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 슬기로운 방구석 와인 생활
임승수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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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당장 와인 사러 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와인 초심자에게는 훌륭한 입문서이자 와인 애호가에게는 꿀팁이 되어줄 와인 실용서!

 

 

 

  내 생애 첫 와인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다 피식 하고 웃음부터 새어나왔다. 대학교 3학년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호감이 가는 오빠가 있어 친구들과 작당모의를 한 끝에 그 오빠가 일하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카페라고 해서 커피와 디저트류를 판매하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은 와인바에 가까울 정도로 상당한 양의 와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무슨 허세인지 이왕이면 자주 마시는 커피 대신 와인 한 병을 마셔보자 하고 마시기에 적당한 와인 한 병을 추천받았다. 지금은 그때 마신 와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소주와 맥주만 마시던 대학생들에게 가히 충격적인 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적당한 타닌에 밸런스는 물론 목넘김도 좋아서 우리 다음 달에 각자 아르바이트비를 벌어서 또 와보자 하고 함께 다짐까지 했었다.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랄까.

 

 

 

  그렇게 와인에 대한 첫 인연이 쭉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오빠가 카페 일을 그만두면서 와인 마시기를 향한 야심찬 계획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후 다시 와인을 찾게 된 것은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던 언니 둘과 종종 일이 끝나면 방구석에 모여 앉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분은 내고 싶은데 술은 잘 마시지 못하는 언니들이라 선택하게 된 게 화이트 와인이었다. 치즈나 과일, 과자 같은 간식과 잘 어울리는 데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한 여름의 수다와 이보다 잘 어우러질 수가 없었다. 그때 주로 마셨던 칠레산 아이스 와인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내게 있어 와인은 여전히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주류는 아니다. 지금이야 검색만 하면 각종 블로그나 와인 소비자들의 리뷰를 통해 맛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때에는 어떤 게 내 입맛에 맞을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주머니 사정이 빈곤한 사람에겐 선택이 조심스럽게 마련이다. 그나마 특별한 날에 야심차게 선택해 구입하면 코르크 마개가 부러져 가루가 병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날 먹는 음식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씁쓸함만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실망스러운 일이 몇 번 반복되다보니 2년 전을 끝으로 와인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되었는데,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읽고 나니 다시 와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깨어나 머리와 입 속을 살살 맴도는 느낌이다. “당장 와인을 사게 만드는 글”이라는 호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와인서쳐 앱을 깔고 책에서 나오는 와인을 검색하며 무슨 와인을 살까 고민하고, 당장 마트로 달려가서 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를 반복했던 게 대체 몇 번이나 되는지. 혹시나 뒷 페이지에서 더 사고 싶은 와인을 소개해줄지도 몰라, 조금만 더 참고 읽어보자 하고 마음을 다독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슬기로운 와인 생활을 위한 와인에 대한 모든 것

 

 

 

  이 책은 자칭 와인교에 귀의한 한 사내의 좌충우돌 신앙생활을 솔직담백하게 담고 있다. 자칫 와인에 흠뻑 빠지면 가상탕진은 식은 죽 먹기라던데, 첫 만남의 신비로운 체험으로 인해 아내의 등짝 스매싱과 경제적 압박이라는 고진 박해를 견디면서도 꿋꿋이 와인 생활을 즐겨온 작가는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이 실수를 줄이고 슬기롭게 와인을 즐길 수 있을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를 테면 와인 라벨 읽는 법, 와인 잔 선택하는 법,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는 법, 와인에 맞는 안주 고르는 법 등 초보 와인 구매자들을 위한 기본 정보에서부터 와인 정가에 속지 않는 법, 직구로 와인 사는 법, 와인 평론가 점수 참고법 등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팁들도 함께 소개한다.

 

 

 

쭈뼛대는 내 모습을 포착하고는 와인 수입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접근했다. 참고로 마트의 와인 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체로 와인 수입사 소속이다. 결국 직원의 친절한 응대로 할인가 5만 원의 그 와인을 구입했는데, 내가 와인 초짜임을 파악한 직원은 신신당부했다.

