면 선생님이 오히려 때려주길 원했을 정도니까.  가끔씩 지나치게 매질을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지만 결코 사회적 이슈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체벌을 가하는 것이 범죄처럼 여겨지는 이 시대에 정작 우리가 아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공부를 지상명제로 여기고 낮이나 밤이나,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쉬지 않고 채찍질을 해 댄다. ‘다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말 한마디가 진리다. 그 때는 느슨한 시대였으니 그만큼만 해도 충분히 먹고 살 수가 있었지만 지금은 치열한 생존경쟁의 시대니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소파 방정환선생이 어린이날을 만든 것은 학대받고 있는 어린이들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대우해주자는 취지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방정환선생의 숭고한 뜻은 이뤄졌는가? 가끔 어린이날이 이젠 필요 없으니 없애야 한다는 말이 들리곤 한다. 과연 그럴까?

 

선생의 취지를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어린이를 인격체로서 대우하자는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하루 아이들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어른들의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했던 그 때나, 아이들이 공부기계가 되어 자본주의의 생존본능으로 똘똘 뭉친 무서운 어른으로 커가는 것을 흐뭇해하는 요즘의 세태나 어린이날의 진정한 의미를 모르는 것은 똑 같다. 물리적인 학대에서 정신적인 학대로 바뀌었을 뿐, 선생이 사랑한 아이들의 지위는 오히려 떨어져가고 있다.

 

그래서 선생의 뜻이 여전히 미완성인 지금, 어린이날은 계속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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