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내 부서 간 이동을 했다. 그래서 힘들다.

 

대부분의 변화는 크든 작든 스트레스를 동반한다. 인간의 생명유지장치는 생명의 유지에 방해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성적이다. 현재 상태가 최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생명체의 최선의 목표는 당연히 생명의 유지이고, 모든 시스템은 그에 맞춰 작동하고 있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현 상태의 지속이야말로 최선인 것이다.


변화는 현 상태의 지속이 생명유지에 악영향을 끼칠 경우 항상성이 깨졌다고 간주하고 다시 원래의 최적 상태로  도달하기 위한 경우에 한한다. 그러나 인간은 모든 동물들이 취하고 있는 이 생물학적 법칙을 깨트리고자 애를 쓰는 유일한 동물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신체가 전부가 아닌 것이다. 인간은 동물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별한 지능이 있기에 생물학적 진화가 아닌 정신적 진화를 꾀한다. 생명유지에 다소 불이익을 받더라도 정신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면 만족한다. 한마디로 욕망을 위해 몸을 희생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변화를 추구하는 인간은 이러한 생물학적 한계를 넘어선 인간이다. 변화에 따르는 스트레스는 내 몸의 정신적 육체적 항상성을 깨트리는 불편한 상황에 대한 반발이요, 일시적 불균형에 대한 불안의 표출인 것이다.


인간은 한 쪽에서는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일시적 무질서의 상태로 놓는 것을 감수하려고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이에 저항하는 이중적인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 초자아나 자아 대 무의식의 충돌인 것이다.


물론, 변화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내가 원해서 하는 변화는 스트레스가 덜하겠지만 외부 요인에 의해 야기되는 강제적인 변화는 심할 것이다. 자발적이든 강제적이든 변화에 대한 저항과 이에 따른 스트레스는 우리가 감당해야 할 몫이다.

현명한 사람은 일시적인 스트레스를 감수하고 변화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원하는 결과에 도달하겠지만, 우리들 대부분에 해당하는 바보는 잠깐의 고통을 피하려고 애를 쓰다 결국, 변화의 최적기를 놓친 후 생명유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 우를 범하곤 한다.


머리로는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관성의 법칙의 노예로 살아가고 있는 어리석은 나.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고 후회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는 불쌍한 나.

변화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생각보다 심하게 저항하고 있는 내 마음과 내 몸에 대해 뭐라고 해야 할까? 그러지 말라고?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라고?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줄 거라고?

여하튼 변화는 고통스런 일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웃을 날이 곧 오겠지. 이를 악물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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