“와인을 드시기 30분 전에 냉장고에 넣으세요. 와인은 온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꺼내서 바로 드시지 말고 코르크를 연 후 최소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천천히 드세요.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이 점차 부드러워지거든요.” / 19p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변화는 과정을 브리딩이라고 한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숨을 쉰다는 의미인데, 에어레이션이라고도 한다. 브리딩을 하면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마냥 방치하면 지나치게 산화가 진행되어 오히려 풍미가 꺾이고 심지어 식초가 되기도 한다. / 30p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궁극의 아이템으로 추천하는 ‘와인서쳐’ 앱은 이 책에서 알게 된 매우 유용한 정보 중 하나다. 와인서쳐 앱을 다운로드 받아 여기에 라벨 사진 혹은 와인 이름을 입력을 입력하면 해당 와인의 해외매장 판매가격 및 평균 거래가격이 나온다. 예를 들어 와인서쳐에서 테루뇨 카베르네 소비뇽을 검색하면 해외 평균 거래가(세금 제외)가 4만 2,086원(2020년 12월 6일 기준)인데, 국내 마트 판매가가 5만 원(세금 포함)이면 상당히 준수한 가격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찾고 싶은 와인 제품명이 있어 검색해보니 다양한 제품들을 두루 볼 수 있는 데다 가격 비교까지 한꺼번에 할 수 있어 내가 구매하려는 와인의 가격이 합당한 수준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책에서는 안주 정보를 참고하는 데 ‘비비노’ 앱도 추천한다. 해당 앱에서 베린저 프라이빗 리저브 샤르도네를 검색하면 돼지고기, 기름진 생선, 채식 신단, 가금류를 안주로 추천하는데, 베린저 샤르도네의 풍미를 떠올렸을 때 꽤 설득력 있는 안주 목록이라고 하니 참고할 만하다. 와인서쳐와 비교하면 가격 정보 신뢰도는 떨어지지만 사용자들이 매긴 와인 평점 평균치를 비교할 수 있는 점도 나름 유용할 듯하다.

 

 

 

와인을 고를 때, 나는 와인 산지부터 정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타 밸리, 프랑스 보르도의 마고, 프랑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이런 식으로 포도 재배지를 특정하면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다. 와인을 산지별로 경험하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는 데에도 수월하다. 예컨대 나는 샤토 보날그 2008 빈티지를 경험하고 한동안 포므롤 와인을 찾아 마셨다. 특유의 덕후 기질 때문이기도 한데, 은행 잔고가 급격하게 감소했지만 어쨌든 와인 경험치 상승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 62p

 

 

그런 이유로, 와인을 진지한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와인셀러를 구비한다. 다만 와인을 구매해서 며칠 사이에 바로바로 마시는 경우라면 굳이 와인셀러에 보관할 필요는 없다. 서늘한 곳이나 (여름에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 / 86p

 

 

보르도 잔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같이 바디감 묵직한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뚱뚱한 부르고뉴 잔은 피노 누아처럼 섬세한 향의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화이트 와인 잔은 레드 와인잔에 비해 크기가 작다. 화이트 와인은 대체로 차갑게 마시므로, 공기 접촉면을 줄여 온도 상승을 늦추기 위함이다. 디저트 와인 잔은 화이트 와인 잔보다 더 작다. 당도와 알코올 도수가 높은 디저트 와인을 마시기에 적합한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위스키나 소주잔을 봐라. 작지 않은가. / 116p

 

 

 

  이 외에도 책에서는 코르크 옆면으로 끓은 흔적이 보이는 열화 와인과 같이 와인 보관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와인을 구매했을 때 와인을 교환하거나 환불하는 방법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작황이 안 좋을 때 만든 와인에 대한 선입견, 프랑스 와인이면 다 좋다는 편견과 오해들도 살펴본다. 비싼 와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저렴하다고 해서 다 맛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불식시켜주기도 한다. 더불어 이 책의 가장 꿀팁이라 할 수 있는 연말연시 가성비 최강 와인 리스트, 2만 원대 최강 와인 리스트, 숙성 와인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와인 리스트, 우울할 때 마시기 좋은 와인 리스트, 3만 원대 가성비 와인 리스트, 가을에 어울리는 와인 리스트, 비 오는 날 추천 가성비 와인 리스트 등 무궁무진한 와인의 세계 속에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까지 소개해주니 이대로 옮겨 적고 우리는 얼른 와인 매장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코르크를 보니 열화 와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화 와인이 뭐냐고? 와인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면, 일반적으로 코르크와 와인이 닿는 둥근 면만 빨갛게 착색된다. 하지만 열화 와인 코르크는 와인이 옆면으로 치고 올라온 흔적이 선명하다. 그 흔적의 형태가 마치 와인이 끓어오른 것 같다고 해서 ‘끓은’ 와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와인은 열에 민감해서 섭씨 30도 혹은 그 이상의 온도에 장시간 노출되면 변질되는데, 그 과정에서 코르크 옆면으로 끓은 흔적을 남긴다. 정도가 심하면 와인이 병 밖으로 새어 나와 알루미늄 포일에 묻고, 그 탓에 포일이 병에 달라붙기도 한다. / 122p

 

 

