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광주까지 7시간이 걸렸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한 시간 거리의 시댁이 참 고맙다. 내가 인천에서 살았다면 민족의 대이동이라는 저 대열에 합류했을 거라고 상상하면 겁난다. 명절마다 고향을 찾느라 고생하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우린 설 전날 아침 10시에 집을 나서 광주 무안 고속도로를 이용하니 한 시간이면 족하다. (사진 시간에서 - 40분)

아이들이 어려야 설 분위기도 산다. 곱게 차려 입은 한복 만큼이나 세뱃돈을 기대하는 아이들의 눈빛이 반짝여서 좋다. 우리 아이들 어릴때만 해도 그랬는데, 이젠 막내가 열다섯이니 반짝이는 눈빛보다는 '세뱃돈 많이 벌어야지(?)...' 음흉한 계산이 작동한다. 

93년 1월 우리 큰딸이 네 살, 증조할머니께 천원짜리 세뱃돈을 받는다.^^ 아버님이 빳빳한 새돈을 담아 봉투를 드리면 하나 둘 헤아려서 증손주와 손주들에게 주셨다. 곱고 단아한 모습으로 한 세기를 넘겨 102살까지 사셨으니, 이 사진 이후로도 10년이나 지속되었던 설날 풍경이다.   

증조할머니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큰엄마 큰아빠~~ 순서대로 세배를 마치면 큰집 조카들은 우리 민주에게 절을 받고 세뱃돈을 주며 즐거워했는데 이젠 결혼을 앞둔 꽉 찬 나이가 되었다. 이번 설에는 예비고딩인 우리 둘째에게 '물 흐르듯이 살면 안된다'는 당부의 말을 전하며 금일봉까지 하사해 온당지기의 모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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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설에는 아이들이 팀을 짜서 전도 부치고 만두도 만들어, 20년째 전을 부치던 나는 처음으로 손을 놓았다. 그럼 뭘 했냐고? 전과 만두 소를 준비하고 드디어 생선을 찌는 자리로 등극했다. 그동안 큰동서의 지휘하에 나물은 했어도 생선을 찌는 건 20년 만에 처음 했다.^^  

아이들이 크니까 왜 여자들만 일하고 남자들은 먹고 즐기기만 하냐면서 자기들 세대에선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강력하게 제기됐다. 서른이 된 조카는 곧 결혼하면 자기 색시 고생할까봐 주방에서 살거라는 큰엄마의 설득으로 큰조카는 빼고, 성주도 큰엄마와 짝을 이뤄 고기전도 부치고 만두도 빚었다. 사실 남편은 내가 안 키웠으니 뭐라 할 말 없지만, 시대가 시대인지라 내가 키우는 아들은 청소기며 설거지를 시켜서인지 음식하는 것도 손에 익은 듯 잘 해냈다. 우리 아들은 반드시 '사랑받는 남편'이 되게 할거얌!ㅋㅋㅋ 좁은 주방에서 옹기종기 일하느라 사진은 따로 따로 찍었다. 보장되지 않는 초상권을 스스로 지키는 컨셉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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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빚은 만두를 쪄냈다. 김치를 넣은 것과 넣지 않은 두 가지라 색깔이 다르지만 김치만두가 인기 있었다.^^



이번 설에는 차 문화를 즐기는 큰아주버님 덕분에 우아하고 고상하게 차 강의를 들었다. 일명 '물고문'이라 불린다. 설 전날엔 민주가 큰아버지와 차를 마시며 장장 3시간에 걸친 강의를 들었는데, 차를 즐기는 친구 덕분에 관심이 있었는지 큰아버지의 명강의를 즐긴 듯하다. 찻잔도 하나 얻었고 다음에 친구를 데려오면 차를 대접한다고 약속했다면 좋아했다.

 

설날엔 남자들만 성묘를 다녀왔고, 민주는 처음으로 설거지를 하느라 고생했다. 대학생이라고 세뱃돈도 두둑이 받았으니 권리만 누리지 말고 의무도 행하라는 엄마의 압력에 의한 봉사였지만 느낀게 많은 듯.^^ 오후엔 막내 시누이네가 와서 점심을 먹고 시숙님의 다문화 강의 2탄~~~ 우아하게 차를 마시며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좋았다.



