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에서 기다릴게 - 시간을 넘어, 서툴렀던 그때의 우리에게
가린(허윤정)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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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

모든 게 어설펐지만 풋풋해서 아름다웠던 그때 바로 그 시절!

 

 

  평범하지만 쾌활한 성격의 마코토가 어느 날 타임리프를 경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 타임리프를 이용해 친구를 구하기 위한 노력을 거듭하는 과정 속에서 바로 지금 현재,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내용이다. 일본 애니메이션 특유의 서정적인 감성과 풋풋했던 그때 그 시절, 청춘이라는 특유의 감각이 잘 녹아든 영화였던 걸로 기억난다. 가린의 에세이 『미래에서 기다릴게』는 바로 이 <시간을 달리는 소녀>를 모티프로 한 감성에세이다. 바람 한 점에도 설레었던 솜사탕 같은 마음들, 서로를 할퀴거나 맞추는 데 애쓰느라 놓쳐버린 사람들, 모든 게 어리석고 서투르기만 했던 청춘의 그 시간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부끄럽지만 찬란했고, 어설펐지만 그래서 더 아름다웠던 바로 그 시간으로.

 

 

 

함께 동네를 쏘다니고, 함께 학원을 빠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혼났다. 그 시절 나는 ‘함께’라는 단어의 의미를 친구들을 통해 배웠다. 다시 그때처럼 누군가와 ‘함께’ 존재할 수 있을까? / 하나의 모양이었던 우리 중에서 22p

 

 

 

  ‘어릴 적에는 친한 친구일수록 나와 같은 모양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책 속의 문장이 탁, 하고 마음을 잡아챈다. 청소년 시절의 우리는 그랬다. 반드시 같은 연예인을 좋아해야 했고, 같은 책을 읽고 공유했으며 같은 메이커의 옷을 나눠 입은 듯 닮은꼴처럼 하고 다녔다. 학원은 물론, 수업이 끝나고 매점에 갈 때도 항상 같이 다녔고 심지어 글씨마저도 비슷해졌다. ‘겹쳐두었을 때 어긋나는 부분 없이 완전히 맞아떨어지는’ 그런 사이. 그게 친구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습지만 그때만큼 ‘함께’하는 것이 좋았던 때는 없었던 것 같다. 나이가 들고 보니 생각보다 자주 그때가 많이 그립다. 작은 것에도 함께 깔깔대고, 같은 음악을 듣고 함께 설레어하며, 같은 머리에 같은 양말을 신고 다녀도 부끄럽지 않을 수 있었던 그 시절은 이제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사람을 만나는 건 점점 더 어렵고 조심스럽다.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 더 마음이 간다. 만났을 때 나를 감추지 않아도 되는, 만나도 집에 돌아와서 내가 실수하지는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아도 되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예민한 부분을 건드리지 않는 그런 사람들. / 애쓰지 않아도 되는 관계 50p

 

 

 

  얼마 전에 친구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이 사람과 결혼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고. 나는 이런 조건, 저런 조건, 좋은 사람은 많지만 결혼이란 건 그 무엇보다 애쓰지 않아도 되는, 내가 가장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사람과 해야 하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지금의 남편은 다행히 상대방의 감정을 가늠하느라 신경을 곤두세우지 않아도 되고, 잘 보이려고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될 만큼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지만, 예전의 나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를 맞추느라 관계 맺기에 쉽게 피로감을 느끼곤 했다. 그때의 나는 서투르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감과 그럴 듯해 보이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에 상당히 노력을 기울이는 사람이었기에. 그러다 남편을 만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서 애쓰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여전히 내 곁에 있다는 것을, 관계에 연연하며 나를 소모시키느라 놓쳐버린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제는 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나와 비슷한 결을 가진 사람들과 오랫동안 천천히 같은 보폭으로 걷는 것만큼 더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을 돌려 그때 그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면, 혼자만 모든 순간을 기억한다면 너무 외롭지 않을까. 무엇보다 그것이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순간이었음을 뒤늦게 알아차린다면… 그 어찌할 수 없음 위에 홀로 선 외로움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절실하게 타임리프 하고 싶을 때도 있지만, 삶은 되돌릴 수 없기에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잊고 싶다고 생각한 날들조차 가끔은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 타임리프 중에서 59p

 

 

지금 붙잡지 않으면 시간과 함께 흘러가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는 일들이 있다. 그런 일을 마주할 때면 아버지께서 내게 해주신 말씀을 떠올린다. 어떤 일을 할지 말지 고민이 될 때, 지금만 할 수 있는 일인지를 생각해보라고. 만일 그렇다면, 망설이지 말고 하라고. / 오직, 지금 중에서 139p

 

 

 



 

 

 

 

  시간을 달리는 마코토처럼 우리 모두는 저마다의 시간 속을 달리고 있는 중이다. 때로는 버거우리만치 느리게 흐를 때도 있고, 붙잡지 못할 만큼 빠르게 흘러가버릴 때도 있다. 다만 그 시간을 늘 마음에 포개어 살기를, 내 방향과 속도대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여전히 부끄럽고 어리석은 것투성이지만 그 조차도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미래에서 기다릴게』를 읽는 동안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된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련하게 남아있던 추억의 한 페이지와 그 순간에 함께 했던 사람들을 많이 생각했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내 곁에서 변함없이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그러니 잊지 말아야지. 모든 것이 모호한 미래에도 치아키에 대한 마음만은 확신할 수 있었던 마코토처럼.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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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역사 - 늑대인간부터 지킬 박사까지, 신화와 전설과 예술 속 기이한 존재들의 흔적을 따라서
존 B. 카추바 지음, 이혜경 옮김 / 미래의창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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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신의 역사는 곧 인류의 역사다!

