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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매도 사냥감에 전적으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새 한 마리도 잡을 수 없다. 만약 온 힘을 다하지 않는다면 그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 매는 오래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본문 중에서》

학술지의 논문은 늘 딱딱하다. 이것은 저자의 말처럼 “명백한 결과와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의사소통이라는 기준에 부합하도록 연구과정 중에 지녔던 모든 열정이 다 제거돼 버렸기 때문”이다. 이 책은 저자가 자연을 관찰하던 열정을 되살려 자연과학의 매력이 무엇인가를 일반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쓴 자전적인 글이다.

동물학 교수인 저자는 어릴 때(4세) 제2차 세계대전의 와중에 가족과 함께 고향을 떠나 유랑했던 경험으로 이 글을 시작한다. 그리고 시골의 숲 속에서 5년을 지내면서 나무딸기(산딸기)를 따먹고 땔감을 모으며 야생동물을 관찰한 것을 흥미롭게 보여 준다. 우리나라에서도 종종 있는 일이지만 어려울 때 아이들은 자연을 가까이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가진다. 세상은 보기 나름. 어려움은 자연과 소통하고 가족이 뭉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이렇듯 이 책에는 자연과학뿐 아니라 인문학적인 함의도 풍부하게 들어 있다.

우여곡절 끝에 미국 메인 주에 도착한 저자는 오지의 농장에서 어렵게 살면서 숲과 들판에 사는 동식물에 관해 점점 더 많은 것을 배운다. 특히 저자는 점점 자연환경의 일부가 되어가는 것을 느끼면서 야생동물은 물론 습지와 같은 서식처의 중요성도 배운다. 원래 제목인 ‘분홍바늘꽃밭에서(In a Patch of Fireweed)’가 나타내는 것처럼 이 책에는 숲 속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분홍바늘꽃은 북극 주변의 북반구에 사는 식물로 우리나라에서는 백두대간을 따라 함백산까지 분포하지만 미국에서는 불탄 곳이나 훼손된 공지에 잘 번성한다. 이 분홍바늘꽃밭에서 추위와 싸워 이기는 뒝벌(뒤영벌)의 경제학, 아프리카 동식물의 상호관계, 물맴이가 펼치는 군무의 의미, 숨는 털벌레와 이를 찾아내는 박새, 노예를 운반하는 개미 등. 이 모든 것들은 우리가 보는 아름다운 다양성은 오묘하고 복잡다단한 진화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연과학도로서 논문주제를 사냥하는 역정도 잘 보여 주고 실험실에서의 동물 관찰, 체온 상승과 관련된 박각시나방의 비밀, 의견을 달리하는 학파와의 싸움, 실험을 위한 나방의 심장수술 등 사람에 따라서는 끔찍하다고 느낄 일도 자세하게 알려준다.

이 책은 번역도 부드럽게 잘 되었지만 작은 실수도 보인다. 미국 메인 주의 나무로 소개되는 ‘백송’은 영어로는 ‘white pine’이지만 우리말로는 ‘스트로브잣나무’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큰 장점인 섬세한 자연관찰은 저자가 직접 그린 세밀화에도 잘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세밀화에 대해서도 ‘과학적인 삽화라기보다 소중한 추억’이라고 고백하는 저자의 마음을 읽으며 자연과학도 차가운 기계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가진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것을 느끼고 자연의 향취를 즐길 수 있으면 좋겠다.

신준환 국립산림과학원

동아일보 2006.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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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면 두 그루의 등나무가 탐스러운 꽃을 터뜨려 그윽한 향기를 풍기며 팽나무를 힘껏 껴안듯이 감고 올라갔다. 사랑이 식은 사람들도 이곳에 오면 다시 가까워진다고 한다. ―본문 중에서》

여름비가 막 지나가고 난 뒤에 나는 그녀의 집 담장 밖에 있었다. 하늘은 맑고 바람은 상큼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생명들이 막 살아서 꼬물대며 자라는 게 보일 것 같은 명징한 오후였다. 그러나 그녀는 밖으로 나오지 않고 나만 허송세월이었다. 물리적인 시간은 짧은 것이로되 그녀를 얼핏 보는 것만으로도 세상의 모든 것을 얻은 것 같은 젊은 사랑의 시절에 느껴지는 시간은 억겁과 같은 것, 아직 물기를 머금은 풀잎들의 잎만이 속절없이 고울 뿐이었다.

