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의 화장법
아멜리 노통브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세계사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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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굉장히 평소에 내가 아닌 다른 모습에 나를 보았을 때 흠짓 놀라움과 함께 두려움 마저 느낄 때가  있었을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외에는 이 감정과 행동들이 도대체 어디에 기인되는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곤 하지만 답을 쉽게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감정과 행동들을 최대한 이성적인 방어벽과 자아라는 존재속에 숨기기 위해 지나친 위선과 꾸밈을 남들 앞에서 보이고 있는지 모른다. 동네 어귀에서나 벌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의 다중적인 면이 세상과 사회라는 확장된 틀속에서는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고 질식되어버린 채 있다가 인간이 가장 힘든 시기나 나락속에 빠져들었을 때 본격적으로 기승을 부리고 끝내는 희대의 살인마나 정신병자라는 닉네임을 통해 부연, 설명되는 것이 아닐런지? 이 책을 보면서 느끼게 되는 섬뜩함이었다.

평범한 회사원인 제롬 앙귀스트에 다가온 이상할 정도로 말이 많고, 혐오스러운 인물 텍스토르 텍셀. 그들의 만남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적인 만남속에서 쉼없이 대화와 감정적인 엇갈림의 도구들을 통해 모호했던 형상들이 하나의 구체적인 모습을 가진 존재로 부각되었을 때 나는 열린 입을 닫을 수 없었다. 추리소설에서 범인을 추적하던 형사가 바로 범인이라는 가정처럼 충격적인 결말과 더불어 작가가 실현해 보인 자아의 이중적인 모습은 잊혀지는 않는 기억처럼 내 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왜일까? 단순히 요즘 코미디의 소재로 쓰이는 우스운 다중적인 인간의 모습에 대한 조롱이 아닌 내 자신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한번쯤은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기에 그 충격은 더욱 컸다. 희대의 살인마가 온종일 방송 매체를 잠식하는 동안에도 우리는 그것이 특별한 환경과 경험을 가진 소수 이상한 사람들의 엽기적인 행각 정도로 치부되어질 수 있으나 우리 안에 내재된 또다른 실체임을 알았을 때 우린 어떤 느낌을 받을까? 각박해지는 세상속에서 여유스러운 사고조차 헛된 시간 낭비로 치부되어버리는 현실속에서 우린 우리를 제대로 보고 있는지 이 책을 묻고 있는 것 같다.

자신이 행한 행동마저 자신이 아니라고 얘기하고, 실상 확인된 후에도 변하지 않는 제롬의 자기 부정의 모습은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질병적인 두려움과 이기적인 표현이 아닐런지? 강간과 살인이 이루어지는 긴 시간적인 공간속에서도 발견하지 못했던 또다른 내가 아내를 살해한 후 10년만에 죄책감으로 부활하여 괴롭히는 것은 동양 고전에서나 나오는 인과응보처럼 보이기도 했다.

인간은 자신을 최대한 너그롭고, 착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얼마나 두꺼운 자기 화장과 위선으로 가리고 있는가? 인간이기에 부족함이 많은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을 보이지 않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노력을 펼치고 있으며, 끝내는 자기 파멸의 자아를 계속적으로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작가는 묻고 있는 듯 하다. 그녀의 색다른 소재와 시도는 그녀가 가진 천재성과 더불어 대담성처럼 내게 다가옴으로써  또다른 그녀의 책을 읽고 싶어지는 욕구를 느끼게 할만큼 흥미진진했다. 정말 괜찮은 책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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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밭에 무얼 심지?
최영순 지음 / 해토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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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같이 아침 일찍 지하철 출근하는 사람이면 보게 되는 것이 있다. 몇분 간격으로 오는 지하철을 조급한 마음으로 종종 걸음으로 뛰어가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나역시 늦잠이나 숙취로 인해 제때에 못 일어나 출근시간을 맞추기 위해 헐레벌떡 뛰는 경우가 많다. 그렇게 해도 결국 늦은 것은 늦은 것인데 기분상 저 것을 놓치면 안 됬겠지라는 헛된 근심과 조급증으로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곤 한다. 때론 우리에게는 느리게 산다는 것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라는 짧은 생각이 이 책의 표지 그림을 보면서 느끼게 되었다.

