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고추 작은고추 - 하이타니 겐지로 동화집
하이타니 겐지로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김고은 그림 / 양철북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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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말기암으로 돌아가신 하이타니 겐지로 선생님의 새 작품을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게 슬프다. 선생님은 17년 간 초등 교사로 재직하며 만났던 아이들을 당신의 작품 속에서 온전히 살아 숨쉬게 하셨다. 두 번을 거듭 읽으며 이렇게 사랑스런 녀석들을 그려낸 선생님께 감사했다. 초등 1~2학년 아이들에게 한 꼭지씩 읽어줬더니 아주 즐거워했다. 특히 '큰 고추 작은 고추' 이야기엔 왁자하니 웃으며 공감을 표시했다. 그리곤 서로 책을 빌려간다고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선생님이 리뷰를 안 써서 아직 못 빌려줘!" 한 발 뺐더니 저희들끼리 빌려볼 순서를 정하고 기다리는 중이다.^^   

하이타니 선생님이 그려낸 아이들은 모두 천진하고 솔직한 사랑스런 모습이다. 이보다 더 사랑스러울 수 없을 만큼 귀엽고 사랑스런 캐릭터가 통통 살아난다. 또한 여기 등장한 엄마아빠와 선생님도 자애로움이 넘치는 따뜻한 어른들이다. 아이의 마음을 읽어내고, 잘못을 사과하며 고마움을 표현할 줄 아는 선생님. 아이가 바라는 게 무언지 알고 놀란 척하는 할머니와 엄마 아빠. 같이 놀며 친구가 되어주는 자상한 아빠도 빼놓을 수 없이 멋진 어른들이다. 산뜻한 삽화는 이야기를 재밌게 감상하는 즐거움을 더한다. 삽화만 들여다 봐도 웃음이 절로 나는 재미가 있다.

 

아이들은 앞뒤 재는 어른처럼 따지지 않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말하고 행동한다. 구덩이에 빠진 개 로쿠베를 구하려고 궁리하는 모습은 사뭇 진지하고 장엄하다. 비록 화가 나면 원자 폭탄처럼 화를 뻥! 터뜨리는 마코토, 선생님이 달래도 점심밥을 안 먹지만, 도요코 선생님 아파서 안 나왔을 땐 집까지 찾아가 편지와 초콜릿을 내미는 사랑스런 아이다. 나쁜 장난을 하고 깜깜한 곳으로 쫒겨난 큰고추 마코토 형을 구하려 으앙 울어버린 작은 고추 마는 무엇이나 형을 따라하는 흉내쟁이다. 두 녀석과 엄마의 목욕탕 대화는 낄낄낄 웃게 했다. 아이들도 이 장면을 읽어줄 때 엄청 웃었다.^^ 
여기 실린 여덟 편은 장황한 설명보다 간결한 대화로 이루어져 생동감이 더한다.

   
 

이백을 셀 때까지 뜨거운 물에서 나올 수 없었습니다. 마코토가 말했습니다
"삶은 달걀 되겠다."
엄마가 말했습니다.
"사람은 달걀이 되지 않아."
마코토가 또 소리쳤습니다.
"삶은 달걀 되겠다!"
엄마도 덩달아 소리쳤습니다.
"사람은 삶은 달걀 같은 거 안 된다니까!"
백까지 셌을 때, 마코토는 탕 밖으로 나가려고 했습니다. 엄마가 마코토의 어깨를 손으로 꾸욱 눌렀습니다. 그 바람에 엄마의 젖가슴이 '철썩'하고 물에 닿았습니다.
마코토가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앗! 젖 떨어진다!"
엄마가 뾰로통해서 말했습니다.
"젖이 어떻게 떨어지니?"
마가
"엄마 젖 내 거."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마코토가
"원래는 내 거였지롱."

 
   

용기가 없어 발표하지 않는 슌스케가 빛나라 물감으로 할머니를 놀래준 이야기를 또박또박 발표하자, 선생님이 번쩍 들어 올려 교실을 빙빙 돌려 줘 기분 좋았던 이야기. 치사미와 엄마아빠 놀이를 하는 걸 보며 아이가 되고 싶은 아빠, 아들 마사루는 아빠와 눈높이를 맞춰 놀아주며 아빠는 정말 아이 같아서 피곤하다고 투덜거리는 이야기도 재밌다.  