바로 그때 언제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꽃 한 무더기가 꽃분수를 이루며 솟아오르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마른 받침목을 타고 올라간 그 꽃은 사방을 향해 의연한 자태를 선보이고 있었다. 주황색의 콧대 높은 꽃, 마치 내가 기다리는 여인과 같았다. 나는 그 꽃이 무엇으로 불리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망막이 가득하고 아득할 뿐. 늠연하면서도 광휘로운 그 꽃들에 비하면 나는 하찮은 지푸라기였다.

그러고 한참의 세월이 지났다. 그 여인의 아름다움도 ‘보는 눈의 타락’으로 인하여 모두 사라졌고 그 풍경도 사라졌다.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그 꽃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질문.

그렇지만 내가 그 꽃의 이름을 모른다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 꽃도 나에게 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그냥 살았다. 그런데 시인이 되고 난 뒤 이상한 책을 하나 만나게 되었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꽃 백 가지’란 책. 1990년의 일이다.

그 책을 보았을 때 우선 첫 소감은 야릇했다. 책의 부제인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이라는 말이 주는 약간의 고약스러움 때문이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가 의당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으면서도 뻔뻔하게 그냥 살고 있는 모습에 대한 질타가 숨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즐거운 불쾌감이었다.

이 책은 우리 산하의 사계에 피어나고 사라지는 꽃들을 계절에 따라 화보로 보여 주고 그 꽃에 얽힌 여러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100여 종의 꽃의 정식 이름과 속명을 소개하는가 하면 그 꽃에 얽힌 설화나 사연들도 있었고 그 꽃들의 쓰임새도 적혀 있었다. 덕분에 나의 의식 저편에 숨어 있었던 꽃의 이름도 부를 수 있었다. ‘능소화’라고.

순간 청춘의 시절 이후 내 마음에 광휘로운 광경으로 남아 있던 풍경에 빚을 갚을 수 있었다. 마음의 저편에 그냥 복합적인 풍경으로 혼몽스럽게 존재하던 풍경은 마침내 나에게 ‘잊혀지지 않는 이름’이 될 수 있었다.

강형철 시인·숭의여대 교수   동아일보  2006.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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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체제론은 미국 사회과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1974년에 낸 저서 ‘근대 세계체제 1’에서 비롯된 이론으로 전체로서의 세계를 분석대상으로 삼고 학제 간 장벽을 허물었으며 개별 사건이 아닌 장기적 과정을 중시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월러스틴 자신이 “찬사를 받기도, 공격을 당하기도 했다”고 표현했듯이 이론은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자주 왜곡되어 왔다. 오래전에는 특이하게도 사회주의의 대안을 내포하는 진보적 이행론으로 해석되기도 했고, 공산주의 사회의 붕괴 시점에는 오직 하나의 자본주의적 세계체제의 형성에 관한 ‘예언적’ 이론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이 책은 저자가 세계체제 분석의 전제와 원칙이라고 간주하는 것들을 한자리에서 설명하고 총체적 조망을 제공하기 위해 쓴 개론서다. 저자는 현 상황에서 세계 위기의 핵심이자 가장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다보스 정신’과 ‘포르토 알레그레 정신’ 간의 투쟁이라고 말한다.

‘다보스 정신’이란 세계화의 기치 아래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흐름에 모든 국경을 개방할 것을 요구하는 신자유주의적 흐름이다. 정책적으로는 ‘워싱턴 컨센서스’라 불렸으며 이 이론의 보급을 위한 장으로 다보스에서 세계경제포럼이 열렸다.

반면 ‘포르토 알레그레 정신’은 다보스의 세계경제포럼에 반대하기 위해 포르토 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시작된 반(反)세계화 연대 움직임을 말하는 것이다.

두 정신 간의 투쟁은 결과를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토론의 핵심은 여전히 미래에 건설할 사회체제에 관한 것이며 그 핵심요소는 사회적 조직화의 두 가지 중심 문제인 자유와 평등의 문제로 다시 돌아간다.

