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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을 엄마 없이 어떻게 살았나 몰라.”

다시 만난 엄마에게 딸은 이렇게 말한다. 미워하고 외면했던 엄마인데, 사실은 한시도 엄마를 잊은 적이 없었나 보다. 딸 또한 자신의 엄마와 똑같이 ‘딸을 위해 사는 엄마’가 되어 있다. 부둥켜안은 두 사람, 서로 닮았다.

21일 개봉한 영화 ‘귀향’(15세 이상)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에게 스페인의 거장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이 바치는 헌사. 각본을 쓰고 촬영을 하는 동안 늘 어머니가 곁에 있는 것 같았다는 알모도바르는 “나는 삶의 원류이자 이야기의 시작인 모성(母性)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또 영화에서 실제 고향인 라만차로 돌아갔다. 어머니에게로, 고향으로, 이 영화는 인간이 자신의 근본으로 돌아오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출연한 다섯 명의 여배우는 올해 칸 영화제에서 공동으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고 감독은 각본상을 받았다.

무능력한 남편, 사춘기에 접어든 딸 파울라(요아나 코보)와 함께 마드리드에 사는 라이문다(페넬로페 크루스)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하는 억척 여성. 어느 날 파울라가 “친 딸이 아니니까 괜찮다”며 성폭행하려는 아버지를 칼로 찔러 죽이는 일이 생기고 라이문다는 뒤처리에 동분서주한다. 한편 라이문다의 동생 솔레(롤라 두에냐스)는 남편이 바람나 도망간 뒤 혼자 불법 미용실을 운영하며 지내는데 이모의 장례식 때문에 고향인 라만차에 다녀오다가 엄마(카르멘 마우라)의 유령을 만난다. 솔레는 주변 사람들에게 엄마를 러시아 노숙자라고 소개하며 미용실에서 같이 지낸다. 하지만 엄마는 정작 라이문다에게는 나타나지 못하고 그녀 주위를 맴돌며 눈물짓는데, 마침내 라이문다와 엄마가 만나게 되면서 라이문다의 엄청난 비밀이 밝혀진다.

‘귀향’은 남자들이 보면 재미 없을지도 모를, 여자들끼리 보면 더 좋을 영화다.


여기에 남자는 없다. 아니, ‘진짜 남자’는 없고 여자들의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나쁜 남자’만 있다. 엄마와 라이문다와 솔레 등 모녀의 공통점은 ‘남자 복이 지지리도 없다’는 점. 3대에 걸친 모녀의 이야기이면서 이웃 아우구스티나 등 도움을 주는 주변사람도 다 여자다. 모정과 더불어 여성들 사이의 연대감이 이 영화를 이끌어 가는 힘이다.

라이문다는 동생의 미용실 화장실에 갔다가 “예전에 엄마가 뀌던 방귀 냄새가 난다”고 주장한다. 사춘기 이후 엄마를 멀리 했다지만 방귀 냄새까지 그의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던 것. 결국 ‘모든 것을 털어 놓아도 다 이해해 줄 사람, 나도 모르게 항상 그리워하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 엄마 뿐’ 이라는, 여자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을 영화는 코믹 터치를 가미해 재치 있게 풀어 놓는다. 죽은 엄마가 돌아온다는 판타지적 설정도 능청스러울 정도로 현실적으로 표현돼 어색하지 않다.

항상 눈 아래쪽까지 아이라인을 짙게 그려 그 큰 눈이 더 깊어 보이는 페넬로페 크루스는 스페인 대표 여배우로서의 면모를 확실히 보여준다. 공동 수상이 이해가 갈 만 큼 다른 여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하다.

채지영 기자


ⓒ 동아일보 2006.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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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벌레는 무서워해도 개미는 그저 그런 게 현실이다. 대략 무시하거나 죽여도 그만 안 죽여도 상관없는 벌레. 이것이 바로 개미의 위상이다.

하지만 개미의 입장은 다르다. 여기 미국 산 개미 조크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개미 인생? 불안의 연속이죠. 인간들 눈치 봐가며 음식물을 옮겨야 하고 행여 발각될 때면 발에 불나도록 뛰어야죠. 인간들은 파괴자예요.”

어렸을 적 누구나 한번쯤 쑤셔봤던 개미집. 그때마다 개미들은 죽어난다. 인간에 대한 증오심이 불탄 나머지 ‘조크’라는 개미는 파괴자에 대한 응징을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28일 개봉하는 워너브러더스 애니메이션 ‘앤트불리’의 모티브다. “개미 주제에 건방져”라고 할지 모르지만 한번쯤 약자에게 귀를 기울여 주자. 꽤나 그럴싸한 교훈을 우리에게 주니까.