잔혹하지만 매혹적인, 기괴하지만 아름다운 셰이프시프터에 담긴 의미들!

 

 

  셰이프 시프터(shape shifter). 주로 이야기 속에서 변신할 수 있는 사람 혹은 동물 등을 가리키는 말이다. 보름달이 뜰 때마다 늑대로 변신하는 늑대인간, 박쥐로 변신하는 뱀파이어, 심장박동수가 빨라지면 초록색 피부의 엄청난 체력을 가진 몸으로 변신하는 헐크 등이 전형적인 셰이프시프터 중 하나다. 신, 요정, 악령 등 모습을 바꾸는 이 놀라운 존재들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전 세계의 역사와 문화 곳곳에서 우리의 상상력을 사로잡아왔다. 오늘날 셰이프 시프터가 허구인지, 진실인지의 여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영화, 책, 그래픽 노블, 게임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오늘날 대중문화 곳곳에 등장하며 우리와 공존하고 있다. 매혹적이거나, 잔혹하거나, 비록 국가와 신화마다 성격과 모습은 다르지만 셰이프 시프터들의 이야기를 쫓다보면 놀랍도록 유기적이고 인류 보편적인 특성들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변신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 예술 속에서 발견되는 기이한 존재들의 흔적을 찾는 작업인 동시에 단순히 흥미를 넘어서 인간의 내적, 외적 욕망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인류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재미있는 건 두말 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그 신비로운 존재들은 어떻게 탄생되었나

 

 

 

“얘야, 내 안에서는 항상 싸움이 일어나고 있단다. 두 마리 늑대가 벌이는 처절한 싸움이지. 그중 하나는 사악해. 그놈은 분노, 질투, 비통, 원한, 후회로 똘똘 뭉쳐 있단다. 탐욕스럽고 오만하며 자기 연민에 빠져 자신밖에 모르는 놈이야. 다른 하나는 선해. 이놈은 즐거움, 평화, 사랑, 희망, 겸손, 친절 그 자체란다. 너그럽고 동정심이 많으며 진실하고 신의가 있지. 똑같은 싸움이 네 안에서도, 다른 모든 사람 안에서도 벌어지고 있단다.” / 157p

 

 

 

  북아메리카 남동부에 거주하는 원주민인인 체로키족 사이에 전해지는 작자 미상의 이야기다. 고대 원시시대부터 인간은 자신의 삶과 주변 동물들의 삶이 긴밀하게 얽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반인반수들이 새겨져 있는 선사시대의 동굴벽화를 통해 짐작해보건대 속도, 힘, 사냥 능력에 있어서 동물이 인간보다 훨씬 우월했기 때문에 인간에게 있어 동물과 같아지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냥꾼들이 동물, 그중에서도 자신이 사냥하는 동물 모습의 옷을 입고 그 동물의 움직임을 흉내 내며 사냥춤 의식을 가졌던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셰이프시프터에 대한 믿음이 단순히 동물과 동물적 본성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되었다면, 불미스러운 행동을 하지 못하게 억제하는 규칙에서 벗어나고 싶은 유혹, 동물적 본능을 받아들여 의식이나 도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욕망을 점차 이들에게 투영했던 것 같다. 위의 이야기에서 드러나듯 늑대인간은 인간 본성의 이중성, 다시 말해 동물적 본성이 우리를 장악할 때 생길 수 있는 문제를 가장 잘 보여주는 예다. 『변신의 역사』의 저자 존B. 카추바는 늑대인간이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인기를 누린다는 사실은 도덕과 사회규범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 한밤중에 벌거벗은 채 숲을 가로지르고 달을 보며 울부짖고 싶다는 우리 인간의 잠재적 욕망을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한다. 적어도 늑대인간이 민속 설화, 영화, 소설을 통해 대중적 인기를 얻는다는 것은 우리가 억눌리고 금지된 우리의 동물적 본성에 끌린다는 증거라는 것이다.

 

 

 

셰이프시프터의 매력은 ‘제멋대로’ 행동하고 싶다거나 성별을 바꾸고 싶다는 바람을 충족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우리는 정체성을 찾기 위해, 사회에서 우리에게 적절한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아내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셰이프시프터는 이러한 노력의 상징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많은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 우리는 개인의 다양한 역할이 사회규범과 충동할 때, 혹은 여러 역할 중에서 특정 시점에 적합한 역할을 선택해야 할 때, 혹은 어떤 역할들을 수정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때 혼란스러워진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내적 셰이프시프터다. 결국 대중문화 속 셰이프시프터는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혼란스러워하고 고군분투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한 존재인 셈이다. / 17p

 

 

 



 

 

 

 