2017년에 2007 빈티지를 지인에게 선물로 받아 마셨다. 보르도 2007년은 작황이 매우 좋지 않은 해라 별 기대감 없이 마셨는데, 맛과 향이 상당히 맘에 들어 깜짝 놀랐다. 작황이 안 좋을 때 만든 와인은 타닌이 부족해 여타 빈티지보다 더 빨리 숙성된다. 그러다 보니 10년 만에 충분히 숙성이 진행되어 마시기 좋았던 것이다. 고급 와인은 작황이 안 좋은 빈티지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131p

 

 

맞다. 스월링 얘기다. 와인을 잔에 따랐으면 돌려라. 허리케인을 일으키듯 빙빙 돌려라. 그러면 와인이 산소와 활발하게 접촉해 향기를 한껏 뿜어내고 맛도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 과도한 스월링은 와인의 산화를 촉진해 풍미가 급격하게 꺾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나는 여태껏 그렇게 돌려댔는데도 풍미가 급격하게 꺾인 기억이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냥 돌려라. / 162p

 

 

 



 

 

 

 

  이렇듯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은 와인 에세이답게 와인 한 병에 담긴 진솔한 경험을 담아냄과 동시에 와인에 관한 각종 정보들을 담은 실용서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책이다. 더불어 작가의 유쾌한 입담과 ‘내돈내산’에 입각한 솔직한 평들은 책을 읽는 재미와 더불어 와인을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와인을 사러 가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당장 이번 주말에 남편과 어떤 와인을 마실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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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1
이철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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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무늬를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언어로 담아내는 작가!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오래전 하마를 길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하마는 성질이 사나워 길들이기 어려웠다. 하마를 길들이려면 채찍으로 하마의 몸에 선명한 기억을 남겨야 한다. 가장 좋은 채찍 재료는 하마 가죽이었다.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맞으며 하마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꼴이 되었다. 하마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마는 자신을 지키려고 강인한 가죽을 만들었는데 그 강인한 가죽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굴복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엔 수많은 하마가 살고 있다. / 127p

 

 

 

  대한민국이 소란스럽다. 오늘은 또 어떤 뉴스가 나를 위협할지 두려울 지경이다. 하마를 길들이기 위해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휘두른 채찍에 우리가 옭아매어지고 상처를 입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심각해지고 있는 소득격차, 대학 서열화와 입시 경쟁, 양극화된 정치와 신념, 저출산에 따른 인구 절벽의 현실화, 여기에 1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까지. 이따금 뉴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사건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때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것이 있었는데, 치솟는 부동산세에 내 집 마련이 점점 힘들어지는 청춘의 미래와 애초에 출발선부터 달랐던 부의 경쟁 속에서 이미 멀찌감치 밀쳐져있는 현실을 실감할 때면 이렇게 내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게 다 무엇인가 이내 절망스러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 캄캄한 현실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듯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의 서사는, 우리의 서사는 좀 더 단단해지겠지. 소설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에서 작가 이철환 역시 이렇게 말한다.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이 감추고 있는 빛의 실체가 있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그것을 ‘어둠의 빛’이라 명명했다. 캄캄한 시간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오직 어둠을 통해서만 인도되는 빛이었다. 어둠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대한민국의 무늬를 언어로 담아내다

 

 

 

  소설 『연탄길』로 익히 잘 알려진 이철환 작가의 신작이다.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그 속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었던 작가의 전작이 그러하듯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역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소시민들의 애환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잘 녹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만난 용팔과 영선 부부는 고래반점이라는 중국집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생인 동배와 고등학생인 동현을 둔 학부모이자, 건물주인 최대출의 비위에 맞춰가며 해마다 돌아오는 임대비 상승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세입자다. 부모를 잃은 남매 인혜와 인석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고, 용팔의 지인인 인하는 시각장애인으로 일하고 있던 학교를 그만둔 처지다. 용팔의 아들인 동현은 같은 반 친구인 서연을 짝사랑하고 있지만 학력과 가정형편의 차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멀찍이 바라만 볼 뿐이다. 반면 최대출의 딸인 서연은 도망간 엄마가 그러했듯 아빠인 최대출의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디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우리네 이웃 중에 흔히 볼 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정직한 재료로 음식 만들겠다고 약속했어.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아.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상 사람들은 내 속마음을 환히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어. 근사하게 속여도 근사하게 속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말이었던 것 같아.” / 35p

 

 

자연은 더 이상 종교가 될 수 없지만 자연 속엔 종교적 제의가 가득하다. 제비의 생존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오는 연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흙과 지푸라기를 물어 나를 때 이외에는 인간에게 오해 받기 싫어 땅에 잘 내려앉지 않는 제비의 강박적인 일상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흙과 지푸라기를 자신의 침으로 비벼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붙여나가는 제비의 집 짓는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겨울이 가고 삼월 삼짇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왔던 제비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이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그래서 자연을 제2의 성서라고 말했던 것일까? / 56p

