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 국가에서
V. S. 나이폴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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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식과 세계 속에서 끊임없는 떠도는 유랑자들이다!

식민 시대가 개인과 사회에 미친 현실을 냉철하고 가감 없이 보여준 작품!

 

 

 

 

  2020년 도쿄올림픽 개막식에서 국제 올림픽 위원회의 오륜기를 들고 입장하는 선수들이 있어 이목을 집중시켰다. 201510, UN 총회에서 IOC의 토마스 바흐 위원장에 의해 설립된 난민 선수단이었다. 앞서 리우 올림픽에서는 10명이었던 선수단이 이제는 29명으로 늘어나 이번 도쿄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들에게 있어 올림픽은 국위 선양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꿈에 도전하고 전 세계 8000만 명의 난민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전하기 위한 무대였다. 메달의 색을 떠나 스포츠로 하여금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이들의 도전에 감동하게 된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내 올림픽에 출전한 난민 선수가 코로나19 백신 접종 과정에서 차별 받았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어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람들 사이에 섞이지 못하고, 남자와 여자가 아닌 다른 존재로 느껴진다고 고백하며, IOC마저 우리를 다른 '정상적인' 운동선수들처럼 대하지 않는다고 하여 씁쓸함을 남겼다. 그렇게 스포츠를 통해 전 세계의 화합을 도모하고자 하는 올림픽 정신 속에서도 배제는 존재했다.

 

 

 

  인종, 종교, 사상, 정치, 자연재해 등의 이유로부터 고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러나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고 심지어 정상에서 벗어난 사람들로 분류되고 마는 현실들.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디에 속하는가?’란 질문 앞에서 끊임없이 무기력함을 느껴야 하는 이들의 삶에 언제쯤이면 진정한 자유가 깃들 수 있을까. 문득 자유 국가에서말미에 수록된 에필로그 룩소르의 서커스단속 한 문단이 마음을 붙든다. ‘유일하게 순수했던 시대는 태초뿐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가 사는 땅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 고대 예술가들이 자신이 머문 땅이야말로 완벽하다고 여기던 때가 그 시대일 것이다. () 어쩌면 나일강은 단순히 물에 지나지 않는데도 청록색 물결무늬로 일렁인다니, 그것은 그저 지어낸 환상일지도 모른다. 이 나라의 경관도 아득히 먼 태곳적에 만들어진 데 대한 동경과, 무덤을 장식하기 위한 하나의 허상 같은 것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순수했던 시대, 이른바 우리가 꿈꾸는 진정한 자유란 과연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각자의 의식과 세계 속에서 끊임없는 떠도는 유랑자들이다. 인도, 영국, 아프리카, 미국, 이집트…… 모든 곳에 있지만 어디에서 속하지 못하는 방랑자들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 자유 국가에서속의 인물들이 제3세계 혹은 어느 낯선 타인으로 읽히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나는 누구이고 또 어디에 속하는가

 

 

 

  다수의 문학상을 비롯하여 부커 상 그리고 노벨 문학상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이력을 보면 일단 어마어마한 수상 내역에 놀라게 되지만 그에 비해 이름은 상당히 낯설다. ‘출신지인 트리니다드 토바고를 비롯한 제3세계 문제를 밀도 있게 다뤄 서구문단에서는 1급 작가로 인정받는다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크게 주목 받은 적이 없는 듯하다. 처음 표지를 접했을 때 일종의 정치적 성격을 띤 르포르타주인줄로 짐작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부커 상을 수상한 중편작 자유 국가에서를 비롯해 네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책 속에는 자유를 찾아 떠난 이민자와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떠도는 유랑자들이 등장한다. 피레우스의 방랑자는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난민들, 끊임없이 주위를 경계하는 덩치 큰 미국 학생들, 영국인 방랑자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가 아테네 피레우스에서 카이로의 알렉산드리아로 가는 소형 증기선에 몸을 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처음부터 영국인 방랑자는 나의 시선을 끈다. 그는 노련한 여행자 같기도 하고, 어깨에 둘러멘 배낭에는 시집이나 일기장 혹은 막 쓰기 시작한 소설 원고가 들어 있을 것 같은 낭만적인 구석도 있으며, 자기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청년에게 다가가 다양한 여행 경험을 늘어놓을 만큼 허세도 부릴 줄 안다. 하지만 이내 영국인 방랑자는 유색인들의 적대적인 시선과 폭행에 떠밀려 누구와도 소통하지 않고 선실 안을 외로이 떠돈다. 이윽고 도착지를 바라보는 그의 불안한 눈빛에서 이곳에서도 쉽게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마는 그의 미래를 언뜻 본 것 같아 씁쓸함을 남긴다.