  시대가 흐르면서 셰이프시프터는 다양한 방식으로 변형된다.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삶과 죽음의 깊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나 우리가 존재하는 목적과 같은 기본적인 질문에 답할 수 없었던 과거에는 신이라는 존재의 능력을 통해 이해를 구해야만 했을 것이다. 혹은 징계와 처벌의 목적을 위해 셰이프시프터를 이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이를 테면 동화나 설화에 잘못을 저지른 대가로 동물이나 물건으로 모습이 바뀌는 벌을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이 그 이유다. 반면, 불행하게도 타의에 변신이 된 셰이프시프터들을 통해서는 사람의 겉모습이 아닌 내면을 봐야 한다는 교훈을 전하기도 했다. 이는 외적·성적으로 매력적인 사람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인간의 비뚤어진 욕망을 상징한다. 그러고 보면 아이들에게 물가와 같이 위험한 장소에 가면 안 된다는 경고를 하기 위해, 젊은 여성들에게는 낯선 남성을 주의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주기 위해 기괴하고 잔혹한 셰이프시프터들을 등장시키는 것만큼 훌륭한 효과가 또 어디 있을까.

 

 

 

사회에서 소외되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혹은 편견이나 증오, 차별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 그도 아니면 그저 좀 더 부유해지고, 똑똑해지고, 예뻐 보이기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변신은 비록 상상 속에서긴 하지만 자신의 딜레마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 변신은 세상 누구나 품을 만한 보편적인 판타지다. 모습을 바꾸고 싶다는 이 타고난 잠재의식적 욕망이 너무 크다 보니 평범한 인간의 모습을 한 셰이프시프터가 우리 사회 속에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믿음이 ‘원시적’이고 ‘무지한’ 문화에서만 발견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는 사회·경제적인 지식 수준과 무관하게 전 세계 거의 모든 문화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 85p

 

 

셰이프시프터가 직면하는 난관은 변신 전 평범한 상태였을 때 직면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 이 난관과 갈등은 변신한 주인공의 용기와 지혜, 힘을 시험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면한 문제의 본질을 이해해야 하고, 나아가 달라진 자아의 본성 또한 이해해야 한다. 문제 해결 방법을 찾는 것은 그다음의 일이다. 즉, 어려움을 극복하고 평범했던 자아로 되돌아가기를 바란다면 심사숙고하고 창의력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독자는 주인공이 그의 딜레마를 해결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그러면서 주인공이 직면한 딜레마가 자신이 현실에서 마주하고 있는 문제와 동일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따라서 주인공이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고민과 창조의 과정은 독자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무의식적으로라도)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 271p

 

 

 

  저자는 우리 모두의 내면에는 셰이프시프터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 안의 셰이프시프터는 다른 사람이나 동물로 물리적 변신을 할 수는 없지만 강력한 이미지, 강렬한 인격의 형태로 무의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정신의학자 칼 구스타프 융 역시 우리의 정신 기저에 자리 잡은 잠재의식 속에 우리가 성격이라 부르는 특성들이 외부로 발현되기 전 원형의 모습 그대로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셰이프시프터는 이러한 원형들이 모여 ‘집단 무의식’을 형성하고, 모든 개인이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되 무의식적 수준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상징들의 집합체라고 바라보는 저자의 의견은 타당해 보인다. 이것이 오늘날 핼러윈, 코스프레를 단순히 유희의 목적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변신 설화가 전 세계 곳곳에서 만들어지는 이유는 전파에 따른 문화적 전유 때문이기도 하지만, 셰이프시프터라는 요소 속에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보편적인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 142p

 

 

스스로 잘못된 육체로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가끔씩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혹은 무언가)가 되고 싶다는 은밀한 열망을 품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일시적으로라도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있기 마련이다. 그런 바람은 열등감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누군가가 되기만 하면 그 열등성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 239p

 

 

 



 

 

 

 

  얼마 전, 아이와 『머리 아홉 달린 괴물』이라는 전래동화를 읽었다. 그때는 『변신의 역사』를 읽기 전이라 그저 ‘위기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으면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도 해낼 수 있다’ 정도의 교훈만 생각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머리가 아홉이나 되는 괴물의 상징성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변신’이라는 상징이 얼마나 우리 생활 곳곳에 반영되어 있었는지를 깨닫게 된 것은 물론, 그것을 통해 드러나는 인간의 욕망이란 무엇인지 함께 가늠해 수 있어 매우 뜻깊은 독서였다. 사실 단순히 재미 위주의 접근으로 읽기 시작한 책이었지만 인류사적으로, 문학사적으로, 문화사적으로 뜻밖의 큰 배움을 얻었다. 관심 있는 분들이라면 꼭 읽어보시라 추천 드리고 싶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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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 - 슬기로운 방구석 와인 생활
임승수 지음 / 수오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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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당장 와인 사러 가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와인 초심자에게는 훌륭한 입문서이자 와인 애호가에게는 꿀팁이 되어줄 와인 실용서!

 

 

 

  내 생애 첫 와인을 마신 게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보다 피식 하고 웃음부터 새어나왔다. 대학교 3학년 때 즈음이었던 것 같다. 호감이 가는 오빠가 있어 친구들과 작당모의를 한 끝에 그 오빠가 일하는 카페에 간 적이 있다. 카페라고 해서 커피와 디저트류를 판매하는 곳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곳은 와인바에 가까울 정도로 상당한 양의 와인을 보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무슨 허세인지 이왕이면 자주 마시는 커피 대신 와인 한 병을 마셔보자 하고 마시기에 적당한 와인 한 병을 추천받았다. 지금은 그때 마신 와인이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소주와 맥주만 마시던 대학생들에게 가히 충격적인 맛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적당한 타닌에 밸런스는 물론 목넘김도 좋아서 우리 다음 달에 각자 아르바이트비를 벌어서 또 와보자 하고 함께 다짐까지 했었다. 그야말로 님도 보고 뽕도 따고 랄까.