한없이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과 너그러운 마음도 나와 관계된 현실이라는 벽과 그림자속에 놓여있을 때 왜 바늘 구멍보다 더 좁아지는 것일까? 하나를 얻기 위해 썼던 마음들이 더이상 돌이킬 수 없는 욕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제 길을 못 찾고 있는 것일까? 태어나 자라고, 어른이 되고, 죽어도 풀지 못하는 인생이라는 정의가 바로 내가 살아온 삶임을 왜 모르는 것일까? 스승과 깨달음이 나보다 뛰어나고 위대한 사람들에게 있는 재주가 아닌 나와 같이 아주 평범하거나 하찮은 미물에게서 얻을 수 있음을 왜 모르는 것일까? 이 책은 내가 알면서도 모른척, 보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삶의 지혜와 정의들을 한 편의 그림과 짧은 글로서 말해주고 있다.

그림 한편이 무엇이길래 읽는 사람의 머릿속이 한없이 휘젓고 들어가 세상과 욕망이라는 독에 의해 만성적인 무관심과 무느낌의 돌이 되어가고 있는 나와 같은 현대인들에게 세찬 가르침을 주고 있는 것일까? 종교단체나 지성이라는 사람들이 외치는 공염불보다는 배움을 받고 행할 수 있는 용기와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고 이 책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길 위에 피어나고 자라는 꽃과 나무들, 온갖 미물들에게서 나를 다스리고, 낮출 수 있는 겸양과 겸손 그리고 부끄러움의 미학은 요원한 가르침이 아닌 우리가 마음만 충분히 먹고 행하면 될 수 있다는 것은 짧은 글속에 녹아내는 작가의 표현과 그림 솜씨에 감탄한 뿐이다.

그림과 글이 이토록 버릴 수 없고, 지울 수 없는 경건한 말과 깨달음처럼 다가올 수 있음은 아직까지 순수한 간직하고 있는 우리들의 진짜 모습이 아닐런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무심해 버린 모든 분들의 머릿속과 마음에 이 책의 제목처럼 삶을 아름답게 사는 진정한 진리와 행동 그리고 자세를 배우고 마음속에 심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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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언제나 금요일은 아니지
호어스트 에버스 지음, 김혜은 옮김 / 좋은책만들기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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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좀머씨 이야기"의 좀머씨처럼 이 책의 저자와 동명이인인 호어스트는 세상과 등지고 살지만, 좀머씨와 달리 세상과의 인연을 떨치지 못하여 안절부절 하면서도 끝끝내 자신의 나태함과 무기력증을 버리지 못하는 인물이다. 현실속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보 아니면 우리가 쉽게 역 근처에서나 볼 수 있는 노숙자 정도가 아닐까? 그러면서도 그의 세상에 대한 자세와 행동들이 황당하고 웃기면서도 웬지 부럽고, 생의 진정한 삶의 의미를 알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중구난방으로 쏟아내는 주인공의 독백적, 자위적 말투때문에 읽는 독자 입장에서는 어느 곳에 초점을 두고 있어야 할 지 어리둥절할 때도 많았지만, 이내 그 의미를 이해하고, 동화되는 과정속에서 내 안의 또다른 나를 발견한 것처럼 헛웃음을 지을 때가 많았다.

참 세상은 빨리 변한다. 어린시절 컴퓨터는 미래 공상만화에서나 나오는 최첨단 시설 정도로 치부되었지만, 이제는 가정내에 없어서는 안되는 생활도구처럼 우리에게 필요하면서도 떨칠 수 없는 짐으로 다가오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매번 더 나은 기능속에서 계속되는 업데이트와 신기술들에 파묻혀 버리면 내 자신마저 하나의 기계의 부속물처럼 되어가고 있는 아닌지 생각될 때가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런 현실속에서 벗어나 정말 시간에 빨려 들어가는 것이 아닌 느긋한 마음을 가진 도인처럼 세상을 편히 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때가 가끔씩은 있다. 얼마쯤 왔을까보다는 벌써 이만큼이나 왔구나라는 말을 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이 그립다.