 

 

 

이집트계 그리스인인 그들은 이집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하지만 이집트는 더 이상 그들의 모국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집트에서 추방당한 난민들이었다. 침략자들이 물러나고 수차례 굴욕을 겪은 끝에 이집트는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는데, 단순한 기술 덕에 이집트 사람들보다 형편이 조금 나았던 이 그리스인들은 그 자유의 피해자가 되어 이 배처럼 허름한 선박에 태워져서 강제 추방을 당했다. 그러다 지금 이렇게 관광객 틈에 섞여 귀국길에 오른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레바논의 사업가, 스페인의 나이트클럽 댄서, 독일에서 귀국하는 뚱뚱한 이집트 학생도 있었다. / ‘피레우스의 방랑자중에서 9p

 

 

피레우스와 레오나르도 다빈치호가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전에 방랑자와 청년은 다시금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결국 방랑자는 동행이 필요했던 게 아니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게 동행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 스스로 보호받고 있다는 안도감을 느끼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괴팍한 사람이라는 걸 잘 아는 눈치였다. / ‘피레우스의 방랑자중에서 12p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주인을 따라 인도 뭄바이에서 워싱턴으로 건너 온 산토시가 등장한다. 그는 이제껏 자신을 주인의 일부로 생각해왔기에 좁은 붙박이장에서 지내는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았지만, 점점 개인으로서의 나로 자유에 눈을 뜨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 붙박이장, 텔레비전, 주인, 슈퍼마켓으로 한정되어 있는 이 죄수 같은 삶으로부터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뭄바이로 돌아간다고 해서 예전처럼 살 수 있을까? 더군다나 지금의 주인이 아닌 또 다른 사람의 일부로 살아갈 자신도 없다. 그렇게 뭄바이로 돌아갈 수도 없고 주인으로부터 도망쳐 불법체류자의 신세로 워싱턴에 뿌리내리고 살 수도 없는 현실 앞에서 고민하던 그는 마침내 흑인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합법적으로 신분을 보장받고 워싱턴에서 살게 된다. 하지만 우연히 알게 된 인도인 프리야를 새 주인으로 섬기게 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또 다시 이어지고 마는 피지배자로서의 역사와 한계를 들여다보게 해 안타까움을 남긴다.

 

 

 

나는 전에 자유인이었지만 지금은 그 자유도 잃고 말았다. /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중에서 80p

 

 

형제라니, 대체 누가 누구의 형제라는 말인지 알쏭달쏭했다. 나도 한때는 큰 무리의 일부였다. 그때는 나를 독립된 개인으로 인식하지 못했다. 그러다 거울 속에서 나를 발견하고는 자유로워지기로 마음먹었다. 자유는 내게 이런 사실을 일깨워 주었다. 내가 가진 건 오로지 몸뚱이 하나뿐이라는 사실, 어떻게 해서든 그 몸뚱이를 입히고 먹여 살려야 한다는 사실, 그러다 보면 어느 날 모든 게 끝난다는 사실을. / ‘무리에서 벗어나 한 개인으로중에서 95p

 

 

 

  ‘'누군가 아는 사람이 있으면 말하라, 대체 나는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라고 묻는 이름 없는 사내의 이야기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는 자신의 인생을 망친 자들에 대한 적의를 강하게 드러낸다. 고향을 떠나와 죽기 살기로 일하며 번 돈을 아무렇지 않게 강탈해가는 저 불량배들인가, 하고 싶다던 공부를 할 수 있게 해주었건만 비싼 담배나 축내며 무기력하게 시간만 보내고 있는 동생 데이요인가, 아내를 때리고 돈을 함부로 낭비하면서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는 형인가 혹은 너무나 뒤처진 나머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아버지인가. 그도 아니면 동생 데이요를 집요하게 괴롭혔던 숙부와 사촌들인가, ‘내가 그토록 열심히 일한 사실도 모르는 이 유령 같은 도시인가. 대체 어디에다 이 원망과 분노를 쏟아내야 엉망이 된 나의 삶을 보상받을 수 있는지 알 수 없어 괴로워하는 사내의 처절한 고통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영락없는 노동자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슬퍼 보여 마음이 아팠다. 답답할 정도로 좁은 방도, 창밖의 콘크리트 벽도, 햇볕이 들지 않는 뒷마당도 마음이 아팠다. 앞으로 어ㄸ?ㅎ게 될가? 동생과 내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날까? 동생은 결국 고향으로 가는 배에 올라 햇빛 밝은 아침에 내려서 택시로 교차로까지 가서는 낯익은 길을 달리게 될까? /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중에서 153p

