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소년이 서 있다 민음의 시 149
허연 지음 / 민음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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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 번째 읽는 것인 줄 모르고 두 번째 읽었다.

   그만큼 내 기억력이 떨어졌다는 것일까 기억에 남지 않는다는 것일까

   어느 쪽이 되었든간에 

   이제 내가 공감할 수 없는 정서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2. 과거의 언젠가. 기묘한 열등감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공사장에 가서 벽돌 날라본 적 없다' 등의 일화로 

   소비되는 이른바 '고생해본 적 없다' 는 열등감.

   물론 마음 고생이야 어디에다 대도 뒤지지 않을 자신이야 있지만

   물질적, 육체적 고생을 해본 적 있냐 라고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던 시절.

   그로 인해 온실 속 화초 취급받던 나는 화초라서 열등감에 시달렸다.

   그림 그린다는 자가 어찌 화초가 될 수 있는가

   그런 질문이 수시로 머릿속을 맴돌았다.


3. 그래서 부러 처절한 이야기들을 찾아 읽던 시절이 있었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죽음의 한 연구' 를 읽었던 것도 

   아마 그 시절의 일일 것이고

   기형도 라는 시인의 이름자를 알게 된 것 역시 그 시절의 일일 것이다. 

   스스로를 치열하게 살아본 적 없는 존재라 여겨

   어떻게든 치열한 빛의 열기라도 느껴보고 싶던 자의 발버둥이었다.


4. 허나 그것만이 정의인가.

   화초라고 무시당하며 구르다 보니 또 화초 나름의 깡다구가 생겼는지

   도리어 반문할 만큼의 여력도 생겼다.

   이 세상 어디 정도가 있단 말인가. 

   어찌 네가 한 고생만 고생이냐 말이냐.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아니 고생을 했거나 말거나.

   그걸 빌미로 사람을 치켜세우고 우습게 볼 자격이 누구에게 있단 말인가.


5. 이 책을 처음 읽은 것은 2016년도였다. 

   그 때의 기록을 보자니 기형도와 불온한 검은 피를 운운한 것을 보면 

   꽤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왜 아무런 동요가 없을까.


6. 어쩌면 내가 어떤 시절을 지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해서 더 이상 투쟁과 사투 끝에 남겨진 

   허무의 의식은 보고 싶지 않은지도 모르겠다.


7. 위선이라 할지라도 깨끗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싶다.

   더럽고 추악한 것들은 사회만으로 충분하다.

   이게 잘못된 걸까? 


8. 점점 보지 못 할 책과 이야기들이 많아질 듯한 예감이 든다.

   이게 잘못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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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장 인상에 깊게 남은 것은 갑작스레 타국에서 살게 된 자의 두려움, 불안, 긴장과 설레임 등이었으나 앞부분의 단편들을 생각해보면 꼭 그게 전부는 아닌 듯 싶다.

슬픔과 원망, 혹은 분노
안타까움과 연민, 그리고 경계.
이러한 복합적인 감정들이 한데 어우러져있거나 혹은 그 사이사이 경계에 위치한 이야기들이란 생각이 들었다.

비극적이라기엔 모던하고.
그렇다고 가볍다 치부하기엔 서사의 무게가 있는.

어쩌면 일상이란 게 이런 건가 싶기도 했다.

좀 더 집중하며 읽었다면 좋았겠지만
짧은 서사에 익숙치 않은 습관은 여전한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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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보낸다는 것에 대하여.


성장영화 라기보다는 이별과 애도에 대한 영화.


동화라 하기에는 슬픈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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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또다른 시집 ‘불온한 검은 피‘ 를 읽긴 읽었으나 거진 기억에 남아있지 않다. 다만 남은 건 무언가 어둡고 우울한 정서가 있었다 정도. 애초에 텍스트에 대한 기억력이 좋지 못 한 탓도 있다.

‘내가 원하는 천사‘ 에서 내가 바란 건
아마도 한국의 골목이 아닌 사막과 신전의 이야기였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지하철과 시장과 그안에 꾸물럭대는 모습들이 썩 달갑진 않았다.
‘또 여기인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아마 기대가 어그러진 탓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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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의 기다림
오츠이치 지음, 김선영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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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16년도의 일이다.

   그 때만 해도 이 책을 상당히 좋게 봤으며

   일독 후의 감상은 이 작가의 팬이 될 것 같다는 축약된 문장 뿐이었다.

   러나 근래의 이슈들과 범죄들을 접한 이후로는

   아무래도 시각이 달라져 버렸다.

   일단 작품 속의 설정을 납득할 수 없다.

   저 상황에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나?

   이러한 생각 때문에 작품 전체에 흐르는

   유대와 공감에서 비롯된 잔잔함에 집중할 수 없게 되었다.


2. 한 번 발화된 생각은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왜 하필 '여성시각장애인' 이어야 했으며

   숨어든 남자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 하는 실패자' 로 그려져야 했으며

   왜 여자는 아버지와만 남았으며 앞을 못 보는 자신의 처지보다

   앞을 못 보게 된 자신 때문에 쓸쓸해진 아버지를

   안타까워하는 것처럼 그려져야 했나.

   그리고 가장 의문스러운 것.

   왜 '그녀' 는 모든 것을 포용하고 감싸안는 이미지란 말인가. 왜 하필.


3. 물론 작품의 설정을 하나하나 꼬집으며 트집을 잡자는 건 아니다.

   다만 일종의 선입견 같은 것이 작용하고 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들 뿐.

   어쩌면 클리셰라고 해도 좋을까.

   '불우한 처지에도 세상에 대한 의심 없이 순하고 착하고 맑은 여자'

   '우연히 그 여자 곁에 오게 된, 집단에서 떠밀린 외로운 남자'

   '세상에서 밀려나 외로운 이들의 유대는 외딴 집에서 시작되고-'


   뻔한 이야기, 뻔한 설정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슬슬 자기검열의 시대가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4. 새벽공기의 싸늘함. 희미한 회색. 흰 손.

   사락거리는 커튼. 여명 등의 이미지가 주는

   쓸쓸함이 감도는 정돈된 분위기는 여전히 마음에 든다.

   허나 이 모든 것을 그냥 '분위기가 좋으니 됐다' 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많은 거다.

   ...그리고 언제부터 봤다고 반말인지.

   (원작이 그랬는지 번역하면서 그리 된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5.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밀려난 외로운 남녀의 유대' 라는 것이

   비단 일본이나 한국에서만 그려지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동양의 컨텐츠들에 대해서만 강하게 반응하는 걸까.

   한 쪽이 일방적으로 의존하고 이끄는 식으로 그려지는 것에 반발심이 드는 건지.

   아니면 서양의 컨텐츠들에 비해 더 익숙한 배경이라 그런 건지.


6. 분위기를 느끼고 싶다면 추천하는 바이다.

   허나 근래 이런 저런 장르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일이 많은 이라면

   아무래도 피하는 게 좋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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