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
한강 지음 / 창비 / 2007년 10월
평점 :
절판


난 취미로 만화를 그린다.

 

올리는 텀이 기니 연재는 아니요

내용이 가벼운 편은 아니니 일상을 다룬 4컷만화(흔히 카툰이라 말할 법한) 류도 아니요

공모전이나 혹은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도 아니니 그냥 만화일 뿐 무엇을 위한 것도 아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더이상 창작인으로 살 수는 없지만

끊을 놓지 않기 위한 마지막 발버둥 정도가 되려나.

 

이 얘기를 왜 이토록 길게 하는가 하면

근래 내 만화들(?)에서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한 까닭이다.

공통점인 즉, '미안해' 라는, 너무 늦어 전해지지 않은 말.

어찌 보면 폭력에 대한 나 나름의 반발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점점 나이가 들면서 혹은 사회생활 연차수가 길어지면서

무덤해지기는 커녕 도리어 점점 예민해지는 것은 폭력에 대한 문제였다.

단순히 신체적 폭행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신입들은 이래야 군기가 잡힌다며 이제 막 들어온 인턴을 막 부릴 때의 모습.

이래야 기강이 산다며 그냥 할 수 있는 말도 굳이 욕을 섞어가며 할 때의 모습.

남녀구분 없이 상하관계에서 행해지는 어떤 것들.

그리고 가족 내에서-

어머니의 아픈 어깨를 보면서 어떤 사람은 가책을 느끼는 반면

왜 어떤 사람은 아무렇지도 않게 너절한 자기 속옷을 빨래바구니에 쌓아놓을 수 있는 건지.

 

언젠가 악마를 보았다 를 보면서

무서운 사람들이 진짜 무서운 이유는 가책을 느끼지 않아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미안함. 혹은 죄책감.

공감과 동감이 인간이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능력이라 친다면

미안한 마음도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과일진데

점점 미안해할 줄 아는 사람이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건 나의 착각일까.

사과하면 지는 거라는 기이한 편견 때문에 그런 걸까.

 

영화 한 공주를 보고서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저 가해자의 자녀가 만약 똑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가해자는 과거를 떠올리며 가책을 느낄 수 있을까.

아니면 자신이 피해자를 몰아부쳤던 것보다 더 거세게 가해자를 내몰까.

불행히도 마음의 저울은 후자로 기울었더랬다.

 

폭력. 폭행. 상처. 이런 생각들로 복잡했던 책이었다.

그리고 제일 크게 들었던 생각은

제발 미안해할 줄 알았으면 좋겠다는 것.

사과 = 숙이고 들어가는 거 라는 이상한 사고는 집어치우고.

 

....그러려면 개념들을 다 초기화시켜서 재교육을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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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들의 말투나 묻지 않아도 알려주마 식의 독백에서 역시 옛날 책이군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몰입해가며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역시 저자의 능력인가 하는 생각.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하다. 과거 행적을 스스로 중얼대며 알려주는 식의 전개는 좀 거슬렸지만 시대(?) 를 감안하면 넘어갈 수 있는 정도. 기이했던 것은 먼저 희생자가 나오고 숨겨진 이면이 드러나는 것이 이제껏 내가 접해왔던 미스터리 대부분의 흐름이었던 반면, 이 소설은 아예 처음부터 까발려놓고 시작한다는 것. 그 외의 감상. 아...김전일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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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의 개인사에서부터 출발한 글 이라는 정보가 없이는 꽤나 맥락없는 글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 위대하다거나 뛰어나다거나 하는 생각보단 그래서 그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 내가 느끼기에 소설에서는 아버지의 괴로움보다는 아버지 답지 못한 자의 비겁함만 보이는 듯 해서 썩 유쾌하진 않다. 뭔가 되다 만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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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분다, 가라 - 제13회 동리문학상 수상작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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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면에서 보면 사랑 이야기가 될 수도, 혹은 치정극이 될 수도

그도 아니면 여성소설이 될 수도 있는

 

그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겹쳐져 한 폭의 그림이 되고 만 듯한 글이라는 생각.

 

가장 최근분의 빨간 책방에서 들은

'작가란 경험하는 사람이 아닌 관찰하는 사람이 된다' 는 말이 떠올랐다.

 

황정은의 소설도 떠올랐다.

 

그리고, 모든 기억과 과거를 지우고 싶었던 언젠가의 기억이 떠올랐다.

 

모든 게 불결해보이고 불합리해보이던 즈음의 기억이다.

 

괴롭지 않으려면 잊어야 할 테고, 잊기 위해서는 시간이 약이라는데

그 시간이 흐르는 지금의 고통은 무슨 수로 감내한단 말인가.

 

바라는 것을 줄이고, 표현하는 것을 줄이고

그렇게 하나둘씩 줄이다 보면 투명해질 날이 있기도 할 거라고.

 

투명해지면 적어도 어설프게 선명한 탓에 받는 고통은 없을 거라 그리 생각했었다.

 

황정은 씨의 소설을 보다 보면 한강 씨의 소설이 떠오르는 경우는 별로 없는데

 

기이하게도 한강 씨의 소설을 보면 이따금 황정은 씨의 소설이 떠오른다. 왜일까.

 

그리고 한강 씨의 소설은 이상하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부분이 있다. 적어도 나에게는.

 

아무래도 '그대의 차가운 손' 을 다시 읽어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어쨌든 여러 가지 이미지가 중첩되어 하나의 것을 만들어낸 글이기에 뭐라 말하기는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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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이야기. 처음 떠오른 것은 김은국 씨의 `순교자`. 다음 떠오른 것은 근래 본 자음과모음 이 관련된 기사들(정확한 사실은 모르므로 말은 아끼기로 한다). 다만 그 기사와 이 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어떻게 자음과모음에서 이 책이 나올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세 번째는 의문. 동기들(과 동기든 입시 동기든) 중 작가가 되어(혹은 작가지망생으로) 아직도 그리고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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