 

 

“대학 입시가 없어지면 교실에서 진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건 경쟁지상주의가 아냐. 부당한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야 하고,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줘야 돼.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강한 자아를 가진 자존감 높은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의 방향을 대전환해야 돼. 학교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잖아.” / 64p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언뜻 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서사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 구성이 아니라 용팔과 그의 지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가장의 무게, 불공정한 현실, 불안과 불신으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그의 푸념과 자조에는 병들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통찰에는 “작은 돌멩이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어둠을 뚫고 날아간 작은 돌멩이가 그 거대한 벽에 부딪힐 때 나는 ‘탁’ 하는 소리는 어둠 저편에 우리가 넘어야 할 혹은 우리가 부수어야 할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엔 충분”하다던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서려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려는 이웃이 있는 한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견 없는 합일보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이 땅의 역동성을 더 신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본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서 “자족감이 주는 충만을 나는 사랑한다. 결핍이 주는 열망을 나는 더욱 사랑한다. 문제아를 만드는 문제어른들이 가득한 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어요. 머리 아플 정도로 사람도 많고 차도 많지만 가끔씩 서울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저는 분주한 서울의 모습이 좋아요. 가끔씩 서울 가면 이곳처럼 고요하지 않아 좋았어요. 인구 1,000만 명이 살고 있는 서울이 늘 고요하다면 죽은 도시 아닌가요? 공존할 수 있는 차이는 이견 없는 합일보다 역동적입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서울의 역동성을 저는 신뢰합니다. 대한민국이 더 좋은 나라로 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 149p

 

 

“나도 처음엔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했거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족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집안에 억압이 없다는 거잖아. 엄마나 아빠 목소리만 크게 들리면 그 집은 위험한 집이야. 그 집에 억압된 자아가 있다는 뜻이잖아. 피를 나눈 식구지만 여러 사람이 한집에 붙어 사는데 싸움이 없으면 비정상이지. 지나치지 않다면 소리 지르며 싸우는 가족이 건강한 가족이야. 시끌벅적한 집안에 상처받은 자아도 있지만 그 상처는 일방적인 상처가 아닐 테니 그 집안은 무너지지 않을 거야.” / 149p

 

 




 

 

 

 

 

  소설의 말미에 서연이 아버지인 최대출의 폭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그녀에게, 최대출과 같은 권력자들로부터 폭력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위안과 희망을 줄까. 왠지 그라면 좀 더 따뜻하고 건강한 희망을 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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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알래스카
안나 볼츠 지음,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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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따뜻한 이야기!

 

 

 

나에게는 도우미견이 있고, 우리 집은 이층집인데 내 방은 일 층에 있고, SOS 호출 밴드가 손목에 걸려 있고, 약통을 들고, 헬멧을 쓰고 있다.

나는 스벤이다. 취미는 뇌전증이다. / 170p

 

 

 

  나는 두렵지 않다. 전혀 두렵지 않다. 스벤은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 앞에 우뚝 선채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되뇐다. 친구들은 전부 중학교 1학년이 되지만 자신은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 구석에 처박혀야 한다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이, 구급차에서도 뇌전증 센터에서도 교실에서도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키며 자주 기절하는 아픈 아이. 카메라, 경보기, 도우미견까지 온갖 안전장치의 감시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긋지긋한 시선들, 때문에 이사를 하고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교실로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언제고 발작을 일으키는 날이면 반 아이들은 몸속에 귀신이 들기라도 한 듯 끔찍하게 바라보거나 장애인 취급을 하며 불쌍한 아이라고 여길 테니까. 그나마 학교가 뒤집힐 만한 어마어마한 짓을 벌이거나 못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두렵지 않은 척 해보는 수밖에.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갔다. 이 교실에는 나를 아는 애도 하나도 없고, 지난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애도 없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신호등이 늘 초록 불일 수만은 없어. 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 13p

 

 

 