 

 

양복을 입고 책을 든 채 넓은 계단을 오르는 데이요도 관광객처럼 보였다. 관광객들은 그저 관광을 위해 이곳에 들렀을 터였다. 다들 행복해 보였다. 광장 한쪽에는 호텔로 데려다줄 버스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관광객들에게는 저마다 돌아갈 고향도, 편안한 집도 있을 터였다. 가슴 가득 슬픔이 차올랐다. / ‘누구를 죽여야 하는지 말하라중에서 159p

 

 

 

  표제작인 자유 국가에서는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땅에서 여전히 중앙 정부 산하 기관의 행정관으로 근무 중인 영국인 남성 바비와 유럽인 거주 구역 정부 공관의 행정관 아내인 영국 여성 린다가 함께 남부 관할 지구로 가는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들이 스쳐지나가는 아프리카의 풍경 속에는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원시 형태의 마을이란 없다. 기껏해야 관광객 전용 상점에 진열된 목각이나 가죽 제품, 기념품 북이나 뾰족한 창 정도다. 새로 들어선 관광호텔 입구에는 어색한 제복 차림의 소년들이 서 있고, 멀지 않은 곳에서 백인이나 유대인 관리자들이 소년들을 감독하고 있다. 또 몇몇 흑인 소년들이 자신의 몸을 팔아 돈을 버는 모습도 눈에 띤다. 심지어 린다는 아프리카인들이 피와 똥오줌, 쓰레기 같은 것을 주말마다 먹으며 증오의 의식을 치른다는 등의 소문까지 아무렇지 않게 떠벌린다. 이렇게 소설은 바비와 린다의 시선과 대화를 통해 식민 시대 이후의 아프리카를 냉철하고 가감 없이 보여준다.

 

 

 

  소설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아프리카인들에게 호의적이었던 바비가 간간이 보여주는 모순된 행동들이다. 그는 줄루족 청년에게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당신 같은 피부색을 갖고 태어나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바람에 그것이 진심이었든 아니었든 상대방으로 하여금 분노를 사고, 주유소에서 일하던 아프리카인이 자신의 차에 흠집을 내자 물어내지 않으면 여기서 쫓겨나게 만들 거라고 윽박지르거나 자신이 말하는 중에 건방지게 등을 돌렸다고 화를 낸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식민 시대의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피지배자들을 저급한 족속으로 몰고 가는 린다에게 날을 세우는 그의 태도는 기묘한 아이러니를 낳는다.

 

 

 

나는 이곳 사람들이 유럽인들에 대해 편견 같은 걸 갖고 있다면 그건 순전히 유럽인들 탓이라고 생각해요. 대통령은 매일 이 나라 곳곳을 다니며 우리 유럽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국민을 설득하고 있어요. 대통령이 뭘 몰라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 그 또한 식민지 시절 유럽인들이 챙길 것 다 챙겨서 남쪽으로 도주한 사실을 훤히 꿰고 있어요.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는 아프리카인들에게 부패하면 안 된다고 역설해요. 그런데 그들이 우리의 사소한 부정이나 부패를 지적하면 화를 벌컥 내며 그건 잘못된 편견에서 나온 것이라고 핏대를 세우죠.” / ‘자유 국가에서중에서 216p

 

 

저 사람들은 오랫동안 농도로 지냈어요.” 바비가 말했다. 그는 다시 화가 났다. “수백 년 동안 압박과 착취에 시달렸던 사람들이란 말입니다.”

아무튼 어처구니없는 사람들이에요.”

린다가 말했다.

바비는 눈앞의 길에 신경을 집중했다.