 

 

 

  그렇게 와인에 대한 첫 인연이 쭉 이어졌다면 좋았겠지만, 오빠가 카페 일을 그만두면서 와인 마시기를 향한 야심찬 계획도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이후 다시 와인을 찾게 된 것은 아르바이트를 함께 하던 언니 둘과 종종 일이 끝나면 방구석에 모여 앉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분은 내고 싶은데 술은 잘 마시지 못하는 언니들이라 선택하게 된 게 화이트 와인이었다. 치즈나 과일, 과자 같은 간식과 잘 어울리는 데다 달콤하고 시원한 맛이 한 여름의 수다와 이보다 잘 어우러질 수가 없었다. 그때 주로 마셨던 칠레산 아이스 와인 맛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사실 내게 있어 와인은 여전히 손쉽게 마실 수 있는 주류는 아니다. 지금이야 검색만 하면 각종 블로그나 와인 소비자들의 리뷰를 통해 맛을 미리 가늠해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았던 때에는 어떤 게 내 입맛에 맞을지 알 수 없었던 까닭이다. 주머니 사정이 빈곤한 사람에겐 선택이 조심스럽게 마련이다. 그나마 특별한 날에 야심차게 선택해 구입하면 코르크 마개가 부러져 가루가 병 속으로 들어가기도 하고, 그날 먹는 음식과 조화가 이루어지지 않아 씁쓸함만 남기는 경우도 있다. 그렇게 실망스러운 일이 몇 번 반복되다보니 2년 전을 끝으로 와인을 더 이상 마시지 않게 되었는데,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을 읽고 나니 다시 와인에 대한 좋은 이미지가 깨어나 머리와 입 속을 살살 맴도는 느낌이다. “당장 와인을 사게 만드는 글”이라는 호평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이 책을 읽는 동안 몇 번이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와인서쳐 앱을 깔고 책에서 나오는 와인을 검색하며 무슨 와인을 살까 고민하고, 당장 마트로 달려가서 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기를 반복했던 게 대체 몇 번이나 되는지. 혹시나 뒷 페이지에서 더 사고 싶은 와인을 소개해줄지도 몰라, 조금만 더 참고 읽어보자 하고 마음을 다독인 게 한 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슬기로운 와인 생활을 위한 와인에 대한 모든 것

 

 

 

  이 책은 자칭 와인교에 귀의한 한 사내의 좌충우돌 신앙생활을 솔직담백하게 담고 있다. 자칫 와인에 흠뻑 빠지면 가상탕진은 식은 죽 먹기라던데, 첫 만남의 신비로운 체험으로 인해 아내의 등짝 스매싱과 경제적 압박이라는 고진 박해를 견디면서도 꿋꿋이 와인 생활을 즐겨온 작가는 어떻게 하면 많은 이들이 실수를 줄이고 슬기롭게 와인을 즐길 수 있을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한다. 이를 테면 와인 라벨 읽는 법, 와인 잔 선택하는 법, 와인을 더 맛있게 마시는 법, 와인에 맞는 안주 고르는 법 등 초보 와인 구매자들을 위한 기본 정보에서부터 와인 정가에 속지 않는 법, 직구로 와인 사는 법, 와인 평론가 점수 참고법 등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팁들도 함께 소개한다.

 

 

 

쭈뼛대는 내 모습을 포착하고는 와인 수입사에서 파견 나온 직원이 접근했다. 참고로 마트의 와인 매장에서 일하는 분들은 대체로 와인 수입사 소속이다. 결국 직원의 친절한 응대로 할인가 5만 원의 그 와인을 구입했는데, 내가 와인 초짜임을 파악한 직원은 신신당부했다.

“와인을 드시기 30분 전에 냉장고에 넣으세요. 와인은 온도에 따라 맛과 향이 달라지거든요. 그리고 꺼내서 바로 드시지 말고 코르크를 연 후 최소 30분 정도 기다렸다가 천천히 드세요. 와인은 공기와 접촉하면서 맛이 점차 부드러워지거든요.” / 19p

 

 

와인이 공기와 접촉해 변화는 과정을 브리딩이라고 한다. 와인이 공기와 만나 숨을 쉰다는 의미인데, 에어레이션이라고도 한다. 브리딩을 하면 와인이 마시기 좋게 부드러워진다고 해서 마냥 방치하면 지나치게 산화가 진행되어 오히려 풍미가 꺾이고 심지어 식초가 되기도 한다. / 30p

 

 

 




 

 

 

 