차를 즐기는 사람들끼리 공유하는 세계에 우리도 한발을 디딘 셈이다. 막내 시누이와 우리 남편은 진즉 다구를 얻어 즐기기 시작했는데, 이번에도 각종 차와 자사호를 하나씩 얻었다. 오른쪽이 우리집에 온 것. 덩치나 색상을 봐선 왼쪽 걸 고를 줄 알았는데 작고 깜찍한(?) 마누라 고르듯 오른쪽 걸 골랐다.ㅋㅋㅋ

 

보이차는 우리나라 스님들이 먼저 마시기 시작해 3~40년쯤 되었고, 녹차는 오래되면 안 좋아지는데 보이차는 오래될수록 좋은 차가 되어 가보로 물려주기도 한단다. 첫물은 버리고 두번째부터 보통 다섯 번까지 우린 차를 마신다. 처음 마신 차는 철관음, 생차는 일반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든 차, 인위적으로 숙성시킨 차를 숙차(와인색이 나지만 탁하고 맛이 달달하다), 산차(덩어리지지 않고 잎이 하나 하나 떨어진 차로 향은 강하지만 색이 옅고 맛은 떨어진다) 광운공병은 와인색이 나고 맑은데 구하기가 어렵단다.  

내가 경험한 생차는 녹차향이 나고 숙차는 지푸라기 같은 향이 났다. 초보자가 오묘한 맛의 세계를 감지하거나 표현할 능력이 없으니 이 정도로... 우린 2~3년 된 차부터 10년 20년 된 차를 마셨는데, 민주는 거의 3시간 가까이 강의를 들으면서 더 마시겠다고 해서, 큰아버지도 일년에 한번 마신다는 40년 된 차를 마셨단다. 우리 딸은 큰아버지의 다문화를 전승할 수제자(애제자)의 자리에 오른 듯하다.^^ 



자사호(자사로 만든 차주전자?^^) 자사는 오래될수록 좋은 품질로 인정하기에 호에도 뜨거운 물을 자주 부어주면 색깔이 변하고 촉감도 부드럽게 된단다. 다른 차를 마실때마다 호를 다른 것으로 해야 차의 맛과 향을 구별할 수 있단다. 여기 보이는 자사호가 일곱 개니까 우리가 마신 차도 일곱 가지였다는 것~~~  



포대화상인데, 뒤에 자루를 달고 다니며 구걸해서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고 한다. 요것도 자사로 만든 것으로 여기에도 자주 차물을 부어준다.  아래 우렁이도 같은 용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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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탄남자 2009-01-28 0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대가족입니다. 설날 만두는 중부지방 이상의 사람들만의 음식인줄 알았는데, 남도에서도 하는군요?

프레이야 2009-01-28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엄마표 만두 생각이 나요. 저도 결혼 전 명절이면 꼭 여동생이랑 만들었는데
지금은 안 만들어요. 엄마도 손맛이 변했는지 별로 맛이 없더라구요 ㅎㅎ
오기언니 정말 부러운 가족풍경이야요. 큰아버지의 차사랑을 민주가 이어받겠네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bookJourney 2009-01-28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복한 대가족 풍경이에요~ ^^
보이차에 생차와 숙차가 있군요. 제가 마신 것은 지푸라기(또는 흙 ^^;) 향이 나는 숙차였던 모양이네요. 고급 차라고 하는데 저는 영~ 적응이 안되더라구요.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조선인 2009-01-28 0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눈 휘둥그레지는 수집품입니다. 저도 언제 사사받을 수 있음 좋겠어요. @,@

전호인 2009-01-28 0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으로 다복한 가정과 가족들입니다.
명절의 전형적인 풍경은 가족과의 만남후 서로 명절에 맞는 음식을 만들고 먹으며 나누는 가족끼리의 훈훈한 대화이지요. 점점 메말라가는 도시의 가족 풍경이 안타깝다면 옛스러움이 그대로 남아있는 시골의 가족풍경은 정을 잊고 살아가는 요즈음의 세대들에게 반성의 기회와 더불어 전통을 살려가야 한다는 사명감까지 느끼게 합니다.