○“넌 개미야”… 역지사지(易地思之)

얼굴의 3분의 1을 덮는 커다란 뿔테안경, 콧등을 뒤덮은 주근깨…. 이것이 열 살 소년 루카스의 첫 모습이다. 새로 이사 온 마을에서 친구 하나 사귀지 못한 이 소심한 소년은 동네 친구들로부터 집단따돌림과 구타를 당하기 일쑤다. 그런 그의 유일한 분풀이 대상은 바로 개미집. 발로 밟고 호스로 물을 뿌리는 등 억눌린 본성을 드러낸다.

이에 마법사 개미 조크는 개미만큼 작아지게 하는 묘약을 만들어 잠자는 루카스의 귀에 뿌린다. 온 세상이 커진 것을 발견한 루카스는 개미들에게 끌려가고 ‘개미 법정’에 선다. 그러나 “개미처럼 교육을 시켜보자”라는 여왕개미의 말에 루카스는 간호사 개미 호바로부터 개미 생활을 경험한다.

벽 기어 올라가기, 음식물 옮기기 등을 경험하는 루카스를 통해 개미들은 ‘앙갚음’보다 ‘이해’에 중점을 둔다. “너네 인간들은 왜 하품하니? 징그러워”라는 개미나 “너네는 사탕을 달콤한 돌이라고 하니?”라고 묻는 루카스의 모습은 그간 서로 쌓았던 담을 조금씩 허무는 과정이다. 이는 영화 초반 “넌 개미야”라고 주지시키는 조크의 모습과 영화 후반 “난 개미다”라며 벽을 타고 올라가는 루카스의 모습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함께 뭉치자”… 상부상조(相扶相助)

‘앤트불리’는 동명의 미국 베스트셀러 동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이를 제작한 사람은 바로 영화배우 톰 행크스. 그는 “아들과 함께 책을 읽다가 인간과 개미가 함께하는 모험에 매료됐다”고 말했다.

조크와 호바가 주연 개미들이지만 영화는 수백만 마리의 개미를 등장시킨다. 이들은 ‘달콤한 돌’(사탕)을 신속하게 줍기 위해 팀을 이루어 훈련을 하는 등의 상부상조를 강조한다. “왜 내가 같이 해야하지?”라며 퉁명스러운 태도를 보이는 루카스의 모습과는 상반된다. 이에 조크는 “개미들도 각자 개성도 다르지만 함께 힘을 합치면 큰 힘을 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과하다. 영화는 ‘개미와 베짱이’를 통해 마르고 닳도록 들었던 개미의 근면 성실함, 그리고 단체 생활의 장점을 되풀이한다.

그나마 잠에서 깬 루카스가 “쳇, 꿈이었잖아”라고 할 것 같지만 그가 겪은 모든 모험들은 진짜 일어난 일이다. 니컬러스 케이지, 줄리아 로버츠 등 할리우드 톱스타들의 목소리도 흥미롭다. 다만 이 영화를 보고 난 꼬마들이 걱정이다. 집 마루를 기어다니는 개미들에게 “나도 루카스처럼 개미집 구경하고 싶어”라고 말할까봐.

김범석 기자


ⓒ 동아일보  2006.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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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사랑해.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 같아. 그런데…나는 아마도 살 수 없을 것 같아. 아이들을 잘 부탁해….”(9·11테러 당시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근무하던 스튜어트 멜처 씨가 부인에게 남긴 전화)

“엄마! 이 건물이 불에 휩싸였어. 벽으로 막 연기가 들어와.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어. 엄마, 사랑해. 안녕….”(같은 날 베로니크 바워 씨가 어머니에게 한 전화)

2001년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 월드 트레이드 센터(WTC)가 두 대의 비행기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 이 영화 같은 사건을 접한 세계인들을 눈물짓게 만든 것은 그 속에서 희생당한 보통 사람들이었다. 죽음의 공포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그 순간, 그들은 가족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현장에 뛰어든 구조대원들이 있었다.

5년 뒤, ‘플래툰’ ‘JFK’ 등으로 굵직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해 온 거장 올리버 스톤이 선택한 것도 정치가 아니라 가족애와 휴머니티다. 12일 개봉한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그날’을 겪은 보통 사람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뉴욕 항만 경찰청 경사 존 맥라글린(니컬러스 케이지)은 언제나처럼 뉴욕 중심가 순찰로 하루를 시작했다. 그러나 비행기 그림자와 함께 ‘꽝’ 하는 굉음이 울리고, 당장 WTC로 출동하라는 명령이 떨어진다. 존을 포함해 4명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건물은 무너져 내리고 존과 윌 히메노(마이클 페냐) 둘만이 건물의 잔해 더미에 깔린 채 겨우 살아남는다. 사고 소식을 들은 가족들은 절규하고, 존과 윌은 죽음의 길목에서 힘겹게 버텨 나간다.