  와인 애호가들을 위한 궁극의 아이템으로 추천하는 ‘와인서쳐’ 앱은 이 책에서 알게 된 매우 유용한 정보 중 하나다. 와인서쳐 앱을 다운로드 받아 여기에 라벨 사진 혹은 와인 이름을 입력을 입력하면 해당 와인의 해외매장 판매가격 및 평균 거래가격이 나온다. 예를 들어 와인서쳐에서 테루뇨 카베르네 소비뇽을 검색하면 해외 평균 거래가(세금 제외)가 4만 2,086원(2020년 12월 6일 기준)인데, 국내 마트 판매가가 5만 원(세금 포함)이면 상당히 준수한 가격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나 역시 찾고 싶은 와인 제품명이 있어 검색해보니 다양한 제품들을 두루 볼 수 있는 데다 가격 비교까지 한꺼번에 할 수 있어 내가 구매하려는 와인의 가격이 합당한 수준인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책에서는 안주 정보를 참고하는 데 ‘비비노’ 앱도 추천한다. 해당 앱에서 베린저 프라이빗 리저브 샤르도네를 검색하면 돼지고기, 기름진 생선, 채식 신단, 가금류를 안주로 추천하는데, 베린저 샤르도네의 풍미를 떠올렸을 때 꽤 설득력 있는 안주 목록이라고 하니 참고할 만하다. 와인서쳐와 비교하면 가격 정보 신뢰도는 떨어지지만 사용자들이 매긴 와인 평점 평균치를 비교할 수 있는 점도 나름 유용할 듯하다.

 

 

 

와인을 고를 때, 나는 와인 산지부터 정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나타 밸리, 프랑스 보르도의 마고, 프랑스 부르고뉴의 본 로마네, 이탈리아의 피에몬테, 이런 식으로 포도 재배지를 특정하면 선택의 폭을 좁힐 수 있다. 와인을 산지별로 경험하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찾는 데에도 수월하다. 예컨대 나는 샤토 보날그 2008 빈티지를 경험하고 한동안 포므롤 와인을 찾아 마셨다. 특유의 덕후 기질 때문이기도 한데, 은행 잔고가 급격하게 감소했지만 어쨌든 와인 경험치 상승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 62p

 

 

그런 이유로, 와인을 진지한 취미로 여기는 사람은 불가피하게 와인셀러를 구비한다. 다만 와인을 구매해서 며칠 사이에 바로바로 마시는 경우라면 굳이 와인셀러에 보관할 필요는 없다. 서늘한 곳이나 (여름에는) 냉장고에 보관하면 된다. / 86p

 

 

보르도 잔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시라같이 바디감 묵직한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뚱뚱한 부르고뉴 잔은 피노 누아처럼 섬세한 향의 레드 와인에 적합하다. 화이트 와인 잔은 레드 와인잔에 비해 크기가 작다. 화이트 와인은 대체로 차갑게 마시므로, 공기 접촉면을 줄여 온도 상승을 늦추기 위함이다. 디저트 와인 잔은 화이트 와인 잔보다 더 작다. 당도와 알코올 도수가 높은 디저트 와인을 마시기에 적합한 형태로 제작한 것이다. 위스키나 소주잔을 봐라. 작지 않은가. / 116p

 

 

 

  이 외에도 책에서는 코르크 옆면으로 끓은 흔적이 보이는 열화 와인과 같이 와인 보관 상태가 양호하지 않은 와인을 구매했을 때 와인을 교환하거나 환불하는 방법을 소개해주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작황이 안 좋을 때 만든 와인에 대한 선입견, 프랑스 와인이면 다 좋다는 편견과 오해들도 살펴본다. 비싼 와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도 아니고 저렴하다고 해서 다 맛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자신의 경험을 통해 불식시켜주기도 한다. 더불어 이 책의 가장 꿀팁이라 할 수 있는 연말연시 가성비 최강 와인 리스트, 2만 원대 최강 와인 리스트, 숙성 와인의 진가를 느낄 수 있는 와인 리스트, 우울할 때 마시기 좋은 와인 리스트, 3만 원대 가성비 와인 리스트, 가을에 어울리는 와인 리스트, 비 오는 날 추천 가성비 와인 리스트 등 무궁무진한 와인의 세계 속에서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까지 소개해주니 이대로 옮겨 적고 우리는 얼른 와인 매장으로 달려가기만 하면 된다.

 

 

 

코르크를 보니 열화 와인일 가능성이 있었다. 열화 와인이 뭐냐고? 와인 보관 상태가 양호하다면, 일반적으로 코르크와 와인이 닿는 둥근 면만 빨갛게 착색된다. 하지만 열화 와인 코르크는 와인이 옆면으로 치고 올라온 흔적이 선명하다. 그 흔적의 형태가 마치 와인이 끓어오른 것 같다고 해서 ‘끓은’ 와인이라 부르기도 한다. 와인은 열에 민감해서 섭씨 30도 혹은 그 이상의 온도에 장시간 노출되면 변질되는데, 그 과정에서 코르크 옆면으로 끓은 흔적을 남긴다. 정도가 심하면 와인이 병 밖으로 새어 나와 알루미늄 포일에 묻고, 그 탓에 포일이 병에 달라붙기도 한다. / 122p

 

 

2017년에 2007 빈티지를 지인에게 선물로 받아 마셨다. 보르도 2007년은 작황이 매우 좋지 않은 해라 별 기대감 없이 마셨는데, 맛과 향이 상당히 맘에 들어 깜짝 놀랐다. 작황이 안 좋을 때 만든 와인은 타닌이 부족해 여타 빈티지보다 더 빨리 숙성된다. 그러다 보니 10년 만에 충분히 숙성이 진행되어 마시기 좋았던 것이다. 고급 와인은 작황이 안 좋은 빈티지라고 무시할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 131p

