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아파트 경비원이 세상을 달리했다.
그의 죽음을 매일 발생하는 자살 사건 중 하나로 분류하기엔 그가 남긴 것이 만만치 않다.
우리는 갑과 을의 수많은 배열을 잘 알고 있다.
마트와 계산원, 택배와 택배기사, 콜센터와 상담원 등등
그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었던 이 관계에 아파트와 경비원을 추가했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이유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방법만이 그의 유일한 선택이었는지다. 그러나 수많은 자살자들의 자살이유가 다 그러하지 않은가?
죽음만이 유일한 탈출구라 생각하고 자살한 사람에게 다른 해결책을 찾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거나 아님 구석에 몰려 본 경험이 없는 사람일 것이다.
미로를 헤매고 있는 쥐를 위에서 내려다 보면 저리 쉬운 길을 왜 헤매고 있는지 우스울 수 도 있겠지만 막상 쥐의 입장이라면 보이는 것이 모두 벽인 공간이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었겠는가? 고개를 조금만 들어 위를 쳐다 보면 하늘이 보일 텐데 쥐는 결코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를 괴롭혔다고 하는 할머니가 살인자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 할머니가 행위가 하나의 단초가 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할머니를 나쁜 사람으로 정하고 비난하면 그의 죽음이 덮어진단 말인가?
아니면 공식적인 근로년수을 넘긴 노인이 먹고 살기 위해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인권을 저당 잡힌 채 일해야만 하는 현 한국사회가 살인자인가?
아니, 나보다 못한 사람을 무시하는 것으로 자존감을 세우는 수많은 우리들인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그가 번듯한 직장에서 두둑한 퇴직금을 받았거나 연금수령자였고, 늙어서까지 가장으로서 한 가족의 생계를 짊어져야할 무거운 짐을 지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삶을 마감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점이다.
고귀한 생명을 맞바꿀만큼 대단한 이유는 없다. 평생 생계의 위협을 등에 지면서 죽는날까지 노동에 시달리다 비참한 생을 마감하는 이 나라의 수많은 노인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라보는 이 사회의 냉정함과 무기력함을,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넘기는 우리들은 정말 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인가? 인간의 존엄과 품위를 유지하며 생을 아름답게 정리하는 것이 이토록 우리나라에서는 불가능한 일인가?
자살은 ‘사회적 타살’ 이다. 그의 죽음을 단순히 개인의 자살로 결론내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직무유기다.
권총의 방아쇠를 당겼다고 해서 당긴 사람만이 살인자는 아니다. 권총을 그의 손에 쥐어준 이가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