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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웬디양은 순오기를 잘 안다. 나도 웬디양을 그만큼 알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작년 6월 내 생일엔 최규석만화 '대한민국 원주민'을 선물해서, 모레 최규석작가 초청강연회를 갖는 인연까지 만들어 준 일등공신이다. 올해는 '순오기님이 좋아할 거 같아서'라며 김승옥의 '내가 훔친 여름'을 보내줬다. 그런데, '내가 훔친 여름'이라는 제목만 보곤 내용도 모르면서 도둑이 제발 저린 일이라도 있는지, 손에 잡기까지 장장 4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했다.  

어제 드디어 이 책을 읽었다. 오후부터 밤까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책만 읽었다. 세상에~ 이럴수가!! 역시 웬디양은 나를 잘 안다. 아니 나의 취향을 정확히 아는 것 같다. 역시 탁월한 선택이었다. 이 책은 추리소설도 아니면서 정말 추리소설을 읽듯이 다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손에서 내려 놓을 수 없었다. 내가 훔친 여름과 60년대식, 두 편 다 작품의 결말을 보기 전까지 손에서 내려 놓지 못하도록 김승옥의 필력은 대단했다. 김훈이 '바다의 기별'에 쓴 것처럼, 김훈의 아버지와 친구들이 김승옥이 등장했을 때 '졌다'라고 했다는 말을 입증하고도 남는다.

'내가 훔친 여름'은 서울대 문리대를 다니다 주임교수의 심부름 돈 2만원을 제맘대로 쓰고 고향으로 도망쳐 온 이창수와 서울법대 뱃지를 달고 온 중학교 친구 장영일, 두 청년의 무작정 여행에 동참하며 한여름의 해프닝에 몰입됐다. 기차에서 만난 이화여대 뺏지를 단 강봉순과 왜호박 같이 생겼다는 여자와 다시 여수에서 만나는 인연은 사건의 밀도를 높인다. 가짜 서울대생이 유행이었던 60년대 풍경을 희화적으로 그렸지만, 머리 좋은 녀석들이 벌이는 촌극은 젊은 날의 치기로 흘려버리긴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소년원에 갔다왔다는 영일은 예서제서 주워들은 것으로 법대생 노릇을 하면서도 당당하다, 강동우 일가가 추구하는 것도 손가락질 하기엔 우리도 떳떳하지 못하다. 젊은날의 회고록 같은 내가 훔친 여름, 아니 그들이 훔친 여름은 무엇이었을까? 놀라워라!
난, 네가 훔친 여름을 알고 있다.^^ 흠, 나는 지난 여름 무엇을 훔쳤을까?

'60년대식'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로 작정한 김도인의 이야기다. 도인은 시대가 답답하여 견딜 수없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자기가 죽으려 한다며, 신문사에 유서를 보낸다. 하지만 신문사는 유서를 싣지 않았고 도인은 자기의 죽음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게 억울해 죽음을 하루 늦춘다. 짐을 정리하면서 친구나 고향집으로 보내기도 난감한 애물단지가 된 책을 물려줄 아들이 있었으면, 간절히 소원하는 대목은 공감이 되었다.^^ 수첩을 정리하다 8년 전 하숙집 딸 애경과 각별한 사이였지만 도망쳐 온 죄를 용서받고자 찾아나선다. 애경과 엮이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우여곡절 많은 인생의 단면을 경험한다. 결혼상담소를 통한 맞선으로 만난 애경의 정체를 알면서도 사랑하게 된 화학기사, 그는 사람들이 정작 잃어버리고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기억에서 지우고 싶었던 것은 배고픈 고향이었고 참담한 과거였다.  하지만 그보다 세상을 살아갈 열정을 잃어버린 것이 진짜 문제였음을 깨닫는다. 중동 특수 이전의 베트남 특수와, 책을 처분하려던 헌책방의 이야기들은 시대상을 가늠하기에 좋았다. 

1967년과 68년에 발표된 두 작품은 당시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고민하며 어떻게 청춘을 보냈는지 알게 한다. 80년 집권한 군부세력의 광주 만행을 보며 집필의욕을 상실하고 동아일보에 연재하던 '먼지의 방'을 15회로 중단했다는 그분의 성품도 짐작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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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0-20 1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던가 그제던가, 이 책이 중고샵에 있었는데 건졌어야 했는데 놓쳤군요! 순오기님의 리뷰를 그 전에 보았으면 옳커니~하고 잡았을 거예요.^^

순오기 2009-10-21 01:39   좋아요 0 | URL
다시 기회가 오면 확 잡으세요~ 절대 후회하지 않아요.^^

꿈꾸는섬 2009-10-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승옥 작가는 글쓰는 사람들의 본이에요. 글쓰기 연습으로 김승옥님 글을 열심히 옮겨 쓴다고 들었어요. 이 작품은 안 읽어보았지만 순오기님 리뷰대로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순오기 2009-10-21 01:40   좋아요 0 | URL
그런다고 하네요. 해설을 쓰신 분은 무진기행을 100번 읽었다고 하네요.

라로 2009-10-21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제목 한번 멋지다요!!!ㅎㅎ
전 김승옥님의 글을 무진기행만 읽었는데 이렇게 좋다고 하실만 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기필코!!ㅎㅎㅎ

순오기 2009-10-21 01:41   좋아요 0 | URL
흐흐~ 제목 멋지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다 읽고나서 리뷰를 쓰기 전에 제목부터 떠올랐어요.ㅋㅋ

같은하늘 2009-10-21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순오기님 페이퍼에 떠다니던 바로 그책...
드디어 읽으셨군요.^^ 그리고 저도 찜하고 갑니다.

순오기 2009-10-21 11:57   좋아요 0 | URL
헤헤~ 오랫동안 둥둥 떠다녔죠.^^

몽당연필 2009-12-04 0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오기님의 리뷰를 읽으면 이 책을 안 읽을 수 없겠는걸요. ^^
장바구니로 직행합니다. ㅋㅋ

순오기 2009-12-04 07:11   좋아요 0 | URL
하하~ 제가 굉장히 반한 작품이라 침을 튀겼나요?ㅋㅋ
2010년 독서회 토론도서로 찜해뒀어요.^^

몽당연필 2010-09-05 13:36   좋아요 0 | URL
도서관 자원봉사 회원들과 독서모임을 꾸리려고 합니다.
순오기님에게서 많은 비법을 전수받고 싶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