 

 

맞다. 스월링 얘기다. 와인을 잔에 따랐으면 돌려라. 허리케인을 일으키듯 빙빙 돌려라. 그러면 와인이 산소와 활발하게 접촉해 향기를 한껏 뿜어내고 맛도 부드러워지기 때문이다. (…) 과도한 스월링은 와인의 산화를 촉진해 풍미가 급격하게 꺾일 수 있다는 의견도 있는데, 나는 여태껏 그렇게 돌려댔는데도 풍미가 급격하게 꺾인 기억이 없다. 그러니 웬만하면 그냥 돌려라. / 162p

 

 

 



 

 

 

 

  이렇듯 『와인에 몹시 진심입니다만,』은 와인 에세이답게 와인 한 병에 담긴 진솔한 경험을 담아냄과 동시에 와인에 관한 각종 정보들을 담은 실용서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한 책이다. 더불어 작가의 유쾌한 입담과 ‘내돈내산’에 입각한 솔직한 평들은 책을 읽는 재미와 더불어 와인을 선택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뭐니 뭐니 해도 이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와인을 사러 가지 않을 수 없다. 나 역시 당장 이번 주말에 남편과 어떤 와인을 마실지 즐거운 고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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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1
이철환 지음 / 특별한서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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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무늬를 냉철하면서도 따스한 언어로 담아내는 작가!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오래전 하마를 길들인 사람들이 있었다. 하마는 성질이 사나워 길들이기 어려웠다. 하마를 길들이려면 채찍으로 하마의 몸에 선명한 기억을 남겨야 한다. 가장 좋은 채찍 재료는 하마 가죽이었다.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맞으며 하마는 얼마나 난감했을까?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꼴이 되었다. 하마가 의도한 것은 아니다. 하마는 자신을 지키려고 강인한 가죽을 만들었는데 그 강인한 가죽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굴복시킨 것이다.

대한민국엔 수많은 하마가 살고 있다. / 127p

 

 

 

  대한민국이 소란스럽다. 오늘은 또 어떤 뉴스가 나를 위협할지 두려울 지경이다. 하마를 길들이기 위해 하마 가죽으로 만든 채찍을 휘두르던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우리가 휘두른 채찍에 우리가 옭아매어지고 상처를 입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다. 심각해지고 있는 소득격차, 대학 서열화와 입시 경쟁, 양극화된 정치와 신념, 저출산에 따른 인구 절벽의 현실화, 여기에 1년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코로나19 바이러스 대유행까지. 이따금 뉴스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나의 영역 밖에서 벌어지는 뜻밖의 사건일 뿐이라고 여길 수 있었던 때에는 그래도 희망이란 것이 있었는데, 치솟는 부동산세에 내 집 마련이 점점 힘들어지는 청춘의 미래와 애초에 출발선부터 달랐던 부의 경쟁 속에서 이미 멀찌감치 밀쳐져있는 현실을 실감할 때면 이렇게 내내 아등바등하며 사는 게 다 무엇인가 이내 절망스러워지곤 한다. 그러나 이 캄캄한 현실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면,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듯 불신과 폭력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면 나의 서사는, 우리의 서사는 좀 더 단단해지겠지. 소설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에서 작가 이철환 역시 이렇게 말한다. “어둠은 어둠이 아니었다. 어둠이 감추고 있는 빛의 실체가 있었다. 카를 구스타프 융은 그것을 ‘어둠의 빛’이라 명명했다. 캄캄한 시간을 통해서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었다. 오직 어둠을 통해서만 인도되는 빛이었다. 어둠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대한민국의 무늬를 언어로 담아내다

 

 

 

  소설 『연탄길』로 익히 잘 알려진 이철환 작가의 신작이다. 평범한 이웃들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내며 그 속에서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를 건네었던 작가의 전작이 그러하듯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 역시 대한민국의 현실과 소시민들의 애환을 향한 따뜻한 시선이 잘 녹아있다. 그도 그럴 것이 소설 속에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을 법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어릴 적 부모를 잃고 보육원에서 만난 용팔과 영선 부부는 고래반점이라는 중국집을 30년째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초등학생인 동배와 고등학생인 동현을 둔 학부모이자, 건물주인 최대출의 비위에 맞춰가며 해마다 돌아오는 임대비 상승에 전전긍긍해야 하는 세입자다. 부모를 잃은 남매 인혜와 인석은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아이들이고, 용팔의 지인인 인하는 시각장애인으로 일하고 있던 학교를 그만둔 처지다. 용팔의 아들인 동현은 같은 반 친구인 서연을 짝사랑하고 있지만 학력과 가정형편의 차이라는 벽을 넘지 못하고 멀찍이 바라만 볼 뿐이다. 반면 최대출의 딸인 서연은 도망간 엄마가 그러했듯 아빠인 최대출의 육체적, 언어적, 정신적 폭력에 시달리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이렇듯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어디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우리네 이웃 중에 흔히 볼 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당신이 정직한 재료로 음식 만들겠다고 약속했어. 내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당신이 이런 말도 했던 것 같아.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항상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누군가 비밀의 문을 통해 나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상 사람들은 내 속마음을 환히 다 알고 있다는 뜻이었어. 근사하게 속여도 근사하게 속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는 말이었던 것 같아.” / 35p

 

 