이 책속에 나오는 게으름과 나태함이 세상을 더욱 아름답게 살 수 있고, 진정으로 내가 느끼는 삶으로 만들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아닐런지? 세상에 물 흐르듯 따라가는 것이 아닌 때론 삐딱하게 세상을 거꾸로 보기도 하고, 사회와 제도속에 틀밖으로 나와 무정부적인 내모습을 만들고 싶은 내 의지도 시간과 누군가가 만든 멋있는 인생이라 말하는 번들거림속에서 버려지고 잊혀지는 추억은 아닐런지?

아!그립다. 돌아누으면 변하는 세상속에서 이 책이 주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 내 자신을 찾으라는 외침처럼 내 안에서 가슴이 찢어질 정도로 아파하는 고통을 느끼게 하는 것은 이 책이 나에게 주는 충격이 아닐런지? 많은 분들이 때론 한없이 게을러지고, 추해져도 변하지 않는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를 기도하면서 이 책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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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끝의 정원 - 바깥의 소설 30
가브리엘 루아 지음, 김화영 옮김 / 현대문학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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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생소했던 캐나다 문학을 가브리엘 루아의 '내 생애의 아이들'을 통해 접하게 되면서 색다른 느낌을 문학을 받게 되었다. 미국의 주변국에 위치하면서 외국 이주민들로 구성되어 있고, 언어 또한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등과 같은 다양한  문화와 언어가 공존하는 그들의 문학적 깊이와 사고를 통해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작품 또한 캐나다 문학이 가지는 특색의 연장선 위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이 책은 4편의 단편소설로 각기 다양한 주제와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느낌은 비슷한 것 같다. 자국을 벗어나 미지의 타국에서 살아가야 하는 외로움과 두려움 같은 정신적, 육체적인 고통속에서 삶의 의미와 자아를 찾으려는 주인공들의 모습들 속에서 광활하지만 척박한 토지위에서 잡초처럼 질긴 생명과 적응력을 가지고 살려고 했던 외국 이주민들의 한과 노력이 그 안에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았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세상 끝의 정원'속에서 주인공 마르타. 자신의 굳은 의지로서 고향을 등지고 캐나다의 볼린 지역에 정착하게 된다. 갖은 고생과 고통을 이기면서 자식들을 키우고, 그들에게 삶의 기반을 만들어 주지만, 그것마저도 인정치 않는 남편 스테판의 무관심과 시기속에 자신에 대한 자각과 삶에 대한 끊임없는 자문들을 정원이라는 성스로운 공간의 꾸밈을 통해 극복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통해 더욱 강하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우두 골짜기'에서 두코보르 사람들이 자신들이 오랫동안 살 수 있고, 정착할 수 있는 곳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들 또한 이런 작가의 생각들이 녹아내려 있는 것 같다.

