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할 때 지켜야 할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답니다.


1. 말의 내용보다 어조가 더 중요하다

2. 너무 자주 불만을 쏟아내면 안 된다

3. 상대의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비판한다

4. 자신의 말을 들어달라고 상대에게 미리 말한다

5. 상대를 추궁하지 않는다.

저자는 1번과 2번이 가장 중요하답니다.

어떤 때는 재채기가 나오는 것처럼 자기도 모르게 불평을 터뜨릴 때가 있는데 자칫하면 자신이 휘두르는 칼에 찔릴 수가 있으니 앞을 내다보고 생각하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권고합니다.

말로는 쉬운 얘기인데 실행하기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 없이 한 말로 친구나 가족에게 상처를 주고 의를 상한 일이 더러 있을 겁니다.

화내기 전에, 비판하기 전에 다시 한번 새겨볼 말입니다.

by..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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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우야,

아침에 아빠가 쉬는 날이라서 늦잠을 깨고 보니 넌 학교에 가고 없더구나. 몸이 시원치 않아서 오고 가는 유행병은 빠지지 않고 병치레를 하는 너이니 "날씨가 갈수록 추워지니 차라도 태워 학교에 보낼 걸"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단다.

네가 "야간 자율학습시간엔 학교에서 난방도 안 해준다"며 떨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네 엄마에게 들은 것도 맘에 걸리고…

그런데 아빠는 널 차로 등교시키는 일을 마땅치 않아 한다는 걸 너도 알 거다. 사실 아빠는 출근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내 차로 널 태워다 주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면 자주 오지도 않는 버스를 찬바람 맞으며 기다릴 시간도 덜고, 탔다 해도 만원버스에 시달리지 않고 상쾌한 기분으로 공부할 수 있으니 너로서는 아빠가 야속할 지 모르겠다.

하지만 아빠 생각은 다르단다.

우리 나라가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다는 둥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련다. 우리 나라 학생들 모두가 차를 타고 등교할 형편이 아니란 것도 넘어 가자.

다만 아빠는 네가 학생이니 학생답게 컸으면 좋겠다. 몸이 불편한 곳이 없으니 남들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부대끼기도 하고, 아니면 마침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학교가 있으니 걸어 다녀도 좋겠다.

그것이 지금 잠을 조금 더 잘 수 있고 조금 더 편히 등교하는 이로움보다 네게 더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아빠도 그런 면이 없지 않지만 사람이란 편하게 편하게, 쉽게 쉽게 사는 길만 찾아다니다 보면 당초 목표했던 곳과는 달리 엉뚱한 곳에 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단다.

또 늘상하는 얘기지만 땀 흘리지 않고 얻는 것 치고 길게 봐서 이로운 것은 없다.

그러나 혹 모르지. 몇 달 지나서 네가 고3이 되어 시간이 정말 황금같이 여겨지거나 눈비가 내리거나 영하10도 쯤의 동장군이 몰아친다면 아빠가 네 엄마 등쌀에 못 이겨 아침에 눈 비비며 운전대를 잡고 널 학교로 데려갈 지. 어쨌든 그러기까진 우리 정우, 씩씩하게 학교 다녀야지. 아빠는 널 믿는다.

by.. 김성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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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__왕 2007-01-09 15: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는 책들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한 번 읽어보는 것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참으로 선하게 살기 위해 우리는 추수에 대한 희망 없이 선의 씨앗을 뿌리는 법을, 희망 없이 인간을 사랑하는 법을, 그리고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의무를 다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런 비극적 세계관 속에서도 언제나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김상봉 호모에티쿠스)

우리사회에서 착하다는 말이 칭찬이라기보다는 비난으로 쓰일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뭔가 모자란 듯 하고 자기 자신을 챙길 줄 모르는 소위 '순둥이'들을 부르는 단어가 된 것 같습니다. 특히 학생들이나 젊은 층에서는 누가 자신을 착하다고 하면 모욕을 느낄 것도 같습니다.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낙오되기 똑 참하다는 말처럼 들리니까요.

게다가 착하다는 말에는 '순종'이라는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부모님 말씀을 잘 듣고, 선생님 말씀을 잘 따르는 '착한 아이'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에 출간된 '착한 여자 콤플렉스'라는 책도 떠오릅니다. 그러나 착하다는 말이 남의 강요를 받아들이는 비굴한 복종과 같은 말일까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단어가 오염된 탓이겠지요. 그럼 말의 바른 의미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착하 게 사는 것일까요.

김상봉 교수의 말을 빌면 우리가 선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참된 긍지가 필요합니다. 스스로가 비열하고 천박한 것을 넘어 더욱더 높은 정신적 이상을 향해 상승하려는 열망 말입니다.