9·11테러를 소재로 했다고 하면 대부분 재난영화의 거대한 스펙터클을 예상할 것이다. 그런 기대로 보면 다소 심심하고 지루할 것이다.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극적인 스펙터클은 없다. 영화는 큰 긴장감 없이 잔잔하게 흘러간다. 오히려 기억에 남는 것은 어둠 속에서 꼼짝달싹 못하는 니컬러스 케이지와 마이클 페냐의 흙투성이 얼굴 클로즈업. 최대한 사건 현장을 사실적으로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 한국 관객들은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를 떠올릴 만하다. 시시각각 상황을 알리는 전 세계의 뉴스를 삽입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느껴진다.

WTC는 기독교와 가족주의 애국주의 등 미국적인 가치의 소중함을 전달하려고 노력한다. 죽음이 가까워 오자 주인공들은 주기도문을 외우고 예수님의 환상을 보기도 한다. 결국 살아남아 부인을 만난 순간 니컬러스 케이지가 하는 말은 “당신이 날 살아있게 해줬어(You kept me alive)”다. 한 해병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위해 가야 하는 게 신이 주신 소명”이라며 현장에 뛰어든다. 정말 ‘미국 영화’다.

보통 사람들의 용기와 사랑은 억지스럽지 않고 감동적이다. 그러나 영화 마지막, “9·11은 인간의 양면을 보여줬다. 무서운 악마성과 그 반대에 감춰져 있는 선함을”이라는 대사는 미국이 선(善)이라는 메시지처럼 느껴져 역으로 이라크전 희생자들도 떠올리게 만든다. 12세 이상.

채지영 기자


ⓒ 동아일보  2006.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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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 베송 감독(사진)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파리에서 서쪽으로 2시간 정도 달리니 젖소와 양들이 뛰어노는 노르망디의 들판 지대가 펼쳐졌다. 뤽 베송 감독의 ‘디지털 팩토리’는 들판 한가운데 있었다. ‘팩토리(공장)’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과는 사뭇 다른 공간이었다.

잘 관리된 잔디 위로 상영관이 있는 건물, 레스토랑이 있는 건물 등 크고 작은 건물이 적절히 배치돼 있었다. 목가적 느낌이 물씬 풍기는 건물들 사이로는 시냇물이 흘렀다.

도시의 소음과는 완전히 단절된 채 자연을 무한히 느낄 수 있는 공간이었다. 그의 새 영화 ‘아더와 미니모이’를 만들기에 적당한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더와 미니모이’는 크리스마스 때 전 세계 동시 개봉을 목표로 제작된 영화. 3D 애니메이션을 위주로 실사가 곁들여진 작품이다.

뤽 베송 감독은 넉넉한 몸집에 유머가 넘치는 말투로 시사회장을 찾은 손님들을 맞았다. 그는 “영상과 음향의 일부를 제외하고 작업은 거의 완료됐다”고 설명했다.

‘아더와 미니모이’는 ‘해리포터’ ‘반지의 제왕’과 같은 판타지 영화다. 할머니와 단둘이 외딴 집에서 살고 있던 말썽꾸러기 소년 아더가 어느 날 할아버지가 남긴 주술서를 발견한 뒤 보물을 찾아 미니모이의 세상으로 모험을 떠난다는 내용. 미니모이는 아더가 사는 집의 마당에 살고 있는 키 2mm의 생명체다.

작품은 애니메이션 답게 상상력으로 가득했다. 뤽 베송 감독 특유의 스피디한 화면도 계속 이어졌다. 이날 상영된 작품은 뤽 베송 감독이 직접 쓴 같은 제목의 소설을 바탕으로 총 3부작으로 제작될 시리즈 가운데 첫 번째 작품이다.

‘레옹’ ‘제5원소’ ‘그랑블루’로 유명한 그가 어린이용 판타지 소설 ‘아더와 미니모이’를 쓴 이유가 궁금했다. 간단한 질문에 무척이나 철학적인 대답이 나왔다.

“지금 세상은 너무 어지럽다. 사람들은 지나치게 시니컬하다. 자연으로부터도 너무 떨어졌다. 인간은 자연에서 멀어지면 죽는다. 미니모이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자연의 일부다. 잃어버린 자연을 되찾자는 생각을 작품에 담았다.”

영화에는 키가 2m를 훌쩍 넘는 보고마타살라이라는 아프리카 부족민도 등장한다. 그는 “2m의 보고마타살라이가 보는 세상과 2mm의 미니모이가 보는 세상은 각각 다르다”면서 “두 종족이 손을 잡으면 세상의 전부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인종 차별’ ‘계층간 갈등’ 같은 주제도 다뤘다는 설명이었다.

