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하냐?" "약과 놓잖아." "왜 비닐은 ‘안 벗겨." - P201
"저거, 다 죽은 땅이야." "땅도 죽어?" - P202
곧 떠날 사람이라는 마음으로일하는 것은 골치 아프고 서러웠다. 이곳저곳 떠돌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곳이 필요했다. - P203
"그럼 나는." "어?" "날 위해서는 뭐 하는데." "이게 널 위한 거야." - P209
대진은 스스로 많은 것을 이고진 채 살고 있었다. 기후 위기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농법까지 고안해가며 지속 가능한 세상을 꾸려나가는 사람이었다. 해나는 생각했다. 그중 나를 위한 노력은 얼마 정도 될까. 그저 생일이 되면 전화라도한통 해주고, 때때로 맥주 한잔하자고, 놀러오라고 말해주길바랐는데. - P210
내가 여기서 죽어도 아빠는 후손 생각을 할까. 이상하게 아픈 와중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해나는 자신이 다친 만큼 대진또한 그만큼의 흠집이 나길 바랐다. 대진이 그런 무른 사람이길 바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흠집을 견디고 다시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길 바랐다. - P213
대진이 수배당하던 시절 그를 숨겨줬다던 여인들도 떠올랐다. 대진은 그 여인들이 하나같이 자신을 좋아해서 숨겨줬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었다. 그저 그 여인들은, 대의를 생각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대진이 자꾸 뭐라고 외치는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구급차는 오지 않았다. - P215
태수씨와 엄마는 모 대학 사학과 85학번이었는데, 동기들이야기를 할 때마다 그들을 민주85라고 불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성식이 형, 민재 형, 의식이 형과 같은 형 이야기를 많이 했고 그들이 다 민주85라고 했다. - P221
나는 바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 성식이 형이름 아래 있는 문장을 읽었다. 최대한 연습한 대로. "울지 마쇼. 태수씨의 지령이오." - P224
"대신 부탁이 있어요.‘ 부탁? 성식이 형이 되물으며 불안한 모습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우리집 개를 장례식장에 데려와주세요. 그러자 성식이형이 나를 빤히 쳐다봤다. 그러더니 아직까지도 미행을 당해, - P229
오후가 되자 장례식장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의가까운 친구들부터 먼 친구들까지 알음알음 찾아왔는데 태수씨의 친구가 가장 많았다.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조문객을 맞이했고 수첩을 펼친 뒤 SNS나 사진 등을 통해 알아둔 얼굴을매치시켜 태수씨의 말을 전해줬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울었고 어떤 사람은 웃었다. 또 어떤 사람은 더러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영문을 모른 채 내가 들고 있는 수첩을 뺏으려 들었지만, 나는 결코 내어주지 않았다. - P235
누구보다 태수씨를 잘 알고 사랑했던 맏딸이 여기 있는데. 하지만사랑을 증명할 길은 달리 없었다. 누구의 사랑이 더 크다고말할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한 트럭의 미움 속에서 미미한사랑을 발견하고도 그것이 전부라고 말하는데. - P235
"차장님도 요즘 여자들이 그렇게 싫으세요?" "요즘 여자들? 우리 회사 요즘 여자들은 다 괜찮아. - P243
어쨌든 유자는 태수씨를 졸졸 쫓아다녔다. 태수씨가 올 때면 어떻게 아는지 엘리베이터 소리만 들려도 꼬리를 흔들고낑낑거렸다. 태수씨는 유자의 두 앞발을 들어 함께 춤을 추기도 했다. 노래도 없이 추는 그 춤은 신기하게도 경쾌하게 느껴졌다. 그런데도 나는 유자를 태수씨의 장례식장에 데려오는게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수씨에게 꼭 그래야 하냐고묻자 태수씨는 꼭 그래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내게 말했다. - P247
"니들 진짜 미쳤니?" 나는 수첩을 들어 엄마에게 해야 할 말을 찾았다. 그리고 해오던 것과 같이 최대한 태수씨의 말투를 흉내내며 말했다. "공여사, 자중하시오. 우리의 적은 제도잖아."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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