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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시간 ㅣ 나남시선 27
박경리 지음 / 나남출판 / 2008년 6월
구판절판
지난 8월 16일 원주 토지문화관과 박경리문학공원에 다녀왔다. 그래서 다시 박경리 선생님 작품을 살펴보게 되었는데, 이 시집을 읽고 가길 정말 잘했다. 박경리 문학공원 전시실엔 '우리들의 시간'이 선생의 자필 글씨로 걸려 있었고, 선생의 단구동 자택을 둘러봤기에 여기 실린 시가 잘 이해되었다.
전시실 입구 계단 위에도 걸렸고, 토지문화관에 가니까 작은 액자로도 걸려 있었다. 선생의 단아한 필체를 만나는 즐거움과 더불어 시를 감상해 보자.
우리들의 시간
목에 힘주다 보면
문틀에 머리 부딪혀 혹이 생긴다
우리는 아픈 생각만 하지
혹 생긴 여유를 모르고
인생을 깨닫지 못한다.
낮추어도 낮추어도
우리는 죄가 많다
뽐내어본들 도로무익(徒勞無益)
시간이 너무 아깝구나
사람은 미련해서 머리를 부딪히면 아픈 머리만 만지며 혹이 생긴 연유를 생각지 않으니 인생을 깨닫기에 아직도 멀었나 보다. 시간이 너무 아깝다고 하신 선생은 당신의 생애에 불멸의 '토지'를 남기셨으니 아깝지 않게 사신 분이다.
단구동 자택을 보곤 선생이 쓴 시에 묘사된 것들이 당신이 사는 환경을 그대로 그려냈음을 알았다. 특히 '꿈2'에 묘사된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이란 구절이 생각나 바로 그 주방의 서쪽 창을 찍었으니 횡재한 기분이다.
꿈2
원주 와서
넓은 집에
혼자 살아온 것도 칠팔 년
늘
참말 같지가 않았다
방문 열면 마루방
덧신 발에 걸면서 한숨 쉬고
댕그마니 매달린 전등불
믿기지 않았다.
.
.
서쪽에서
빛살이 들어오는 주방
혼자 밥을 먹는 적막에서
나는 내가 죽어 있는 것을 깨닫는다
토지문화관에 갔을 땐 일요일이라 근무자가 보이지 않았지만 전시실은 냉방이 되어 있었다. 내가 들어갈 때 2층에서 내려오던 노인(당직자)이 일을 마치고 들어와선 설명을 해주셨다. 그때 중앙에 붙은 이 사진을 가르키며 당시 구두 신은 멋쟁이 차림을 보면 부유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그런데 시집에서도 '하얀 운동화'란 제목으로 당신이 잘 살아서 따돌림 받았던 기억을 그려내었다.
하얀 운동화
어릴 적에
하얀 운동화 신었다고
따돌리어 외톨이 된 일 있었다
비 오시던 날
신발을 잃고
학교 복도에 서서 울었다
하얀 운동화는
물받이 밑에서
물을 가득 싣고 놓여 있었다
나는 짚신 신고
산골서 다니는 아이들을
부러워했다
지금도
나는 가끔
산골 아낙이 못된 것을 한탄한다
선생의 유고시집인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서 '다시 태어나면 일 잘하는 사내를 만나 깊고 깊은 산골에서 농사짓고 살고 싶다'고 하셨으니 빈말이 아니고, 하얀 운동화에도 어렸을 때부터 짚신 신은 산골 아이들을 부러워하고 소박하게 사는 걸 꿈꾸었음을 알 수 있다.
단구동 자택이 택지 개발지가 되자 매지리로 이사하시어 자그마한 살림집을 지어 사셨다. 지금은 따님이신 김영주교수가 한주에 두세번씩 들르며 선생이 키우던 고양이와 개가 살고 있다 한다. '체념'이란 시를 보면 선생이 사시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다.
체념
타일렀지
이곳은 자유의 천지
해야 할 일 충분하고
푸성귀 아쉽지 않았고
거닐 수 있는 울타리 안은
꽤 넓은 편이며
밤에는 소쩍새 우는 소리
타일렀지
이곳은 나의 자유
해방된 곳이라고
21권의 대하소설 '토지'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낸 분이 '시골 노친네가 제법 유식하다'는 계분을 싣고 온 노인의 말을 들으며 면무식은 했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소박하고 겸손한 선생의 모습이 읽힌다.
면무식
밀짚모자를 쓰고
풀을 매는데
계분 실은 경출원 차가 왔다
짐을 부리면서
손가락 하나 잘린
음성나환자 노인이
과수원 하느냐고 물었다
아니요
텃밭에 줄 거요
했더니
노인의 말이
부자인가 보다
아니요
유기농을 해야 딸이 살지요
빤히 쳐다보며 노인은
시골 노친네가 제법 유식하다
호미를 들며
네 면무식은 했지요
멀리 논에서
개구리 우는 소리
2001년 11월 11일, 하동군에서 '토지'에 묘사된대로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제'에 선생이 오셨다. 광주시교육청의 학부모 문학기행에 참여했던 나는 당당한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었다. 선생을 뵈었기에 토지를 사면서도 망설이지 않았었다. 선생이 남기신 토지는 20세기 최고의 한국문학으로 꼽히고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함에도 부족하지 않다. 2001년 선생을 뵈었고, 2004년 토지를 완독했고, 2009년 선생의 흔적을 찾아 원주를 다녀왔으니 무엇을 더 바라리오!
선생은 단구동 자택 저 책상에서 토지를 쓰고 윗목에서 주무셨다고 한다. 선생은 시집 서문에서 시를 쓴다는 것은 큰 위안이며 당신의 유일한 자유공간이고 버팀목이었다고 한다. 창작이 아니라 그냥 태어나는 것 같이 시를 쓰지만 늘 미숙하고 넋두리를 하소연하는 것 같아 꺼림칙하고 쑥스럽다고 하셨다. 한 편 한 편에서 선생의 정신과 삶의 자세를 발견하며 경건함에 이르게 하는 시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