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1
이철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3월
평점 :

대한민국의 무늬를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언어로 담아내는 작가!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오래전 하마를 길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하마는 성질이 사나워 길들이기 어려웠다. 하마를 길들이려면 채찍으로 하마의 몸에 선명한 기억을 남겨야 한다. 가장 좋은 채찍 재료는 하마 가죽이었다.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맞으며 하마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꼴이 되었다. 하마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마는 자신을 지키려고 강인한 가죽을 만들었는데 그 강인한 가죽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굴복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엔 수많은 하마가 살고 있다. / 127p
대한민국이 소란스럽다. 오늘은 또 어떤 뉴스가 나를 위협할지 두려울 지경이다. 하마를 길들이기 위해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휘두른 채찍에 우리가 옭아매어지고 상처를 입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심각해지고 있는 소득격차, 대학 서열화와 입시 경쟁, 양극화된 정치와 신념, 저출산에 따른 인구 절벽의 현실화, 여기에 1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까지. 이따금 뉴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사건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때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것이 있었는데, 치솟는 부동산세에 내 집 마련이 점점 힘들어지는 청춘의 미래와 애초에 출발선부터 달랐던 부의 경쟁 속에서 이미 멀찌감치 밀쳐져있는 현실을 실감할 때면 이렇게 내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게 다 무엇인가 이내 절망스러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 캄캄한 현실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듯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의 서사는, 우리의 서사는 좀 더 단단해지겠지. 소설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에서 작가 이철환 역시 이렇게 말한다.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이 감추고 있는 빛의 실체가 있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그것을 ‘어둠의 빛’이라 명명했다. 캄캄한 시간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오직 어둠을 통해서만 인도되는 빛이었다. 어둠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대한민국의 무늬를 언어로 담아내다
소설 『연탄길』로 익히 잘 알려진 이철환 작가의 신작이다.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그 속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었던 작가의 전작이 그러하듯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역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소시민들의 애환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잘 녹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만난 용팔과 영선 부부는 고래반점이라는 중국집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생인 동배와 고등학생인 동현을 둔 학부모이자, 건물주인 최대출의 비위에 맞춰가며 해마다 돌아오는 임대비 상승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세입자다. 부모를 잃은 남매 인혜와 인석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고, 용팔의 지인인 인하는 시각장애인으로 일하고 있던 학교를 그만둔 처지다. 용팔의 아들인 동현은 같은 반 친구인 서연을 짝사랑하고 있지만 학력과 가정형편의 차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멀찍이 바라만 볼 뿐이다. 반면 최대출의 딸인 서연은 도망간 엄마가 그러했듯 아빠인 최대출의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디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우리네 이웃 중에 흔히 볼 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정직한 재료로 음식 만들겠다고 약속했어.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아.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상 사람들은 내 속마음을 환히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어. 근사하게 속여도 근사하게 속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말이었던 것 같아.” / 35p
자연은 더 이상 종교가 될 수 없지만 자연 속엔 종교적 제의가 가득하다. 제비의 생존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오는 연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흙과 지푸라기를 물어 나를 때 이외에는 인간에게 오해 받기 싫어 땅에 잘 내려앉지 않는 제비의 강박적인 일상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흙과 지푸라기를 자신의 침으로 비벼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붙여나가는 제비의 집 짓는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겨울이 가고 삼월 삼짇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왔던 제비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이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그래서 자연을 제2의 성서라고 말했던 것일까? / 56p
“대학 입시가 없어지면 교실에서 진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건 경쟁지상주의가 아냐. 부당한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야 하고,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줘야 돼.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강한 자아를 가진 자존감 높은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의 방향을 대전환해야 돼. 학교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잖아.” / 64p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언뜻 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서사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 구성이 아니라 용팔과 그의 지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가장의 무게, 불공정한 현실, 불안과 불신으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그의 푸념과 자조에는 병들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통찰에는 “작은 돌멩이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어둠을 뚫고 날아간 작은 돌멩이가 그 거대한 벽에 부딪힐 때 나는 ‘탁’ 하는 소리는 어둠 저편에 우리가 넘어야 할 혹은 우리가 부수어야 할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엔 충분”하다던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서려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려는 이웃이 있는 한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견 없는 합일보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이 땅의 역동성을 더 신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본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서 “자족감이 주는 충만을 나는 사랑한다. 결핍이 주는 열망을 나는 더욱 사랑한다. 문제아를 만드는 문제어른들이 가득한 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어요. 머리 아플 정도로 사람도 많고 차도 많지만 가끔씩 서울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저는 분주한 서울의 모습이 좋아요. 가끔씩 서울 가면 이곳처럼 고요하지 않아 좋았어요. 인구 1,000만 명이 살고 있는 서울이 늘 고요하다면 죽은 도시 아닌가요? 공존할 수 있는 차이는 이견 없는 합일보다 역동적입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서울의 역동성을 저는 신뢰합니다. 대한민국이 더 좋은 나라로 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 149p
“나도 처음엔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했거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족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집안에 억압이 없다는 거잖아. 엄마나 아빠 목소리만 크게 들리면 그 집은 위험한 집이야. 그 집에 억압된 자아가 있다는 뜻이잖아. 피를 나눈 식구지만 여러 사람이 한집에 붙어 사는데 싸움이 없으면 비정상이지. 지나치지 않다면 소리 지르며 싸우는 가족이 건강한 가족이야. 시끌벅적한 집안에 상처받은 자아도 있지만 그 상처는 일방적인 상처가 아닐 테니 그 집안은 무너지지 않을 거야.” / 149p



소설의 말미에 서연이 아버지인 최대출의 폭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그녀에게, 최대출과 같은 권력자들로부터 폭력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위안과 희망을 줄까. 왠지 그라면 좀 더 따뜻하고 건강한 희망을 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