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광복절을 기념하며 -땅은 우리민족의 목숨이었다

내가 토지를 처음 접한 건 최수지가 '최서희'역으로 나왔던 TV드라마였다. 21권으로 완간된 책을 산 건 2002년 1월이었고, 그 책을 완독한 건 2004년 3월 10일 수요일 오전 10시 37분이었다. 40일만에 토지 읽기를 끝낸 감동은 굉장했었다. (먼댓글)
박경리 선생의 이름을 들은 건 중고등학교 국어책에 제목만 실렸던 '파시'때문이었다. 문학소녀를 자청했던 난, 그 작품을 찾아 읽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의 감동을 되살리려고, 초등학교 학부모독서회에서 2002년 '김약국의 딸들'과 2004년 '토지'를 토론했기에 대가의 작품을 탐독할 기회를 다시 얻었다. 그 후 TV아침드라로 방송되었던 '성녀와 마녀'를 만났고, '김약국의 딸들'은 원작과 많이 달라 도중에 시청을 접었다.


다행히 '토지'를 읽기 전에 박경리 선생을 뵐 기회가 있었다. 하동군에서 '토지'에 묘사된대로 '최참판댁'을 복원하고 가진 '제1회 토지문학제'에 그분이 오셨다. 2001년 11월 11일 광주시교육청의 학부모독서회 문학기행에 참여했기에, 당당한 그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었다. 그분을 뵈었기에 그 후 토지를 사면서도 망설이지 않았고......

팜플릿 아래 사진은 '토지'에 묘사된대로 복원한 최참판댁과 초가집은 별당아씨의 초당이다.

박경리 선생은 전야제부터 참석하셨고, 함께 온 많은 문인들을 뵙는 것만으로도 우린 좋았다. 하지만 하동군청의 이 행사를 박경리선생은 썩 달가와하지 않으셨다는 후문으로, 하동군에선 최참판댁과 전시관을 세우고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때문에 '평사리문학관'으로 명명했다.

당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었던 그분을 응원하는 현수막도 걸렸다. 우린 일정상 백일장엔 참여하지 못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 아쉬움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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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선생은 사진 찍는 걸 싫어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면서도 감히 찍을 수 없었다. 그런 대가를 사진으로 남기고 싶은 엄마들의 마음을 이해하셨는지, 함께 오셨던 박완서선생은 기꺼이 함께 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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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공지영의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한 것이다'에 거론된, 박경리선생의 'Q씨에게'를 구입하려다 절판이라 못 샀다. 4월 25일 뇌졸중으로 쓰러진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웠는데, 5월 5일 눈을 감으셨다니 그분께 경의를 표하며 명복을 빈다. 작년 7월 폐암선고를 받고도 치료를 거부하고 겸허히 받아들이셨단 기사에 울컥~ 했었다. 우리시대 최고의 문학산맥이었던 그분은 평생의 역작이었던 '토지'를 남기셨기에 편히 눈을 감았으리라... 장례위원장이신 박완서선생께서 편안히 눈감으셨다고 전하는 걸 뉴스에서 보았다. 이제는 다시 뵐 수 없는 분이기에 남겨주신 작품으로만 만나야 하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