자연은 더 이상 종교가 될 수 없지만 자연 속엔 종교적 제의가 가득하다. 제비의 생존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오는 연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집을 짓기 위해 흙과 지푸라기를 물어 나를 때 이외에는 인간에게 오해 받기 싫어 땅에 잘 내려앉지 않는 제비의 강박적인 일상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고, 흙과 지푸라기를 자신의 침으로 비벼 한 조각 한 조각 정성껏 붙여나가는 제비의 집 짓는 방식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겨울이 가고 삼월 삼짇날이면 어김없이 돌아왔던 제비가 더 이상 오지 않는 이유 속에도 자연의 말씀은 있다. 그래서 자연을 제2의 성서라고 말했던 것일까? / 56p

 

 

“대학 입시가 없어지면 교실에서 진짜 교육이 이루어질 수 있어. 학생들에게 가르쳐야 할 건 경쟁지상주의가 아냐. 부당한 억압을 비판할 수 있는 힘을 가르쳐야 하고, 약자를 배려할 수 있는 감수성을 길러줘야 돼. 무엇보다도 대한민국의 학교는 학생 한 명 한 명이 강한 자아를 가진 자존감 높은 아이가 될 수 있도록 교육의 방향을 대전환해야 돼. 학교는 그런 사람들을 길러내는 곳이잖아.” / 64p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언뜻 소설이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것이 서사와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한 구성이 아니라 용팔과 그의 지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을 살아가고 있는 가장의 무게, 불공정한 현실, 불안과 불신으로 얼룩진 사회에 대한 그의 푸념과 자조에는 병들어가고 있는 대한민국을 향한 날카로운 통찰이 녹아들어 있다. 그러나 그의 통찰에는 “작은 돌멩이는 눈앞에 있는 거대한 벽을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어둠을 뚫고 날아간 작은 돌멩이가 그 거대한 벽에 부딪힐 때 나는 ‘탁’ 하는 소리는 어둠 저편에 우리가 넘어야 할 혹은 우리가 부수어야 할 거대한 벽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엔 충분”하다던 신영복 교수의 말처럼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이 서려 있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고 서로의 상처를 보듬고 이해하려는 이웃이 있는 한 우리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이견 없는 합일보다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이 땅의 역동성을 더 신뢰함으로써 미래에 대한 희망을 엿본다. 그래서일까, 소설 속에서 “자족감이 주는 충만을 나는 사랑한다. 결핍이 주는 열망을 나는 더욱 사랑한다. 문제아를 만드는 문제어른들이 가득한 나라, 대한민국. 그러나 어둠 속에서도 바다는 푸르다.”는 문장이 유독 마음에 남는다.

 

 

 

“서울에서 몇 년 동안 살았던 적이 있어요. 머리 아플 정도로 사람도 많고 차도 많지만 가끔씩 서울이 그리울 때가 있어요. 저는 분주한 서울의 모습이 좋아요. 가끔씩 서울 가면 이곳처럼 고요하지 않아 좋았어요. 인구 1,000만 명이 살고 있는 서울이 늘 고요하다면 죽은 도시 아닌가요? 공존할 수 있는 차이는 이견 없는 합일보다 역동적입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는 서울의 역동성을 저는 신뢰합니다. 대한민국이 더 좋은 나라로 가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 149p

 

 

“나도 처음엔 콩가루 집안이라고 생각했거든.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 반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가족이 저마다 자기 목소리를 내며 싸울 수 있다는 것은 그 집안에 억압이 없다는 거잖아. 엄마나 아빠 목소리만 크게 들리면 그 집은 위험한 집이야. 그 집에 억압된 자아가 있다는 뜻이잖아. 피를 나눈 식구지만 여러 사람이 한집에 붙어 사는데 싸움이 없으면 비정상이지. 지나치지 않다면 소리 지르며 싸우는 가족이 건강한 가족이야. 시끌벅적한 집안에 상처받은 자아도 있지만 그 상처는 일방적인 상처가 아닐 테니 그 집안은 무너지지 않을 거야.” / 149p

 

 




 

 

 

 

 

  소설의 말미에 서연이 아버지인 최대출의 폭력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쁜 마음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 작가는 그녀에게, 최대출과 같은 권력자들로부터 폭력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어떤 위안과 희망을 줄까. 왠지 그라면 좀 더 따뜻하고 건강한 희망을 주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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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알래스카
안나 볼츠 지음, 나현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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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이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소설!

‘다름’을 인정하고 함께 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따뜻한 이야기!

 

 

 

나에게는 도우미견이 있고, 우리 집은 이층집인데 내 방은 일 층에 있고, SOS 호출 밴드가 손목에 걸려 있고, 약통을 들고, 헬멧을 쓰고 있다.

나는 스벤이다. 취미는 뇌전증이다. / 170p

 

 

 

  나는 두렵지 않다. 전혀 두렵지 않다. 스벤은 차가운 콘크리트 계단 앞에 우뚝 선채 주문을 외우듯 속으로 되뇐다. 친구들은 전부 중학교 1학년이 되지만 자신은 다시 초등학교 6학년 교실 구석에 처박혀야 한다는 현실에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뇌전증을 앓고 있는 아이, 구급차에서도 뇌전증 센터에서도 교실에서도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키며 자주 기절하는 아픈 아이. 카메라, 경보기, 도우미견까지 온갖 안전장치의 감시와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지긋지긋한 시선들, 때문에 이사를 하고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교실로 가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언제고 발작을 일으키는 날이면 반 아이들은 몸속에 귀신이 들기라도 한 듯 끔찍하게 바라보거나 장애인 취급을 하며 불쌍한 아이라고 여길 테니까. 그나마 학교가 뒤집힐 만한 어마어마한 짓을 벌이거나 못된 행동을 하는 것으로 두렵지 않은 척 해보는 수밖에.

