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양서(良書)를 읽으라고 한다. 양서의 기준은 무엇일까?
양서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좋은 책’이다. 좋은 책이란 독자에게 지식이든 감동이든 좋은 영향을 주어 변화시킬 수 있는 책일 것이다.
가장 단순한 양서기준은 책의 생명력일 것이다. 수백, 수천년의 세월동안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끈질기게 우리 앞에 존재해온 고전(古典)들같이 말이다.
나 역시 이에 반박할 하등의 이유도, 자격도 없다.
그러나 고전 외의 책들에 대해서는 의견들이 다소 있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 양서가 되기도 안 되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책들은 다 양서가 될 가본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본다.
독서를 하는 목적을 굳이 따지자면 늘 그렇게 나눠왔듯이 ‘재미’와 ‘지식’을 위해서다.
재미가 있다면 찾아서 볼 것이고 지식을 위해서라면 다소 재미가 없다 해도 필요해서 볼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검증을 마친 고전은 말할 필요가 없겠다.
요새 출간된 책을 예로 든다면 하다못해 플레이보이 같은 포르노 잡지라도 양서가 될 수 있다. 내가 설사 쾌락을 얻기 위해 포르노 잡지를 봤다 해도 ‘성의 상품화’나 여성의 ‘물화(物化)’를 발견했다면 양서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너무 극단적인가?)
물론, 삼류통속소설에서도 명작 못지 않은 감동을(물론, 그러기 쉽지는 않겠지만)받고 삶에 영향을 받았다면 좋은 책이라 볼 수 있음은 같은 말이다.
결국 양서의 기준은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넘길수 없는 문제가 있다. 내가 내 맘대로 무엇인가를 느껴서 양서라고 주장했을 때 그 느낌에 대한 가치판단이다.
한마디로 객관적인 수준(책을 읽고 엑기스를 뽑아 낼 수 있는)을 내가 갖추고 있느냐다.
내 맘대로 판단하고 무조건 좋은 책이다 해버리는 ‘나혼자’ 만의 양서는 아무리 양서의 기준이 주관적이라고 주장한다 해도 너무 범위가 애매하다.
즉, 최소한의 지식과 교양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 한해서(그럼 결국 양서의 기준은 객관적인가?) 양서의 기준이 주관적이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쩜 이것은 내 문제이기도 하다.
아무리 읽어 봐도 털끝 하나 이해하지 못하는 어려운 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내 수준에 맞는 책 여러 권을 읽어 내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이 더 현실적일 수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이다.
시간과 노력은 무궁무진한 것이 아니다. 주어진 조건하에 최대의 이익(재미)을 얻기 위해서 무리하게 어려운 책만 잡고 있을 것이 아니라 쉽고 적당한 책을 잘 골라 다독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물론, 검증이 된 책이 아니기에 잘 골라야 한다는 불편함은 감수해야 한다.
별 기대 없이 시간 때우기로 펼쳐든 책에서 폐부를 찌르는 한 문장을 발견했을때 그 기쁨이란.....!!!
그렇다면 그 책은 양서다.(최소 내게는) 그 한 줄 외에 건질 것이 없다 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