시사회 직전 그는 관객들에게 “당신이 열 살이던 때를 떠올리면서 영화를 감상해 보라”고 주문했다. 그런 그의 10세 시절은 어땠을까.

“내가 열 살 때는 TV도 인터넷도 비디오게임도 없었다. 장난감도 제대로 없어 직접 돌로, 흙으로 장난감을 만들어 가며 놀았다. 상상력을 무한히 펼칠 수 있었다. 그때의 상상력을 되살려 ‘아더와 미니모이’를 만들었다.”

뤽 베송 감독은 지금도 컴퓨터를 쓰지 않고 펜으로 글을 쓴다. e메일도 사용하지 않는다.

이번 작품을 끝으로 그는 제작은 계속 하되 감독은 그만둘 계획이다. 그는 달리기 선수에 비유해 이유를 설명했다.

“달리기 선수는 자신의 최고 기록을 깨뜨리는 것이 최대의 목표다. 더는 신기록을 세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는 달리기를 멈춘다.”

노르망디=금동근 특파원


ⓒ 동아일보

2006.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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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영국 서프라이즈 호의 함장인 잭 오브리는 영국 함대를 괴롭히는 신출귀몰한 프랑스 아케론 호를 격침하라는 국왕의 명령을 받는다. 서프라이즈 호는 추적에 나서지만 되레 안개 속에서 유령처럼 나타난 아케론 호의 기습공격을 받는다. 오브리 함장은 부하들의 처참한 부상을 딛고 추적을 강행하고, 그의 친구이자 함선의 유일한 의사인 스티븐 마투린은 이를 제지하고 나선다.

할리우드 스타 러셀 크로를 앞세운 ‘마스터 앤드 커맨더-위대한 정복자’는 ‘타이타닉’의 스케일과 ‘글래디에이터’의 굵직한 캐릭터를 합친 해양 액션 영화. 여기에 ‘고독한 리더십’을 둘러싸고 두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우정과 갈등의 심리가 보태졌다. 영화는 그 흔한 러브스토리 하나 등장하지 않으며 남성성을 전면에 내세운다. 두 가지 질문을 통해 영화를 살펴본다.

○ 러셀 크로는 바다의 ‘검투사’인가

러셀 크로를 바다의 ‘글래디에이터’로 만들기에 배는 너무 좁고 바다는 너무 넓다. 오브리 함장은 용감하지만 비장하진 않다. 최악의 순간에도 음악을 연주하고 웃음을 잃지 않는다. 이 같은 낭만성은 작품 전반적으로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만든다. 게다가 범선 두 척이 대포알을 주고받는 19세기 초의 해양 전투는 운명적으로 소박할 수밖에 없다. 전투장면의 중심도 오브리 함장이 아닌, 어리지만 용감한 병사들 쪽으로 다변화돼 있다.

그럼에도 이 영화에서 표현하는 전쟁의 공포는 스케일은 작지만 더 체감적이고 본질적이다. 포탄이 터질 때 나는 파편 소리는 전쟁의 공포를 청각적으로 이미지화한다. 병사들이 공포에 떠는 이유는 적함이 첨단장비를 갖췄기 때문도, 악명 높은 잔혹성을 가졌기 때문도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단순하고도 치명적인 사실 때문이다.

영화 ‘타이타닉’을 찍었던 초대형 스튜디오에서 촬영된 폭풍우 장면은 볼거리다. 1만평 크기의 물탱크에 물을 가득 채우고 무게 60t의 서프라이즈 호 모형을 띄웠다. 그러나 좌우로 요동치는 선체와 장대비 속에서도 단정하게 고정된 병사들의 머리칼은 치밀함에 대한 아쉬움을 남긴다.

○ 서프라이즈호는 놀라운 공간인가

영화 말미까지 적함의 병사들의 성격은 구체적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이는 내러티브 전개의 초점이 두 함선 간 상호작용보다는 서프라이즈 호 내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와 갈등 양상에 맞춰져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망망대해 속 함선이라는 공간적 특징은 긴장을 고조시키는 방향으로 활용되지 못한다.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아버지’의 상징 오브리 함장과 휴머니즘을 내세우는 ‘어머니’의 상징 닥터 마투린이 벌이는 갈등은 치열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영화 중반에 일찌감치 해소된다.

함선 내 선악구도가 없고 모두가 ‘착한’ 캐릭터 설정은 현실적일지 모르지만 영화적이진 않다. ‘위트니스’ ‘죽은 시인의 사회’ ‘트루먼 쇼’ 등의 영화를 통해 한정된 공간에 돋보기를 들이대 갈등하는 인간 군상을 예리하게 파헤친 피터 위어 감독의 솜씨가 꽤 거칠어진 듯하다. . 12세 이상 관람가.

이승재기자


ⓒ 동아일보   2003.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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