 

 

 

작년에 같은 반이었던 애들은 모두 다른 학교로 갔다. 이 교실에는 나를 아는 애도 하나도 없고, 지난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는 애도 없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 거야. 신호등이 늘 초록 불일 수만은 없어. 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라고 나 자신에게 말한다. / 13p

 

 

 

  부모님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총기를 든 강도들이 습격한 사건을 계기로 세상을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 파커. 새 학년 새 교실에서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해보려고 하지만 첫 날부터 계획이 삐끗거린다. 서로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자는 선생님의 말씀에 개의 울음소리로 징글벨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가 아이들의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스벤, 저 못된 녀석이 유독 신경을 거슬리게 한다. 이럴 때 알래스카라도 곁에 있다면 좋았을 텐데. 동생의 개털 알레르기 때문이 아니었다면 알래스카와 이별할 일은 없었을 텐데. 지난 넉 달간 알래스카를 찾으려고 온 사방을 들쑤시고 다녔지만 대체 누구에게 갔는지 알 수 없다. 그렇게 그리운 마음만 더욱 커져가는 가운데, 마치 기적처럼 학교 운동장에서 알래스카를 발견한다. 너무나 끔찍하게도, 하필 알래스카의 주인이 스벤이라는 사실이 문제라면 문제지만.

 

 

 



 

 

 

 

  소설 『안녕, 알래스카』는 뇌전증 앓고 있는 소년 스벤과 불의의 사고를 겪은 소녀 파커가 각자가 지닌 상처 때문에 세상을 향한 벽을 세우고 원망하는 마음을 키우고 있는 가운데, 한때는 파커의 반려견이었던 알래스카가 스벤의 도우미견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데리고 오기 위한 계획을 세우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러는 가운데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이들은 누구에게도 쉽게 말하지 못했던 상처를 상대방에게 터놓기 시작함으로써 함께 아픔을 나누고 위기를 극복함으로써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는다. 네덜란드의 권위 있는 문학상인 황금연필상과 은손가락상, 독일 청소년문학상 등 유럽 내 주요 문학상을 수차례 수상한 작가의 작품답게 소설은 반려견과 소년 소녀의 우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담아냄과 동시에 십대 청소년들이 성장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내적, 사회적 고민들을 촘촘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반복적인 발작을 특징으로 하는 만성적인 뇌 장애를 가리키는 ‘뇌전증’을 소재로 하여 흔히 갖게 되는 장애에 관한 편견과 시선, 그로인해 뇌전증 환자들이 겪게 되는 소외와 상처를 들여다보게 한다. 비록 그들이 처한 현실과 환경은 다를 수 있지만 함께 함으로써 용기를 얻고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은 깊은 울림을 준다.

 

 

 

도우미견을 못 본 체하고 지나가는 건 아주 쉬운 일이다.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람들이 교통정리를 하는 경찰의 볼을 꼬집고 지나가지는 않잖아? 또 비행기 조종 중인 조종사의 겨드랑이를 간지럼 태우지 않잖아? 알래스카도 경찰이나 비행기 조종사와 다를 게 없다. 알래스카가 덮개를 두르고 있으면, 도우미견으로서 일하는 중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멍청한 구경꾼들의 무례한 손놀림을 기다리느라 가만히 있는 게 결코 아니란 말이다. / 112p

 

 

“너는 네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겠지만, 아니야. 누구나 가끔은 화성을 왔다 갔다 하거든. 네가 그랬잖아. 다들 두려움을 갖고 있다고. 흠, 정신 나간 것도 마찬가지야. 사람은 다들 조금씩 정신이 나가 있어. 나도 내가 어떻게 숨 쉬는지 온종일 설명해야 하지. 그렇게 죽어라 설명하는데도 사람들은 나를 이해하지 못해.” / 167p

 

 

 




 

 

 

 

  소설 속에는 스벤이 발작을 일으키는 모습을 아이들이 휴대폰으로 촬영하고 아무런 죄의식 없이 여러 사람에게 공유하는 바람에 스벤이 학교를 그만두는 장면이 나온다. 파커 역시 개의 울음소리로 징글벨을 부를 수 있다고 말했다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하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보면 자칫 친구들로부터 소외를 당하지는 않을까 두려워질 때가 있다. 누군가는 너무 튄다는 이유로, 반대로 누군가는 너무 소극적이라는 이유로도 따돌림을 당할 수가 있다. 나 역시 겪어본 일이기에. 더욱이 휴대폰이라는 그럴 듯한 도구가 한 사람을 따돌리고 괴롭히는 일이 너무나도 쉬워진 요즘일수록 아이가 어떻게 현명하게 대처해나갈 수 있을지, 부모인 나는 어떻게 도와줄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 때 어쩌면 이 책이 위로와 용기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이가 조금 더 크면 이 책을 꼭 함께 읽어보자고 권해봐야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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