하늘바람 2009-01-28 09: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복하고 좋네요
부럽습니다

행복희망꿈 2009-01-28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부들은 힘들지만 그래도 이렇게 명절이 있으니 가족들이 다 모일수 있잖아요.
일년에 몇번 되지않으니 다행이기도 하구요. ㅎㅎㅎ
순오기님 몸살은 나지않으셨나요?
올해는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왕성한 활동하세요. ^*^

순오기 2009-01-28 15: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로그인하지 않고 살짝 눈팅만 하고 영화보러 가려는데~
주렁주렁 댓글 남기신 분들이 많아 고맙단 말씀 남겨요.^^

실비 2009-01-28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만으로 봐도 왠지 푸근하고 든든하네요...

쟈니 2009-01-28 2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의 어린 시절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보니 따뜻하고 부러워요~~ ^^ 포대화상의 싱글벙글 웃음도 좋네요~~ 소의 해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Kir 2009-01-29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훈훈하고 보기 좋은 광경이네요. 순오기님 댁 아이들이 참 부럽습니다...

해숨 2009-01-29 2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옛날 사진이 절 로긴하게 만드네용... ㅋㅋㅋ
저도 없는 사진인거 같은뎅...
어렸을때도 오빠랑 저랑 세배받는걸 즐거워하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네용~
자주자주 놀러올께요~~~

순오기 2009-01-30 06:52   좋아요 0 | URL
앗~ 수미?ㅎㅎㅎ내서재는 로긴 안해도 댓글 달 수 있는데...^^
한복 입은 사진 내가 찍고 민주 앨범에만 끼웠나봐~~ 설날 카메라 들기 미안해서 못 찍었는지 민경이가 한복 입고 찍은 건 안보여서, 민경인 자기만 없다고 난리고~~~ㅋㅋㅋ

wispond 2009-01-29 2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쓰셨네요.
잘 계신지요?.
두가지 정정해 드립니다.
우리나라에서 보이차를 마시기는 30-40년 정도되며
맨 아래 사진은 '달팽이'가 아니라 '우렁이'입니다.
날마다 즐거운 날들되기시 바랍니다.

순오기 2009-01-30 06:51   좋아요 0 | URL
뉘신지요?
보이차 마시기는 3~40년, 일단 수정했는데 이번 주말에 다시 가니까 '도사'님께 여쭤볼게요. 내가 잘못 기억했을 수도 있거든요.^^
우렁이라고 생각하며 글자는 달팽이로 쓴 듯...제가 촌사람이라 우렁이 잡으며 컷거든요.ㅋㅋㅋ
고맙습니다~ 제가 이래서 알라딘을 살아있는 백과사전이라 부르지요.^^

2009-02-02 21:39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아빠세욤...
작은엄마 댓글이 달렸는지 다시한번 가보라구 어찌나 재촉하시는지....
저글도 엄마랑 아빠랑 너무 재미있게 보셨답니다!

순오기 2009-02-03 08:43   좋아요 0 | URL
민주랑 댓글 보고 '큰아빠'일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수할까봐~ ^^
엄마랑 아빠가 재미있게 보셨다고~~ 아웅 부끄러워라!
이번 주말에 봐~~ ^^

후애(厚愛) 2009-01-30 07: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풍경입니다.^^
다구는 깜찍하면서도 곱네요. 이곳은 깜찍하고 곱게 생긴 다구가 없는지 모르겠네요. 있으면 바로 구입을 할텐데 말이지요. 너무 아쉽습니다.^^;

순오기 2009-02-22 11:50   좋아요 0 | URL
가족이 함께 한다는 건 아름답지요~ ^^
미국에선 고운 다구를 만나기 어려운가 봅니다. 한국 오실때 사 가시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