어처구니없는 건 저 사람들이 아니라 이런 곳에 온 나예요.” / ‘자유 국가에서중에서 290p

 

 

 



 

 

 

 

  이처럼 자유 국가에서에 수록된 작품 대부분에는 자신의 뿌리와 자유를 갈망하며 떠도는 자들의 슬픔과 좌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3세계 출신으로 자칫 감상주의에 빠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이폴은 포스트 식민 시대의 현실을 냉정하게 소설 속에 투영하고자 했고, 그러한 이유로 그의 언어는 높은 설득력을 지닌다. 덕분에 그의 작품에는 하나같이 억압된 역사의 굴곡을 뚜렷하게 직시하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또 그 역사가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한 나폴리의 문학은 몇 번이고 회자될 것 같다. 아직 나폴리의 작품을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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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얼굴에 혹할까 - 심리학과 뇌 과학이 포착한 얼굴의 강력한 힘
최훈 지음 / 블랙피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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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말보다 강한, 얼굴이 가진 힘!

얼굴이 내게 말해오는 것들에 관심을 두다 보면 저절로 소통의 기술도 늘어나지 않을까!

 

 

 

 

  “? 뭐라고? 다시 한 번 더 말해줘.”

  요즘 들어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꼭 한 두 번은 되묻곤 한다.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이 된 뒤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할 때가 많아서다. 평소 상대방의 눈이 아닌 입모양을 곧잘 바라보곤 하는 나로서는, 마스크로 입을 가린 채로 의사소통을 하는 게 이렇게 불편한 일인 줄 예전엔 미처 몰랐다. 게다가 이사를 하면서 아이의 새 어린이집 선생님과 같은 반 어머니들의 얼굴을 익히는 일도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누구 어머니였더라? 분명 인사를 나누긴 했는데 누구의 어머니인지 금방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으니 답답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를 쓰게 되면서 나름 이로운 점도 있다. 마스크를 벗을 일이 없을 것 같으면 굳이 화장을 하지 않아도 되고, 대화를 나눌 때 얼굴에서 드러나는 미세한 표정을 애써 감출 필요도 없다. 특히 상대방에게 내 외모가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건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관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렇게 되고 보니 얼굴이란 것이 타인과 어울려 살아가는 데 있어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는 요즘이다.

 

 

 

얼굴은 단순히 얼굴이 아니다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최훈 교수는 실제로 얼굴은 소통에 능하도록 진화되어 왔다고 말한다. 다른 동물들에 비해 신체적 능력이 떨어졌던 인류는 생존에 유리하기 위해 공동생활을 선택했는데, 이 때 꼭 필요한 능력은 동료들과 원활하게 소통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냥을 할 때도 동료들과 의사소통을 해야 협업이 가능했기에 몸과 제스처, 그리고 얼굴을 통한 비언어적 소통이 중요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인류는 다양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형태로 얼굴을 만들 필요가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흰자위다. 인간의 흰자위가 유독 크고 뚜렷한 이유는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흰자위를 넓혀갔던, 더 정확하게는 흰자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생존 확률을 높여주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흰자위가 검은자위와 대비를 이루어 검은자위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시선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상대방이 단번에 파악할 수 있다는 이점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인류는 얼굴을 통해 보다 유리한 방법을 취득해나갔고, 그 결과 많은 정보를 얼굴에 담아 정보를 주고받으며 직관적으로 매우 빠른 시간에 정보를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얼굴을 통해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는다. 신원, 성별, 연령대는 물론 표정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알 수 있다. 때로는 백 마디 말보다 한순간의 얼굴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시선을 통해 상대방의 의도를 알고, 그 사람의 얼굴이 얼마나 매력적인지도 파악할 수 있다. 더러는 성격과 지적 수준, 살아온 역사를 알 수 있을 뿐더러 관상학에 따르면 사람의 미래까지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얼굴의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판단할 수 있게 하는 것일까? 우리는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통해 정보를 전달하고 있으며 또 어떠한 방식으로 얼굴을 활용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까?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는 바로 이러한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얼굴 안내서같은 책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얼굴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지, 첫인상은 어떻게 결정되는 것인지,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는지, 얼굴에 관한 다양한 궁금증을 심리학과 뇌 과학을 중심으로 풀어나간다.

