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날들을 일년 가까이 반복한 끝에 은하는 어떤 체념과 자기극복이 깃든 묘한 평화에 이르렀다. 이후에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발병 이전처럼 살지는 않을 것이며 그런 삶에는 오로지 고독, 크기를 잴 수없이 크고 깊은 고독만이 필요하리라는 결론이었다. 그것은 어느 흐린 날 거리를 걷다가 낙엽이 떨어져내리는 가로수 밑을 지나거나, 어느 늦은 시간 택시를 타고 강변북로를 달리다 한강에 어른대는 불빛들을 애잔하게 바라볼때와는 차원이 다른 고독이었다. 설명하자면 아주 무섭도록 자기 삶 속으로 포섭된 고독이었다. 참여자 없는 연극이자 듣는 이 없는 아리아, 만남이 불발된 채 혼자서 나누는 열렬한 악수 같은 것. - P13

어른들에게는 그렇게 까마득한 고독 속으로 굴러떨어져야 겨우 나를 지킬 수 있는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 그런 구덩이 안에서 저 혼자 구르고 싸우고 힐난하고 항변하며 망가진 자기 인생을 수습하려 애쓰다보면 그를 지켜보는 건 머리 위의 작은 밤하늘뿐이라는 것.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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