그 다음엔 타인의 고통에 대해 관심을 갖아야 하겠지요. 남의 아픔과 슬픔에 대해 연민과 동정심을 갖지 않으면 우리의 긍지는 공허한 자만심에 불과하거나 한낱 정신의 허영으로 전락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론 우리 모두의 삶에 대한 관심입니다. 보편에 대한 고려 없이 너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는다면 자기만족에 그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착하게 산다는 것. 즉 윤리적으로 산다는 건 어쩌면 지금처럼 제동장치가 고장난 무한경쟁 사회에서는 안 어울리는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모두가 돈과 명예나 쾌락을 좇아 경주마처럼 달려간다면 우리의 메마른 삶이 어떻게 나아질 수 있겠습니까. 바쁘고 힘들더라도 따뜻한 눈으로 세상을 보길 바랍니다.

by.. 배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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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대가 그대 자신을 사랑한다면, 그대는 모든 사람들을 그대 자신을 사랑하듯 사랑할 것이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서 재인용)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에 '비공개(GUILTY BY SUSPICION)'란 작품이 있습니다.

1950년대 미국사회를 휩쓸던 매카시즘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평화주의자"라고 외쳤던 찰리 채플린이 미국을 떠나며 "예수가 미국 대통령이라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던 바로 그 때입니다. 주인공 로버트 드니로(극중 데이비드)는 '밥과 양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물입니다. 당시 할리우드 최고의 감독으로 환대 받던 그는 남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매카시의 광풍은 그의 사소한 과거를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습니다.  그가 10여년 전에 소련의 굶주린 아이들을 돕기 위한 공산당 집회에 두어 번 나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권력자들은 늘 그렇듯이 약점을 파고듭니다.

함께 있던 사람들의 이름을 대면, 친구의 이름을 대면, 너만은 없던 일로 해주겠다고…. 데이비드는 이를 단호히 거부합니다. 내가 친구의 이름을 대면 그의 가족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이 소박한 묵비권은 그의 삶을 바닥으로 떨어뜨립니다. 친구들은 노골적으로 그를 피하고 삼류영화는커녕 구멍가게의 판매원 자리도 빼앗깁니다. 남은 것은 FBI의 감시 뿐 입니다. 그래도 그는 당당하게 버팁니다. 이 영화에 까메오로 출연한 마틴 스코시즈 감독의 대사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내가 만약 친구의 이름을 말한다면 나는 평생 거울을 볼 수 없을 거야.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는 게 좋아"

자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온 한 사내의 조용하지만 뜨거운 목소리입니다. 자신 을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인지를 깨닫습니다. 자기애(自己愛)는 일반적으로 이기심이나 정신병의 한 증세로 이해되어 왔습니다. 나르시시즘처럼 말입니다.

자신이 하고 싶다고 맘대로 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프롬의 말처럼 사랑이란 책임과 존경을 포함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모든 사고와 행동의 출발은 자신일 뿐입니다.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생각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남의 생각을 존중해 줄 수 있고 자신의 삶을 사랑해야만 타인의 삶도 사랑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른 아침 거울 속에 비친 당신 모습이 정말로 보기 좋기를 기원합니다.

by.. 배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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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때에도 인간이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가령 세계의 종언이 명백하더라도 자기는 오늘 사과나무를 심는다는 것이다." 게오르규 -25시-

며칠 전, 한 수험생의 자살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녀가 유서에 남긴 '어머니를 위로해 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죄송하다' '인생의 낙오자란 말을 듣게 될까 두렵다'라는 말이 송곳처럼 가슴에 박힙니다.

그녀의 절망이 얼마나 깊었기에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생을 접어야만 했을까요. 시험 점수가 잘 안나왔다고 부모님께 미안해하던 그 착하고 여린 마음이 가슴을 더욱 아프게 합니다.

이 죽음의 일차적 원인은 언론에 있는 듯이 보입니다.

모두들 성적이 올랐다는 성급한 보도가 그녀를 외롭고 고통스럽게 만들었겠지요.

더 큰 책임은 수능시험 한번으로 대학을 결정짓고 그 대학에 따라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우리 사회의 시대착오적 행태에 있습니다. 능력보다 학벌이, 개인보다 배경이 더 중요하다고 바라보는 일부의 지독한 '사시(斜視)' 말입니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다른 곳에 모두 돌리고 나면 인간이라는 존재는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죽음을 생각합니다. 가난 때문에, 사랑 때문에, 취업 때문에, 굴욕 때문에…. 그러나 삶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고 그 끈을 놓아버리는 것만큼 비겁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허약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공부를 못하고 대학에 못 간다고 해서 낙오자가 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목숨을 걸만한 일은 더더욱 아닙니다. 인생의 거대한 전쟁에서 단 한 번의 전투에서 졌을 뿐입니다. 창공의 새들도 처음엔 날기 위해 몇 번이고 땅에 머리를 처박았겠지요.

만약 추락의 두려움 때문에 날갯짓을 포기한다면 그 새는 영원히 날 수 없을 것입니다. 시련은 우리를 단련시키는 기회입니다. 그 칠흑 같은 절망을 이겨내고 새처럼 새롭게 도전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지금과 같은 고민 없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게 사회도 바꾸어야겠지요. 소녀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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