  부모님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총기를 든 강도들이 습격한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파커. 새 학년 새 교실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첫 날부터 계획이 삐끗거린다.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개의 울음소리로 징글벨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벤, 저 못된 녀석이 유독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럴 때 알래스카라도 곁에 있다면 좋았을 텐데. 동생의 개털 알레르기 때문이 아니었다면 알래스카와 이별할 일은 없었을 텐데. 지난 넉 달간 알래스카를 찾으려고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대체 누구에게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그리운 마음만 더욱 커져가는 가운데, 마치 기적처럼 학교 운동장에서 알래스카를 발견한다. 너무나 끔찍하게도, 하필 알래스카의 주인이 스벤이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소설 『안녕, 알래스카』는 뇌전증 앓고 있는 소년 스벤과 불의의 사고를 겪은 소녀 파커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세상을 향한 벽을 세우고 원망하는 마음을 키우고 있는 가운데, 한때는 파커의 반려견이었던 알래스카가 스벤의 도우미견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이들은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상대방에게 터놓기 시작함으로써 함께 아픔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네덜란드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황금연필상과 은손가락상, 독일 청소년문학상 등 유럽 내 주요 문학상을 수차례 수상한 작가의 작품답게 소설은 반려견과 소년 소녀의 우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십대 청소년들이 성장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내적, 사회적 고민들을 촘촘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반복적인 발작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뇌 장애를 가리키는 ‘뇌전증’을 소재로 하여 흔히 갖게 되는 장애에 관한 편견과 시선, 그로인해 뇌전증 환자들이 겪게 되는 소외와 상처를 들여다보게 한다. 비록 그들이 처한 현실과 환경은 다를 수 있지만 함께 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울림을 준다.

 

 

 

도우미견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의 볼을 꼬집고 지나가지는 않잖아? 또 비행기 조종 중인 조종사의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우지 않잖아? 알래스카도 경찰이나 비행기 조종사와 다를 게 없다. 알래스카가 덮개를 두르고 있으면, 도우미견으로서 일하는 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멍청한 구경꾼들의 무례한 손놀림을 기다리느라 가만히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 112p

 

 

“너는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누구나 가끔은 화성을 왔다 갔다 하거든. 네가 그랬잖아. 다들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흠, 정신 나간 것도 마찬가지야. 사람은 다들 조금씩 정신이 나가 있어. 나도 내가 어떻게 숨 쉬는지 온종일 설명해야 하지. 그렇게 죽어라 설명하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 167p

 

 

 




 

 

 

 

  소설 속에는 스벤이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아이들이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여러 사람에게 공유하는 바람에 스벤이 학교를 그만두는 장면이 나온다. 파커 역시 개의 울음소리로 징글벨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칫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너무 튄다는 이유로, 반대로 누군가는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도 따돌림을 당할 수가 있다. 나 역시 겪어본 일이기에. 더욱이 휴대폰이라는 그럴 듯한 도구가 한 사람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이 너무나도 쉬워진 요즘일수록 아이가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지, 부모인 나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어쩌면 이 책이 위로와 용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이 책을 꼭 함께 읽어보자고 권해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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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말하지 않을 것
캐서린 맥켄지 지음, 공민희 옮김 / 미래지향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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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마다 나누어 쥐고 있는 진실의 퍼즐을 짜 맞출 것!

거듭되는 추리의 혼선, 마지막까지 향방을 알 수 없는 반전에 반전의 연속!

 

 

  “추억의 명곡을 들려 드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다.” 노래가 끝나자 라디오 DJ가 말한다. “1998년 여름으로 떠나 보시죠.” 마고는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캠프 마코의 긴 비포장 진입로를 들어서며 1998년의 여름, 그때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모든 것이 의미가 있었고, 차라리 다 잊어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바로 열일곱 살의 그때. 7월의 캠프가 한창 무르익어가던 날 밤, 친구인 아만다가 비밀해변에서 의식을 잃고 머리에 피를 흘린 채 발견된 바로 그 날로부터 그녀는 한 발짝도 멀어지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그 때 범인이 바로 잡혔더라면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었을까. 이렇다 할 충분한 증거가 없어 사건은 종결되었지만 이 때문에 자신을 포함해 캠프 마코의 소유주인 맥알리스터 가족 전체가 그날을 가슴 속에 묻은 채 살아가야 했다. 아버지가 남긴 수수께끼 같은 유언장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 말하지 않아

 

 

 

둘 중 한 명이 죽음에 관해서 무슨 말을 했다. 시체 혹은 죽은 소녀라고 했다. 그래서 난 살아 있어, 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내 머릿속에서만 울릴 뿐 그들은 듣지 못했다. 움직여, 난 생각했다. 뭐라도 하라고. 하지만 온몸이 꽁꽁 얼어붙어 모든 것이 고통스러웠다. 좀 움직여. 움직이라고. 난 온 힘을 다해 집중해서 손을 움직였다. 나는 미친 듯이 손을 흔드는 것 같았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또렷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 122p

 

 

 

  기차 탈선 사고로 맥알리스터 부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마고와 라이언, 메리, 케이트와 리디가 캠프장으로 모여든다. 이틀 뒤, 추도식이 열리는 날까지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에 따라 캠프장을 계속 운영할 것인가 팔 것인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그들의 얼굴에는 저마다 복잡한 기류가 흐른다. 라이언은 회사 자금을 위해 내심 캠프를 팔고 싶지만, 케이트는 계속 유지하기를 원한다. 마고와 리디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며 메리는 그저 캠프를 남겨 둔 채 떠나고 싶은 마음이다. 그리고 또 한 명의 인물, 어머니를 일찍 여의는 바람에 오갈 데가 없어지자 맥알리스터로부터 도움을 받은 캠프 지기 션은 캠프가 사라지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은 어디에도 갈 곳이 없음으로.

