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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 물고기
J.M.G. 르 클레지오 지음, 최수철 옮김 / 문학동네 / 1998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2001년 노벨문학상 수상작인 V.S.나이폴의 장편소설 '흉내'를 140쪽 읽다가 집어 던진 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 문학인 경우라면 더욱 더. 프랑스 영화를 봐도 애매모호하게 끝나 뭔 소린지 잘 이해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읽은 많지 않은 프랑스 문학도 그랬다. 미국영화에 익숙한 것처럼 미국문학에 길들여졌기 때문일까? 하여튼 유감스럽게도 내 이해도가 낮아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읽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황금물고기'는 노벨문학상 수상작 중에 모처럼 술술 읽힌 책이다. 중학교 학부모 독서회 토론도서였는데 라일라의 삶이 안스러워 아름다운 가을 기분을 망쳤다는 회원도 있었지만, 잘 읽히고 무슨 얘긴지 알아 먹을 수 있어 좋았다는 평이 대세였다. ^^
예닐곱 살에 고향 아프리카에서 유괴당해 프랑스로 온 라일라를 사들인 유태인 랄라 아스마는 밤에 왔다고 라일라(밤)라 불렀고, 읽는 법과 프랑스어와 에스파니아어로 쓰는 법을 가르쳤다. 또한 암산과 수학을 깨우쳐주고 종교에 입문시켰으며, 인생의 지혜를 가르쳐 준 사람이다. 이런 아스마를 위해 라일라는 종일 집안 일을 했으며 그녀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에도 잘 보살폈다. 아스마의 아들 아벨은 어린 라일라를 성추행한 파렴치한이었고, 며느리 조라는 수시로 라일라를 학대했다.
아스마가 죽고 조라의 감시에서 도망쳐온 라일라는, 지위고하를 막론한 숫컷들의 절제되지 않은 끝없는 욕망에 위협당하면서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 잘 헤쳐 나간다. 다행히 라일라가 만난 여자들은 좋은 사람이 많았다. 강 건너편 타브리케트 천막촌에서 만난 타가디르, 돈을 모아 프랑스로 같이 도망쳐온 공주(창녀) 후리야, 음악에 눈을 뜨게 한 시몬느, 유산한 채 버려진 라일라를 도와주고 떠날 수 있도록 돈까지 준 인디언 간호사 나다 샤베즈 등은 라일라에겐 은인이다.
끝없이 자유를 갈망하지만 힘겹게 벗어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라일라를 보며, 성장기 환경에 길들여져 새로운 삶을 꾸려가는데 두려움을 갖는 게 아닌가 생각됐다. 하긴 열다섯 살은 새로운 삶에 도전하기는 쉽지 않을 나이다. 끝없이 표류하고 방황하는 한 마리 물고기로 묘사된 라일라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책을 읽고 공부하기에, 뭔가 쨍~하는 성공을 기대했는데 고향 아프리카에 안착하는 것으로 끝난다. 탁류에서 표류하던 물고기가 고향에 돌아왔다고 황금물고기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라일라는 처음부터 황금물고기였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를 가지지 못한 존재였던 라일라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한 적이 없고 항상 타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했기 때문(169쪽)'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표류한 라일라의 15년은 바로 유괴당한 고향 땅으로 돌아와 새로운 인생이 시작될 거라 예감하는 마무리에 아쉬움이 많다. 프랑스인의 정서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작가의 의도를 간파하지 못해서인지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언지 잘 모르겠다. 다만 초승달 모양 금귀고리로 상징된 힐랄 소녀 라일라가, 예언자 마호메트가 속박에서 풀어준 조상 빌랄처럼 마침내 획득한 자유에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근본을 모르고 표류하던 라일라가 근원인 고향으로 돌아온 것은, 그녀의 정체성을 확인하는데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 거론되는 수많은 프랑스 문학은 서너 개 빼놓고는 작가나 작품도 처음 듣는 것이다. 뚜르게네프의 '첫사랑'은 다시 읽고 싶고, 노노의 친구였던 하킴이 선물한 프란츠 파농의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자들'은 어떤 책인지 읽어보고 싶다. 라일라가 만났던 남자 중에 주아니코나 노노, 하킴과 할아버지는 좋은 사람이었다. 충분히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중 생활하는 장 빌랑을 사랑하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도 그를 기다리는 라일라는 끝내 이해되지 않았다.
'르 클레지오의 손에서 태어난 한 소녀의 눈부신 성장기'라는 책 뒤표지에 쓰인 광고 문구와, '순진무구한 천진성'을 가진 소녀라는 번역가 최수철의 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라일라가 강한 생명력을 타고났다는 말은 동의하지만, 라일라가 결코 순진무구하거나 그녀의 삶이 눈부신 성장기는 아니었다.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