동전의 양면 관계로 제시되는 평등과 자유의 관계에서 저자는 평등의 강조가 결국 다수가 스스로의 자유를 깨닫고 소수의 자유를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그것이 다수가 취해야 하는 필수적인 입장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1968년 ‘세계혁명’ 이후부터 지금까지를 이행의 시기 또는 과도적 위기로 규정한다. 이후 세계의 미래도 우리 자신의 지적 도덕적 정치적 각성에 달려 있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또 여전히 중요한 메시지다.

강문구 경남대 정치언론학부 교수  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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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행동력의 재획득,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를 재확립하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가장 중심적인 과제이다. 기존의 세력관계가 더 이상 유지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예견할 수 있다. 세계시장의 압력에 대한 무분별한 적응은 기존의 복지사회를 불가피하게 혼란으로 몰아가고, 나아가 복지사회의 기초적 토양으로 기능하는 민주적 사회구조를 필연적으로 파괴할 것이다. ―본문 중에서》

‘세계화’는 우리의 삶을 행복하게 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과연 민주주의를 확대시킬 것인가? 이 책은 풍부한 예시를 근거로 자본과 노동이 처한 지금의 현실을 구체적으로 지적할 뿐 아니라, 세계화의 과정이 사회의 안정된 삶과 민주주의를 파괴할 것임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이 책은 그리 무겁지 않은 필치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시사적인 경제서를 넘어 이 시대에 대한 근본적이고 정치적인 통찰을 포함하고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세계화란 ‘범지구적인 경쟁의 격화’를 의미한다. ‘범지구적 경제의 통합’은 세계시장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감으로써 ‘범지구적 경쟁의 격화’를 불러일으킨다. 높은 생산성 하에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력은 20%에 불과할 뿐이며, 나머지 80%의 노동력은 배제된다. 그러므로 자본과 노동이 세계시장으로 편입되면 될수록 일자리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은 생산성 하에서 실업율은 점점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저자들은 현재의 높은 실업율과 고용불안이 단순히 몇몇 나라의 일시적인 정책적 실패라거나 혹은 세계화가 아직 완전히 이루어지지 못해 생긴 일이 아니라, 바로 세계화가 만들어 낸 필연적인 경쟁 격화와 금융시장 독재의 구조적 귀결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은 세계화의 과정이 범지구적인 ‘통합’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분열’과 ‘배제’를 가져온다고 지적한다. 주가지수와 기업이윤은 두 자리 숫자로 오르는 반면, 노동자들의 실질임금은 계속 내려가고 실업률과 국가의 재정적자도 심각한 수준으로 늘어난다. 그리하여 이렇듯 불안한 현실은 중산층을 소멸시키고, 불안한 삶에 대한 ‘공포’는 타인과 타민족에 대한 배제와 혐오로 선동되어 21세기의 ‘신 우익’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저자는 세계화를 외치는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신 우익집단에게 길을 열어주고 있는 현실을 그림으로써, 세계화의 귀결이 왜 민주주의에 반하는지, 왜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을 의미하는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저자들은 ‘세계화’가 초래한 불평등한 구조를 지적하는 데에서 나아가, 사회의 안정된 삶과 발전 근거를 파괴시킨다는 데 그 근본적인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세계를 돌며 이윤을 사냥하는 금융시장의 신자유주의 논리는 ‘국가’의 조정력을 무력화시키고 ‘정치’를 추락시킨다. 세계화의 과정은 개별국가의 정책집행력과 민주주의에 뿌리를 둔 안정된 사회생활의 기초를 부수고, 부의 재분배와 조정을 통해 사회적 불평등을 억제하고 사회적 결속을 이루어왔던 이제까지의 규칙(곧 민주주의!)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세계화’란 자기가 숨겨놓았으나 스스로 걸려들어 자신을 파괴하는 ‘덫’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계화의 덫’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이 책은 그 해법을 복지와 민주주의의 회복으로 제시한다. 그리고 이를 위한 근본적인 방향을 ‘경제’에 대한 ‘정치’의 회복, 국가의 조정능력 회복에서 찾고 있다. 국가와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금융자본의 횡포를 세계화의 근본악으로 보는 저자의 입장에서 구체적인 방안은 주로 환경세의 신설, 사치세, 외환거래세나 금융세의 징수 등 세재개혁을 통한 금융과세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 책이 보다 근본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개혁과 조정을 이루어낼 범지구적인 연대에 있다. 개별 국가의 노력만으로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세계화로 인한 종국을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국가간의 연합, 시민사회의 국제적 연대, 살아있는 인간노동에 대한 재평가를 기초로 한 새로운 차원의 민주적인 연대와 연합이야말로 이 책이 제시하고 있는 핵심적 방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박주원 서강대 학술연구 교수·정치학