 

 

 

  가족 변호사인 케빈 스위프트는 그렇게 캠프 지기인 션까지 함께 동석한 가운데, 가족 모두에게 맥알리스터의 다소 충격적인 내용의 유언을 읽기 시작한다. 문제는 유언장에 캠프를 계속 운영할지 말지 결정권을 맡기겠다는 단순한 내용만 적혀 있는 게 아니었다 것. 아만다의 죽음을 둘러싼 과거의 진실이 무엇인지, 아들인 라이언이 용의자일 것이라 짐작하면서 가족 전체가 라이언이 무죄라는 만장일치의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그에게 재산을 상속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만약 자매들이 만장일치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면 라이언의 몫은 션에게로 돌아갈 것이라는 내용까지 덧붙여서. 자신에게 불리한 아버지의 충격적인 유언에 상처를 입고 화가 난 라이언, 졸지에 라이언 대신 상속을 받게 될지도 모르는 션, 이 모든 게 얼떨떨한 자매들. 과연 그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라이언이 진짜 아만다를 헤친 범인일까 혹은 다른 제3의 인물일까? 다만, 범인이 라이언이든 아니든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아만다를 헤친 사람이 가족 중 한 명이라는 것을 이미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이제는 정말 저마다 나누어 쥐고 있는 진실의 퍼즐을 짜 맞춰야 할 때가 왔다.

 

 

 

사실 라이언은 한편으론 그렇게 생각하는 부모님이 이해가 갔다. 그를 잘라내고자 하는 마음이 적어도 이해는 되었다. 가족 중에 여성에게 연쇄적으로 해를 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상속권을 박탈하는 것이 최소한 부모가 할 수 있는 행동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그의 운명을 여동생들의 손에 맡기다니?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가 대체 무엇인가? 번거롭게 그럴 거 없이 그냥 그를 경찰서에 넘기고 신경을 꺼도 됐을텐데. 뭐가 어떻게 됐든 그는 꼼짝없이 당하게 생겼다. / 162p

 

 

왜 그녀는 라이언이 아만다를 공격했다고 생각했을까? 사실 모든 증거가 그를 가리키고 있었다. 20년 전 호수에서 리디는 카누 반대편 끝에 팔을 축 늘어뜨린 아만다와 함께 섬에서 벗어나 노를 젓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았다. 나중에 비밀 해변에서 라이언을 만났을 때 그 점이 더 분명해졌다. 그리고 그는 내낸 둘에게 비밀을 지키라고 당부했다. 마고를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하지만 리디는 마고가 한 짓이 아니라는 것을 뼛속 깊이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그렇게 아만다를 남겨두고 떠난 걸까? 라이언은 결백했던 것일까? / 367p

 

 

 



 

 

 

 

  이처럼 소설 『절대 말하지 않을 것』은 20년 전에 캠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을 둘러싸고 저마다 비밀을 간직한 맥알리스터 가족이 개개인의 시선을 통해서 그날의 진실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심리 스릴러다.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고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 각자의 관점에서 과거의 사건과 현재를 오가며 알리바이를 완성하고 그 속에서 진실과 거짓을 밝혀내는 이러한 전개 방식은 독자들의 추리에 거듭 혼선을 빚게 하여 마지막까지 사건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만든다. 그러는 가운데 소설 중간 중간에 사건의 당사자인 아만다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그날의 진실, 가족의 알리바이를 기록한 시간표가 소설이 진행될수록 차츰 채워질 때마다 고조되는 긴장감은 이 소설의 백미다. 특히 작가는 가장 친밀해야 하는 구성원인 ‘가족’이 서로를 믿지 못하거나 때로는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할 때 빚어지는 비극을 꽤 능숙하게 다룰 줄 안다. 덕분에 서로를 경계하고, 날선 적대감을 드러내며 때로는 가장 이해받고 있다고 생각했던 대상으로부터 위협을 당할 때 느끼게 되는 이들 인물간의 감정은 그 어떤 잔인한 장면보다 공포스럽다.

 

 

 

“아만다에게 일어난 일은 장난이 아니야.” 션이 말했다. “그 애는 아무 잘못이 없어.”