 

 

 

유사한 많은 연구에서 음성 없는 짧은 동영상을 보여주었을 때 참가자들은 등장인물의 외향성, 신경성, 성실성 등 성격 특성을 비교적 정황하게 판단했다. 게다가 정확한 판단에 필요한 시간은 대개 30초에서 1분 정도였다. 1분보다 더 오래 보여준다고 정확도가 높아지지는 않았다. 찰나의 판단은 정말 빠른 시간에 완성되고는 끝이라는 이야기다. / 38p

 

 

반면 몇몇 사람들에게는 사진을 시간제한 없이 보여주고 평가하라고 했다. 그 결과 사진을 0.1초 보여주었을 때와 무제한으로 보여주었을 때 별 차이가 없었다. 첫인상을 형성하는 데는 0.1초면 충분했던 것이다.

이렇게 눈 깜짝할 사이에 첫인상이 형성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이해할 만하다. 우리는 생존 확률을 높이는 쪽으로 행동하고 판단하는데, 첫인상을 빨리 형성하는 것이 생존 확률을 높일 수 있다. 낯선 사람이 나에게 우호적인지 아니면 적대적인지 빠르게 판단해야 할 때 첫인상은 판단에 기본적인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118p

 

 

 




 

 

 

 

  간혹 사진을 보다 보면 흠칫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이렇게 생겼었나? 내가 생각하는 얼굴과 사진 속의 얼굴이 꽤나 다르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내 얼굴의 모습을 심리학 용어로 내 얼굴의 표상이라고 하는데, 내 얼굴의 표상과 실제 얼굴을 비교한 연구를 살펴보면 내 얼굴의 표상은 실제 얼굴과 꽤 차이가 난다고 한다. 우리는 눈, , 입을 실제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며, 얼굴을 위쪽과 아래쪽으로 구분했을 때 위쪽 얼굴은 더 작게, 아래쪽 얼굴은 더 크게 지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이다. 이에 대해 뇌 과학자들은 눈, , 입이 상세한 처리가 필요한 중요 부위이기 때문에 뇌의 더 많은 영역이 눈, , 입을 담당해 더 크게 지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얼굴 중에서 왼쪽이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는 감정을 느끼고 매력을 평가하는 역할을 뇌의 우반구가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타인이 내 얼굴을 보고 매력을 평가할 때는 정작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 얼굴이라는 사실이다. 매력을 평가할 때는 우반구가 작용하니, 왼쪽 눈으로 들어오는 얼굴이 더 중요하고, 타인과 내가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으면, 상대방 왼쪽 눈에 비치는 내 얼굴은 오른쪽 얼굴이기 때문이다. 억울하게도 더 매력적인 내 왼쪽 얼굴이 아닌, 오른쪽 얼굴이 내 얼굴 매력에 대한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화장이나 얼굴을 매만질 때는 오른쪽 얼굴에 더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이를 이용해 저자는 특정 이미지를 어필하고 싶을 때는 왼쪽보다 오른쪽을 중심으로 강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한다. 이를 테면 갓난아이가 여자아이라는 것을 강하게 어필하고 싶어 머리에 리본을 단다고 하면, 왼쪽 머리보다는 오른쪽 머리에 다는 게 유리하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옆에 있는 사람의 매력이 높건 낮건 상관없이, 일단 여러 명이 함께 사진을 찍으면 내 매력이 높아져 보인다는 점도 재미있다. 이를 치어리더 효과라고 하는데, 여러 명이 함께 제시되면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사람들을 하나의 집단으로 묶고, 그 집단의 표상을 구축한다고 한다. 이때 집단의 표상은 집단 구성원의 평균 얼굴과 유사하게 형성된다. 그러면 우리가 평균적인 얼굴을 보고 매력적이라고 느끼는 것처럼, 집단 구성원은 그 집단의 표상과 유사하므로 (그 집단의 표상이 그 구성원의 평균 얼굴이니까) 집단에 속한 사람이 더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또 얼굴에 있어서 눈썹의 역할이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눈썹이 진하면 기본적으로 얼굴의 대비 정도가 높아지는데, 대비가 높은 얼굴은 더 매력적으로 지각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아이섀도를 진하고 넓게 칠하는 스모키 화장 역시 눈과 눈썹의 동화 효과를 강화하고, 그 결과 눈 크기가 눈썹 위치까지 확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델뵈프 착시를 불러와 눈이 커진 듯한 착시를 발생시킨다고 한다. 여기에 하얀 얼굴, 빨간 입술, 안경 활용법 등 얼굴을 어떻게 보이게 하느냐에 따라 타인에게 나의 인상을 달리 보이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볼 수 있겠다.