이에 반해 비슷한 느낌이지만, 다른 주제로 이야기 하는 작품들이 있다. '삼리웡, 그대 이제 어디고 가려는가'에서 미지의 땅에 정착한 중국인 삼리윙을 통해  외국 이주민으로서 살아야 하는 번뇌와 고통 그리고 문명의 발달이 오히려 순수한 인간들을 인간미가 상실된 잘못된 길로 인도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고 있는 듯하다. 또한 '한 나그네가 찾아와 문을 두드린다'에서는 어느 비가 세차게 내리는 날에 불쑥 방문한 이름모를 사촌 귀스타브. 그를 통해 외국이주민으로서 잃어버린 자국의 가족과 사람들의 모습을 간접적으로 체험함으로써 자신의 현재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과거에는 좋지 못하고 안 좋은 가족간, 사람들간 관계도 귀스타브 말속에서 어쩔 수 없이 일어났던 상황으로 변하고, 오히려 아름답게 윤색됨으로써 현재의 삶을 꾸준히 이어갈 수 있는 삶의 희망과 용기를 주고 있다. 나중에 그의 말이 거짓말로 판명되어지지만 그것은 거짓말을 가장한 진실처럼 그들의 기억속에 남게 된다는 내용은 웬지 모를 삶의 이치를 깨닫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타국에 살면 애국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과거에 살았던 자국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 안정성을 벗어나 불안정과 두려움으로 가득찬 타국속에서 더욱 굳건한 자국에 대한 애정은 수구초심의 색다른 표현이 아닐런지? 캐나다 문학이 이런 외로움과 감정들에 대한 표현과 느낌들은 읽는 이들에게 문학 작품 이상의 느낌과 감동을 주고 있다는 생각을 이 책을 놓으면서도 잊혀지지 않고 계속되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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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플 라이프
기타가와 에리코 지음, 김난주 옮김 / 해냄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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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때에 병이 생긴 후 장애인이 되버린 도서관 사서 쿄코. 아리따운 그녀에게 정상인과의 사랑은 어울리지 않은 일처럼 살아왔으며, 늘 죽음이라는 실체를 몸으로 느끼고 살아가고 있다. 그녀에게 사랑이라는 느낌을 주고 진정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든 '핫립'의 미용사 슈지와의 안타깝고 가슴저린 러브스토리라고 이 책의 첫 느낌을 말하고 싶다. 일본드라마 작가로서 최고의 명성과 인기를 누리고 있는 기타가와 에리코씨의 작품이라는 책의 설명과 우리와의 문화적 유대성이 외국문학으로서는 어느 나라보다 친밀도가 높다는 이유만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소 순간 순간 변하는 드리마적 상황이나 장소의 이동은 읽는 이에게 다시끔 읽게 되는 수고와 함께 감정적 몰입이 다소 저해되는 면을 주고 있다는 점이 아쉽지만 편한 마음으로 무엇가를 읽게 되고 나도 모르게 때론 기쁨과 슬픔의 양면적 감정에 휩싸이는 느낌때문인지 한 편의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다.

죽음은 우리에게 늘상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며, 결국 하나의 생명체는 그곳으로 귀결된다는 사실에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남녀간의 사랑마저도 죽음앞에서 그것이 가지는 의미보다 더 강한 빛을 발하기에 많은 소설 작품이나 영화, 드라마속에서 감동과 애절함을 주는 도구로서 쓰여지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래서 늘 행복하게, 기쁘게 보다가도 마지막 결말이 주는 잔인함에 항의를 하고 싶고, 한없이 우울해지는 나를 보게 된다. 이 책은 이것에 장애인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와 차별적인 요소를 부각시켜줌으로써 더욱 더 슬픔을 부각시키려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작가로서 굳이 이런 동정적인 감정의 유도와 행동들이 오히려 장애인들에게 그들이 한 주체로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일종의 두려움과 편견을 심어주는 것이 아닌지? 또한, 비장애인인 평범한 사람들에게 장애인들도 늘 패배자적 느낌에 감상적 동정을 바라고 있는 모습으로 비춰지게 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어진다. 사실 이렇게 묻고 싶으면서도 장애인이 옆에라도 지나가라치면 의심과 껄스로움 표정을 짓는 나 자신을 느끼게 될때면 죄스러움마저 느끼게 되는 것은 비단 나뿐일까?

영화 '선물'에서 병든 아내가 무명 개그맨이면서 남편의 첫 개그콘서트를 보기 위해 힘든 몸을 이끌고 그것을 보지만 끝내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것처럼 쿄코 역시 자신이 사랑한 남자의 헤어 컬렉션에서 그의 응원하려 갔다가 그만 죽게된다는 내용은 다소 흔해빠진 결말처럼 기운이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슈지가 쿄코와 같이 꿈꿔왔던 해변의 미장원에서 풍경을 마지막으로 끝을 내는 장면은 그들의 사랑이 완성되면서 새롭게 시작되어지는 느낌으로 편한 미소을 머금고 책을 놓을 수 있어 좋았다.

사랑이 주는 힘. 어떠한 좌절과 극단적인 죽음 앞에서도 절대 물러서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이기에 인간이라는 존재가 이성적으로 무엇가를 느끼고, 행하기때부터 계속적으로 그려지고 찬양되었던 사랑이 아직까지 질리지 않고 우리에게 먹히는 것은 우리가 바보로서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가 아닐까 생각을 마지막으로 하면서 이 책을 놓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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