ⓒ 동아일보 2006.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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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문제의 원인이 우리 자신이기 때문에 그 해결의 주체도 우리일 수밖에 없다. 당장에 환경 훼손을 중단하고 해결에 나설 것이냐, 아니면 그대로 방치할 것이냐? 그 선택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요컨대 미래의 운명이 우리 손 안에 달려 있다. 지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문제 해결에 도움을 줄 수 있겠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정치적 의지일 뿐이다. 해결책은 지금도 있다. 정작 필요한 것은 그 해결책을 적용하려는 정치적 의지이다. ―본문 중에서》

인류의 첫 밀레니엄이 생존을 위한 적응으로 시작됐다면, 다음 밀레니엄은 개발로 인한 착취로 마감됐다고 할 수 있다. 21세기 들어 인간과 자연 사이의 상생이 강조되는 이유도 지난 역사의 교훈을 통해 지속가능한 미래를 만들자는 데 있다.

실상 인류의 역사에는 수많은 문명이 부침성쇠를 겪어 왔다. 그러나 어느 사회는 지속하였고, 어느 사회는 쇠락하였다. 이 책은 문명사의 관점에서 지난 사회들이 성공하고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고 있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자료조사에 입각해 과학과 역사를 접목함으로써 파괴된 문명의 역사에서 인류의 미래를 위한 시사점을 찾아내려 한다.

저자는 핵전쟁이나 새로운 질병도 문제이지만 환경파괴(ecocide)가 더 심각한 위협이라고 본다. 과거와 현재에 걸쳐 열두 가지 요인이 제시되고 있다. 과거에는 산림과 서식지 파괴, 토양 침식과 비옥도 저하, 물 관리의 악화, 지나친 사냥과 고기잡이, 외래종에 의한 토착종의 구축, 인구폭발, 사람의 영향 등 8가지가 주요 요인으로 꼽혔다. 여기에 현재 인간이 야기한 기후변화, 자연환경에 축적된 유해 화학물질, 에너지 부족, 지구의 광합성 역량을 극한까지 사용하려는 인간의 욕심 등 4가지가 추가된다.

환경파괴, 기후변화, 적대적인 이웃,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의 대응은 여러 문명의 역사적 운명을 가로질렀다. 산림파괴에 따른 이스터 섬의 붕괴, 무역상대국의 쇠퇴에 따른 피케언 섬과 헨더슨 섬의 붕괴, 환경훼손 인구폭발 기후변화로 인한 마야의 붕괴가 주요 사례다.

현대 세계도 마찬가지다. 대규모 개발사업으로 비틀거리는 중국이나 지나친 채굴에 따른 재생 가능한 자원을 고갈시키는 호주 등이 그렇다.

오늘날 문명 붕괴의 조짐은 제3세계뿐만 아니라 지구촌 여러 곳에서도 이미 나타나고 있다. 남아시아의 지진해일(쓰나미)이나 미국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의 카트리나 피해, 중국 쑹화(松花) 강 오염이 좋은 보기다. 최근 한반도의 허리를 강타한 폭우, 유럽과 미국을 휩쓴 폭염, 중동과 아시아에서 그치지 않는 지진을 보더라도 환경훼손과 자연재해의 연관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면 범세계적 생태 위기 아래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것인가. 저자는 환경파괴의 주체는 바로 우리 자신이라는 점에서 미래를 위한 인간의 결단을 촉구한다. 환경파괴는 세계화와 관련이 깊다. 세계화를 위협으로만 보지 말고 기회로 볼 수 있는 안목과 실천이 필요하다. 저자는 ‘신중한 낙관주의자’로서 인류가 세계화를 잘 활용한다면 전 세계적 붕괴는 막을 수 있다고 본다.


마지막으로 흥미로운 점은 환경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업을 적으로만 보지 말라는 권고다. 효율적인 환경보호 대책을 실현하는 기업이 있듯 이들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자세와 노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임현진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 동아일보 2006.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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