 

 

 




 

 

 

 

  이처럼 내면이 중요하다면서 왜 얼굴에 혹할까를 읽다보면 얼굴은 생각보다 나에 대한 많은 정보를 담고 있으며 이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 소통의 내용 또한 달라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당부하고 싶은 것은 이 글을 읽고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태도를 옹호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는 점이다. 얼굴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하지 않을뿐더러, 겉모습으로 상대방을 확신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를 무사히 극복하고 온전히 누군가의 얼굴을 가까이 마주할 수 있는 날, 이 책으로 하여금 저 사람이 나에게 보내는 눈짓과 표정이 무엇을 말하는지 보다 가까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로 삼아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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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구트 꿈 백화점 2 - 단골손님을 찾습니다 달러구트 꿈 백화점
이미예 지음 / 팩토리나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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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도 나오지 않을까, 미리 기대하며 읽게 되는 소설!

꿈꿀 수 있는 오늘이 있음에,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이 있음에 설렌다!

 

 

 

  이곳은 먼 옛날부터 사람들에게 수면에 관련된 상품을 판매하면서 발달해온 도시다. 그 중에서도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은 유독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건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이 도시의 랜드마크다. 안 가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사람은 없다는 이곳엔 층마다 다양한 장르의 개성 넘치는 꿈들이 구비되어 있어 오늘도 꿈을 구매하고 싶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해, ‘을 판매하는 달러구트의 백화점을 중심으로 한 편의 동화 같은 판타지를 선보이며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달러구트 꿈 백화점이 드디어 두 번째 책으로 돌아왔다. 첫 번째 책이 신입사원 페니가 달러구트의 꿈 백화점에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여러 에피소드들을 중심으로 펼쳐졌다면, 두 번째 책은 그로부터 1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본격적인 꿈 산업 종사자로 발돋움하게 된 페니가 민원관리국으로 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주로 여러 꿈 제작사와 제작자들이 한 데 모여 있는 컴퍼니 구역 내에는 꿈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민원을 해결해주는 곳이 있다. 이곳이 바로 민원관리국이다. 달러구트를 따라 민원관리국에 처음 방문하게 된 페니는 한껏 설레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는 장소라고 경고한 매니저 모그베리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린다. 이곳에서는 총 3단계의 민원을 해결하는데, 잠을 개운하게 잘 수 없는 정도가 1단계라면 2단계는 일상생활에 피해가 갈 만큼 불편한 정도이고, 3단계는 1, 2단계의 직원들이 처리하지 못해서 국장님이 직접 관리해야 할 정도의 민원이라고 한다. 안내를 받아 국장실로 향하던 페니는 만드는 사람이나, 무작정 파는 사람이나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등의 불만 사항을 늘어놓는 민원인들의 살벌한 말투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자신을 팔락이라고 소개하는 직원 역시 매일같이 밀려드는 민원에 지칠 대로 지쳐 페니 일행에게 냉랭하기는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페니는 달러구트로부터 1층 프런트에 온 3단계 민원을 맡아 보지 않겠느냐는 상당히 곤란한 제안을 받는다.

 

 

 

선심 쓰는 게 아니라, 다양한 꿈을 만드는 사람이 있고 파는 사람이 있으니까 손님들이 잠든 시간 동안 여러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건 사실이잖아요.”

당신들이 없으면 꿈을 살 수 없을 테니 불만을 품지 말라는 건가요? 꿈 때문에 지친 사람들이 이렇게 분명히 존재하는데도요? 당신들은 하하 호호 기분 좋은 백화점에서 구김살 없이 일한 티가 나는군요.” / 72p

 

 

 

  달러구트의 백화점에서 꿈을 판매한 지 1년이 되었지만 이렇다 할 목표가 없던 페니는 사실 올해도 작년과 같은 한 해가 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웨더 아주머니가 시키는 일만 할 수 있을 수는 없었다. 신입사원이라는 무적의 방패 뒤에 숨으면 어떻게든 해결되던 일들도 더는 기대해선 안 될 뿐만 아니라 자신만의 계획이 있는 직원들과는 점점 격차가 벌어질 것이라는 사실도 모르지 않았다. 때문에 페니는 판매자들의 무심함으로 인해 민원관리국까지 가게 되는 손님들의 마음을 되돌리기 위해, 여러 가지의 이유로 달러구트의 백화점을 더 이상 찾지 않고 있는 단골손님들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 달러구트가 제안한 민원을 해결해보기로 마음먹는다.