아파트에서 개를 키우면 개가 불쌍하니까 새 집으로 이사할 때까지 참겠다던 유코는 순간적으로 욕심이 나서 이다 의원 아줌마한테 개를 얻어 온다. 하지만 아파트 뒤편 물탱크 뒤에 강아지를 숨겼다가 잃어버린 유코는 손전등을 들고 혼자 찾아 나선다. 아빠는 유코의 거짓말 때문에 강아지가 잘못된다면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엄하게 나무란다. 추운 날 손을 호호 불며 찾아다닌 유코는 이다 의원네 아줌마를 만나 꼬마가 무사하다는 말을 듣고 와앙 울어버렸다. 유코의 두 손을 잡고 같이 울어버린 아빠는 찡한 감동으로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부모 마음이 이런 것이구나 느끼는 행복한 눈물이다. 책을 읽으며 눈물나야 좋은 책이라고 생각하는 난, 이 책 역시 좋은 책으로 추천한다.^^  

 

일곱 형제들이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고 서로 도와서 공주같은 미키가 직박구리 삐코를 키우다, 삐코 혼자 벌레를 잡을 만큼 자라 산으로 돌려보내는 멋진 사나이가 되어 가는 모습도 감동이었다. 쌍둥이 준코와 노리코는 늘 같은 생각 같은 행동을 하는 게 싫다며 서로 다른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악극단을 따라 나섰다가 옆집 아이 겐과 같이 길을 잃었을 때, 노리코는 겁장이였지만 무서운 개한테 준코를 보호했고, 준코는 탐정같은 추리로 길을 찾았다. 노리코는 민들레 관찰로 식물박사가 되고 준코는 개를 관찰하며 개오줌 지도를 만들어 동물박사로 변신했다. 둘은 어느새 서로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똑같이 깨닫는다.  

하이타니 선생님이 그려낸 작품세계는 억지로 꾸민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눈으로 관찰하면 금세 발견할 생활 속 아이들이다. 천방지축 건강한 아이들이 서로 배려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아름다움이 담겼다. 사는 게 재미없고 팍팍한 어른들은 동화 속 아이들에게 신선한 감동과 활기를 얻을 수 있다. 아이와 같이 읽고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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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09-11-08 0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탐나네요.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은 좀 우울하고 슬픈 느낌이었는데,
이 책은 밝고 건강해보여서 더 끌려요. ^^

순오기 2009-11-08 18:08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 눈물나는 건 딱 한편~ 그것도 슬픔이 아닌 감동의 눈물이지요.^^
이건 예전에 타출판사에서 나왔던 책인데 양철북에서 다시 나왔네요.
양철북이야 하이타니 선생님 책 완간이 목표겠지요.^^

2009-11-08 15: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09-11-08 18:09   좋아요 0 | URL
받으셨군요. 거기서도 수배중인데 품절이면 양해바란다고 문자왔었죠.
나도 10월에 경복궁 가면서 읽었는데 여직 리뷰를 안 썼어요.^^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철북에서 하이타니 상의 책이 많이 나오지요? 이 분의 책을 읽은 다음에 눈이 너무 높아져서 대한민국 학교를 생각하면 절망을 느낄지도 몰라요.

순오기 2009-11-08 18:11   좋아요 0 | URL
이분 책 거의 다 읽었어요~
작년엔 이분 발자취를 더듬는 문학기행도 다녀왔고요.
대한민국 교육의 현재와 미래는 참담하지요~ ㅜㅜ

같은하늘 2009-11-09 0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타니 겐지로의 책이 좋은가 보군요.^^
읽어 보아야겠어요.

순오기 2009-11-09 11:53   좋아요 0 | URL
하이타니 선생님 책은 거의 다 읽었지요.^^

오월의바람 2009-11-09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7년 돌아가셨군요. 아직도 작품이 계속 나와서 생존하신 줄 알았어요.

순오기 2009-11-09 11:54   좋아요 0 | URL
지금 나오는 책은 타 출판사에서 나왔던 걸 새로 찍는 거지요.

희망찬샘 2009-11-20 18: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쓴 리뷰와 너무나도 수준 차이가 나는... 리뷰 쓴 것이 부끄러워지는 순간입니다. 짝짝짝!!! 참 잘 쓰셨어요. ^^

순오기 2009-11-20 19:08   좋아요 0 | URL
잘 썼나요? 이 책을 꼼꼼하게 두 번 읽었거든요.
책을 보내준 양철북에 감사하는 마음도 한 몫 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