“꼭 그렇지도 않아요.” 메리가 끼어들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마고와 메리의 눈이 마주쳤다. 마고는 전에도 아만다에 대해 이런 말을 들었고 그럴 때마다 화가 났다. 아만다가 몰래 빠져나가지 않았다면…… 아만다가 자기 역할에 충실했다면…… 아만다가 이랬다면, 아만다가 저랬다면. “아만다에게 벌어진 일은 그 애의 잘못이 아니야.” / 103p

 

 

케이트가 고개를 돌렸다. 어쩌다 둘 사이가 이렇게 된 걸까? 마치 자신과 싸우는 것과도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그녀가 아는 다른 쌍둥이 자매들은 성인이 된 지금도 똑같은 옷을 입지만 리디는 평생 동안 자신에게서 멀어지려고 하는 것만 같았다. 바보 같은 일을 꾸며서 같이 하자고 꼬드기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둘이 DNA를 공유하는 현실을 부정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 201p

 

 

 



 

 

 

 

  소설은 말한다. 가끔 쉽게 밝혀질 거짓말이라도 거짓이 진실보다 더 수월한 경우가 있다고. 우리는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얼마나 솔직해질 수 있을까. 그로 인해 벌어진 상처와 비극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아물어질 수 있을까. 반전에 반전을 더하는 극적 재미와 묵직한 메시지를 함께 지닌 소설로 심리 스릴러만의 특별한 묘미를 즐겨보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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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락 댄스
앤 타일러 지음, 장선하 옮김 / 미래지향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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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가족과 관계 맺기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소설!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이 잃어버렸던 기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다!

 

 

  마흔을 앞두고 있는 요즘, 문득 조바심이 일기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선택지가 점점 줄어드는 것 같은, 내게 주어진 기회들도 함께 줄어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 때문이다. 아이들을 키우고 남편을 내조하고 있는 지금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지만 나이의 제한 때문에, 시간의 제약 때문에 망설이거나 포기하게 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듯해서다. 그렇게 소거하고 소거하다보면 정작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때가 오는 것은 아닐까 그게 더 두렵기도 하다. 덕분에 나는 세상의 많은 ‘엄마’들이 잃어버리고만 ‘기회’들이 부쩍 눈에 밟힌다. 소설 『클락 댄스』도 바로 그런 기회에 관한 이야기다. 가족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느라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를 거듭 놓칠 수밖에 없었던 한 여성 그리고 그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 그것은 세상의 많은 엄마와 여성들을 향한 아름답고도 따뜻한 헌사다.

 

 

 

새로운 희망과 자기발견을 위한 메시지

 

 

 

저 학생들은 모두 완벽하게 행복한 집에서 살고 있을까? 집에서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 감추고 있는 학생은 한 명도 없을까? 누구도 그런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 30p

 

 

 

  이따금 아이들은 이런 생각을 한 번쯤 하곤 한다. “엄마가 영원히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1967년, 윌라 드레이크는 어느 날 갑자기 엄마가 사라지고 없는 집 안 풍경에 슬쩍 두려워진다. 사실은 늘 있는 일이었다. 불같이 화를 내는 순간이 지나고 나면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는 엄마. 다짜고짜 혼자 집을 나가버리곤 마치 아무 일 아니었다는 듯 돌아와 천연덕스럽게 집안을 누비곤 했던 엄마. 더 슬픈 사실은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또 엄마에게 두 팔 벌리고 다가가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건 결국 윌라를 비롯해 여동생인 일레인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훗날 윌라는 엄마처럼 되지 않기 위해, 자식들이 엄마 기분이 어떤지 몰라서 노심초사하며 아침마다 방문을 살짝 열고 엄마의 기분을 살피며 오늘은 어떤 하루가 될까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했으니까. 반면 일레인은 아예 가족에서 벗어나려 애쓰고, 그나마 윌라와 드물게 서로 얼굴을 마주할 때도 마치 어떤 자연재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생존자처럼 강박적으로 어린 시절 얘기를 반복하곤 한다. 그나마 소리 한 번 지른 적 없는 자상한 아빠가 늘 곁에 있었다는 것은 두 딸들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윌라가 자기중심적인 성격의 데릭과 피터 같은 남자에게 이끌린 이유가 아빠의 우유부단한 성격에 대한 불만에서 기인한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괴팍한 엄마 밑에서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제일 슬픈 게 뭔지 알아? 그런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은 또 엄마에게 두 팔 벌리고 다가가 위안을 얻어야 한다는 거야. 정말 불쌍하지 않아?”

“일레인, 이제 그만하고 잊어버려.” 윌라가 말했다.