 

 

 

페니, 우리가 벌어들인 돈은 손님들의 귀중한 감정과 맞바꾼 것이니까 이 무게를 잊지 않도록 해야 한다.” / 44p

 

 

하지만 가게 입장에서는 전혀 손해가 아닌 것이, 792번 손님이 꿈값으로 낸 감정은 같은 꿈을 사간 그 누구보다 풍부하고 다양했다.

792번 손님이 지불한 감정은 다른 사람이 지불한 쾌적함’, ‘놀라움’, ‘신비로움뿐만이 아니었다. 이상하게도 그는 살아 있는 열대우림을 꾸고 나서 소량의 상실감을 함께 지불한 기록이었다. ‘상실감이라니? 어울리지 않는 감정이었다. 그가 이토록 복잡한 감정을 느낀 것은 왜일까? / 87p

 

 

 



 

 

 

 

  이처럼 달러구트 꿈 백화점 2는 신입사원이었던 페니가 꿈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렸거나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꿈 산업 종사자로서 성숙해져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시력을 잃으면서 일상도 잃고 꿈마저 꿀 수 없게 된 손님이 다시 자신만의 특별한 꿈을 찾을 수 있도록 돕고, 더 이상 루시드 드림을 꾸지 못하게 된 손님을 위해 전설의 꿈 제작자인 오트라를 찾아가 그녀만이 만들 수 있는 특별한 꿈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한다. 은퇴 후 무기력증에 빠진 여자 손님에게는 추억이라는 꿈을 선물함으로써 지금의 행복을 충실하기 위해 현재를 살고, 아직 만나지 못한 행복을 위해 미래를 기대해야 하며,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 행복을 위해 과거를 되새기며 살기를 바라는 가슴 뭉클한 응원을 전한다.

 

 

 

당신과 사는 이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잠을 매개로 이어져 있는 건, 신이 주신 다정한 운명일지도 몰라요. 서로 어떤 말을 나누어도 좋을 꿈속의 친구가 되어줄 수 있잖아요.” / 99p

 

 

언제나 인생은 99.9%의 일상과 0.1%의 낯선 순간이었다. 이제 더 이상 기대되는 일이 없다고 슬퍼하기엔 99.9%의 일상이 너무도 소중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외출했다 돌아오는 길도, 매일 먹는 끼니와 매일 보는 얼굴도.

그제야 여자는 내 삶이 다 어디로 갔냐 묻는 것도, 앞으로 살아갈 기쁨이 무엇인지 묻는 것도 실은 답을 모두 알고 있는 질문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278p

 

 

추억을 만든 것은 과거의 손님 본인이기 때문에, 당연히 이 꿈의 제작자는 손님이지요. 우리는 모두 그 어떤 제작자보다 훌륭한 꿈 제작자예요. 제작하는 사람도 판매하는 사람도 매일을 살아가는 당신 없이는 훌륭한 작품을 완성할 수 없답니다.” / 290p

 

 

 



 

 

 

 

  전 편이 그러했듯 세탁물을 들고 다니는 녹틸루카, 전설의 꿈 제작자들, 하늘을 나는 꿈을 만드는 레프라혼 요정들, 특수 제작된 단골손님들의 눈꺼풀 저울 등 꿈의 도시를 정교하게 이끌어가는 판타지 요소들은 여전히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여기에 특유의 발랄함과 따뜻한 정서는 한 편의 동화처럼 보드랍게 이야기를 품는다. 무엇보다 꿈꿀 수 있는 오늘이 있음에, 더 많은 꿈을 꿀 수 있는 내일이 있음에 읽는 내내 마음을 설레게 한다. 이것이 이 책의 다음 편을 또 기대하게 만드는 이유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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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시 - 내 것이 아닌 아이
애슐리 오드레인 지음, 박현주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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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아이를 위한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요구받는 모성의 현주소를 예리하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그려낸 소설!

