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 선생님이 가정방문을 하셔도 봄맞이 대청소도 안하고 굳세게 버티던 순오기. 토요일엔 아침부터 물청소를 하느라 분주했다. 시아버님이 오신다기에... 흐흐흐, 며느리에겐 선생님보다 시아버지가 더 무서운가 보다. 20년을 선씨네 며느리로 살아왔으니 시아버지가 어렵기야 하겠냐만서도, 결혼 선물로 주신 '福生淸儉(복은 청결하고 검소함에서 나온다)'이란 말씀이 거실에 떡하니 붙어있으니, 검소하게는 살아도 청결과는 거리가 멀게 살았는지라 부랴부랴 청소 시늉이라도 내야했다.^^

집앞 시장에서 장을 봐서 기본은 국이고 두어가지 나물로 2박 3일의 식단을 짰다. 앞으로 함께 살 수 있을까 연습하러 오시는지라, 특별히 잘 해 드리기보단 우리 사는대로 편안하게 모시려고 생각했다. 약주를 좋아하시는지라 안주를 만들어 막걸리도 한 사발 드리고...... 음, 토요일이 마침 민경이 생일이라서 약밥을 만들어 촛불을 밝히고 함께 축하 노래도 불렀다. 이런 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하는데, 시아버지가 어려운가 사진도 못 찍었다.^^ 과자도 안 사왔다며 일만냥의 하사금을 내려 주시니 녀석들은 헤벌죽~ 입이 귀에 걸린다.  

우린 아이들 생일에 미역국을 안 끓이고 지들이 좋아하는 '육개장'을 끓인다. 그래서 토요일은 육개장으로, 일요일은 냉동실의 매생이와 석화(굴)를 해동시켜 '매생이국'을 끓였다. 전라도살이 20년에 나름대로 전라도 맛을 내는지라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다. 오늘 아침은 이웃에서 가져온 토란을 벗겨 '토란국'을 끓였다. 내가 토란탕을 먹어보긴 했어도 직접 끓인 건 처음이니, '토란탕 처녀작' 되겠다. ^^

아침에 비몽사몽이었는지 옆집 엄마가 가르쳐준 게 아무 생각도 안나서 맹물에 들깨가루만 잔뜩 넣고 끓였다. 맛을 본 우리 남편 왈, "여기에 된장도 풀고 소고기나 석화를 넣어야 하는데... " "아~ 맞다. 민수엄마가 된장도 넣고 소고기 없으면 석화 넣으라 했는데, 생각도 안났네..."  뒤늦게 된장을 살짝 풀고 드렸더니 그래도 맛있단다. 흐흐~ 정말 맛이 있어 맛있다 하셨는지 모르지만, 점심엔 정석대로 다시마, 양파, 마늘 넣어 국물을 우려내고 석화도 넣고 된장을 풀어 제대로 끓였다. 아버님 모시러 왔던 두 시누이들이 먹어보고 "쟈가 이젠 전라도 며느리 다 됐네."라고 평가했고, 이 말에 고무된 순오기 오늘 아침 다시 찐 약밥이랑 남은 토란탕을 다 싸서 드렸다.

2박 3일 나름대로 열심히 음식 만들어 드렸더니, 진수성찬도 아닌데 종일 주방에서 살게 되더라는... 그래서 알라딘도 한번 못 들어오고 밤에는 피곤해서 그냥 잤다.^^ 음, 이 정도 반찬 만드는 것도 종일 주방살이라면 앞으론 어떡해야 할까? 당분간은 이렇게 한번씩 다녀가겠다 하셨으니, 언제든 반찬 만들 수 있도록 준비해놓고 살아야겠다. 대충 먹고 살던 우리 식단이 그래도 사람답게 먹고 살 수는 있을 것 같다. ㅎㅎㅎ

*시누이들에게 '식객 19권'을 대여해줬다. ㅎㅎ '박시백의 조선왕조 실록'도 탐냈는데 우리 남편이 보는 중이라 다음에 빌려주기로 했다. 이 책을 사들인 책값이 얼만데... 맛난 거라도 가져오는가 봐서 앞으로 대출을 결정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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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송이 2008-03-17 2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님 진지 차려 드리느라 애 많이 쓰셨어요.^^;;
함게 살지 않으시면서 이렇게 2박3일 다녀가신다 생각하면 정말 신경 많이 쓰이시는 거 잘 알아요.^^;; 종일 종종걸음 치셨을 님께 토닥토닥!! 안마라도 해드리고 싶어요.
아버님께서 함께 살자고하시는 순오기님 마음 달래주시느라 이렇게라도 다녀가시는군요.
다소 힘들더라도 마음을 담아 부모님을 섬기는 것이 자식된 도리인 것 같아요.
일만냥~~ 하니까 아주 무진장 큰돈으로 들려요.^^ 애덜은 좋겠다~~ 가만 있어도 용돈도 주고.^.~

순오기 2008-03-17 23:02   좋아요 0 | URL
ㅎㅎ 음식 만드는 거보다, 시아버님과 말동무 해드리느라...거의 회복되던 목소리가 조금 잠겼어요.^^ 애덜은 그걸 자기돈이라 생각하죠? 사실 부모로부터 발생되는 돈인데요!^^

애물단지no.1 2008-03-17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엄마가 사진을 못 찍었다니!!
요즘 들은 얘기 중 가장 충격이었던 '새우깡에서 나온 쥐머리'만큼 충격적인 소식이야.
나, 댓글은 다 안 달아도 엄마 글은 다 보고 있어. 소식없어도 걱정마.ㅋㅋ
엄마, 화이팅!!!