그러고 나서 윌라는 그렇게 매몰차게 말한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 100p

 

 

일레인의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순간 윌라는 동생과 터놓고 소통할 수 있었지만 놓쳐버린 기회들이 떠올랐다. / 106p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자신의 꿈을 접고 일찍이 데릭과의 결혼을 선택한 윌라는 보복 운전을 하다가 일어난 사고로 인해 그만 남편을 잃게 된다. 뜻밖의 젊은 미망인이 된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상처처럼 끌어안고 겨우겨우 하루를 살아간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피터라는 남자와 재혼한 그녀는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애쓴 것과 달리 성인이 된 두 아들과는 데면데면하게 지내다 어느 날, 뜻밖의 전화 한 통을 받게 된다. 아들 션의 전 여자친구였던 드니즈가 다리에 총을 맞아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어린 그녀의 딸을 돌볼 사람이 없게 되어 이웃이 윌라에게 전화를 건 것이다. 사실 셰릴은 션의 딸이 아니었기에 윌라에겐 볼티모어까지 날아가 셰릴을 돌봐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었지만 윌라는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을 향해 기꺼이 비행기에 오른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알지 못한다. 이렇다 할 만한 일이 없어 다소 무기력해진 상태에 빠져 있던 자신의 삶에 뜻밖의 변화가 찾아올 줄은.

 

 

 

“내가 어떻게 그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는지 알려줄까?” 아빠가 물었다.

“네, 말씀해주세요.” 윌라가 마음을 가라앉히며 말했다.

“난 하루를 각각의 개별적인 순간들로 쪼개기 시작했단다.” 아빠가 말했다. “앞으로 더 이상 기대할 건 아무것도 없었거든. 그래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내가 감사히 여길 수 있는 순간들이 존재했지. 예를 들면 아침에 일어나서 첫 커피를 마실 때, 작업실에서 뭔가 근사한 걸 만들고 있을 때, 텔레비전에서 야구 경기를 볼 때처럼 말이다.” / 108p

 

 

“죽음 뒤에도 그런 일이 생겨요.” 윌라가 남자에게 말했다. “남편이 죽은 후 줄곧 저도 그랬어요. 때로는 치매에 걸린 게 아닌가 싶을 때도 있을 정도예요. 아마 이혼도 또 다른 종류의 사별이 아닐까 싶어요.”

“친구들이 제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불편해한다는 게 다르죠.” 남자가 말했다.

“죽음에 대해서도 그래요. 다들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몰라서 어려워하죠.” / 117p

 

 

 

  볼티모어라는 낯선 동네에서 셰릴과 드니즈를 돌보며 윌라는 이제껏 느끼지 못한 새로운 감정을 갖게 된다. 자신이 꽤 괜찮은 할머니이자 보호자라는 믿음을 주는 사랑스러운 셰릴, 퉁명스럽게 말하곤 하지만 솔직하고 꾸밈없는 드니즈, 수다스럽고 오지랖이 넓어 보이는 괴짜 같은 마을 사람들까지. 이들과 나누는 따뜻한 정과 연대는 이제껏 데릭과 피터가 앞만 보고 돌진하는 동안 뒤에서 그들이 벌려 놓은 걸 치우고 사과하고 설명하며 세월을 보냈던 윌라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자신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지금까지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걸 시도해 볼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동요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난 그렇게 어리지도 않아요. 보기보단 훨씬 어른스럽거든요.”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겠지.” 피터가 말했다. “좀 더 커서 지금 이때를 돌아보면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될 거야.”

그러나 윌라는 셰릴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윌라도 어린 시절에 그런 감정을 느꼈었다. 조심스럽고 주의 깊은 어른이 어린아이의 몸속에 살고 있는 느낌.

그러나 나이가 든 지금은 모순되게도 성인이 된 어른의 얼굴 뒤에 열한 살쯤 된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종종 있었다. / 187p

 

 

“왜 그냥 바라기만 해요? 왜 우유부단하게 망설이기만 하세요? 왜 모든 일에 정면으로 나서지 않고 한 걸음 옆으로 물러서 있는 거예요?” / 252p

 

 

 




 

 

 

 

  이처럼 『클락 댄스』는 가족과 타인을 배려하느라 온전히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던 한 여성이 새로운 삶과 기회에 눈을 뜨게 되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이 가족들에게 희생하느라 잃어버렸던 기회들을 위로하고 응원하는 메시지가 참 따뜻하다. 비록 단란한 일상과 지극히 평범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에 불과할지라도 소통의 부재, 부모의 자존감이 가족에게 미치는 영향 등 진정한 가족과 관계 맺기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만드는 잔잔한 힘은 오랜 여운을 남긴다. 따뜻한 봄날, 이 책을 엄마에게 선물하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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