순오기 2008-03-17 23:04   좋아요 0 | URL
ㅎㅎ사진 찍기가 좀 그렇더라~ㅋㅋ
엄마는 일단 내품에서 내보냈으면 원격조정 같은 거 안 하니까, 알아서 잘 살고 잘 있으리라 믿는다. 동대문 가서 옷 사온거야?

bookJourney 2008-03-17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며칠 뜸하시길래 시아버님께서 다녀가셨거나 민주한테 가셨나보다 했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군요. 신경 많이 쓰셨겠네요~ 2박 3일 애쓰신 순오기님께 박수를~~~

순오기 2008-03-17 23:05   좋아요 0 | URL
ㅎㅎ 그게 그렇더군요. 괜히 피곤해서 알라딘 들어오기도 귀찮은 증상 ^^
함께 사는 님이야말로 박수를 받아야 할 며느리죠!^^

조선인 2008-03-18 0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원래 전라도분이 아니신가봐요? 우리 어머니가 절대 결혼하지 말라고 한 게 경상도(평생 경상도남자들에 치여서), 그 다음이 전라도(니 음식솜씨로는 소박맞기 딱 좋다고). 덕분에 전 충청도 남자랑 결혼해서 생선도 못 구워 먹고 산다죠.

순오기 2008-03-18 11:23   좋아요 0 | URL
ㅎㅎ제가 충청도 츠자였잖아요.^^ 울아버지가 절대 반대한 전라도 남자랑 결혼해 살다보니 그런대로 전라도화 되더군요. 음식은 사실 전라도가 알아주잖아요.^^ 나도 충청도 살땐 동태와 갈치나 고등어 같은 저림 생선만 알았다죠.ㅎㅎ이젠 확실한 전라도아낙네가 됐어요.ㅋㅋㅋ

무스탕 2008-03-18 0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서울 토박이인데 전라도로 시집간 1인이라지요. 14년 만땅을 살았어도 아직 시어머니 절반도 못해요 -_-;;
주말동안 애쓰셨어요. 주물주물 어깨랑 종아리랑 주물러 드릴께요 :)

순오기 2008-03-18 11:25   좋아요 0 | URL
ㅋㅋ전라도로 시집간 사람들 한번 집합하라 할까요?ㅋㅋ
나는 3년 사니까 친정 김치가 맛없던데요.ㅎㅎ그후론 전라도식으로 담가요.
어머니들 음식맛이야 어디 따라가겠어요? 그저 쬐끔 흉내낼 뿐이죠!^^

세실 2008-03-1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어쩜 이리 딱 떨어질까요~~~
편안해 하셨을 아버님 모습이 눈에 그려집니다. 앞으로는 더 자주 오실듯^*^ㅎㅎ
아웅 약밥 먹고 싶어요.

순오기 2008-03-18 23:05   좋아요 0 | URL
ㅎㅎ 제목이 괜찮은가요?
제가 약밥도사에요. 우리딸 기숙사에 있는 동안 한달에 두어번씩 꼭 해다 줬더니 질려서 큰딸을 잘 안 먹어요. 그냥 충분히 불린 찹쌀에 필요한 재료 넣어 밥하듯 하면 돼요. 전 전기압력솥에 그냥 하거든요.^^ 음, 내가 세실님 만나러 청주로 날아갈 때 약밥 해다 줘야겠당!^^

프레이야 2008-03-18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름다운 동거~ 다이어리 기대할게요^^

순오기 2008-03-18 23:07   좋아요 0 | URL
앗, 아름다운 동거~~~ 멋진 제목이에요. 역시 혜경님은 싯적 센스가 돋보여요. 나중에 함께 살게 되면 이 제목으로 카테고리 만들게요. 저작권료는 혜경님께 드리고...^^

마노아 2008-03-18 2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알흠다운 며느리를 어느 시아버님이 사랑하지 않을까요. 주말 내내 애쓰셨어요. 맘씨가 더 예쁜 순오기님, 포옥 안아드리고 싶어요!

순오기 2008-03-18 23:08   좋아요 0 | URL
ㅎㅎ 나만 즐겼는지도 모르죠. 열심히 수다 떨며 말동무해 드렸더니 목소리가 다시 좀 가라 앉았다니까요! ㅋㅋ 마노아님 품에 폭 안겼어요. 아~ 포근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