 

 

 

  아이가 갑자기 바닥에 드러눕더니 세상이 떠나가라 울기 시작했어. 그것도 막 초록불이 깜박이기 시작한 횡단보도 위에서 말이야. 나는 순간 온몸의 핏기가 싹 사라지는 듯했다가 일제히 얼굴로 확 몰려드는 것을 느꼈어. 8차선이나 되는 도로 한복판에서, 신호를 기다리기 위해 서 있던 운전자들이 일제히 나를 바라보는 것 같았거든. 딱하게 바라보는 듯한 시선 말이야. 그렇게 아이를 끌어안고 강제로 뛰다시피 건너오고나면 집으로 돌아가기까지 나는 얌전히 갈 수 있을까를 걱정해. 겨우 수십 분에 불과한 시간 동안에 아이의 감정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이거든. 이런 상황이 올 때마다 사람들은 말해. “애들이 다 그렇지 뭐.” 이 맘 때쯤의 아이들은 다 그렇다고 위로 아닌 위로의 말을 하지. 나도 모르는 건 아니야. 언젠가는 이 아이도 초록불이 바뀌기 전에 빨리 횡단보도를 건너야 안전하다는 것쯤은 알게 되겠지.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내가 마주해야만 하는 수많은 곤란들은 나를 지치게 해. 그리고 세상은 모성이라는 아주 간단하고 거창한 이름으로 그 모든 것들을 감싸 안아야 한다고 말하지. 그게 당연하기라도 한 것처럼.

 

 

 

모성이 세상에 던지는 질문

 

 

  “어째서 내가 좋은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데?”

  블라이스는 한시라도 빨리 우리의 아기를 갖고 싶다는 남자친구 폭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여동생을 예쁜이라 다정하게 부르고, 주말에 격주로 집에 가서 아버지를 도우며 따뜻한 포옹을 나누는 그의 완벽한 가족 사이에서 그녀는 불안함을 느낀다. 블라이스는 그녀의 외할머니인 에타에 이어 엄마인 세실리아로 이어져 내려온, 모성 결핍이라는 유전자가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칠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던 것이다. 하지만 폭스에게 어울리는 아내가 되고 싶었고,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기에 그녀는 완벽한 아내가 되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자신만은 엄마와는 다르리라는 확고한 사실, 바로 그러한 사실을 확인받고 싶었던 마음이 더 컸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내가 더 많은 사실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결코 캐묻지 않았어. 무슨 말을 들을지 모르니 두려웠을 테지. 나도 이해해. 우리는 모두 서로에 대해, 자기 자신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질 자격이 있지. 모성도 마찬가지야. 우리 모두 좋은 엄마가 있기를, 그런 사람과 결혼하기를,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지. / 20p

 

 

우리는 이미 이전에 여러 번 이 얘기를 했었지. 내가 다른 사람들의 아이를 안거나 무릎을 꿇고 놀아주고 있노라면 당신은 신이 났어. 당신 천부적이야. 하지만 상상으로 그려본 쪽은 나였어. 모성. 그건 어떤 것일까. 어떤 기분일까. 당신에게 잘 어울려.

나는 달라지려 했어. 그런 일들이 쉽게 되는 다른 여자들과 같아지려 했어. 내 엄마가 되지 못했던 건 뭐든 되려 했어. / 35p

 

 

 




 

 

 

 

  하지만 블라이스는 아이를 자신의 몸에서 밀어내는 순간, 격렬한 고통과 함께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초현실적인 시간의 우주 속에서 맥박을 나눈 단둘만의 역사가, 경이로운 감각이 이따금 마음을 뭉클하게 했지만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엄마는 아이의 생존을 책임져야만 하는 절대적인 역할로 돌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내 그녀는 이 관계 속에서 살아나갈 수 없는 유일한 엄마가 되는 기분을 느낀다. 항문부터 질까지 회음부를 봉합한 상처에서 회복되지 못한 유일한 엄마. 젖꼭지를 면도날로 베는 것 같은 고통을 주는 신생아의 잇몸과 싸워 이길 수 없는 유일한 엄마. 잠을 못 자 머리가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유일한 엄마. 커리어를 내려두고 아이를 먹이고 재우고 액상 유산균을 주는 일에만 집중해야 하는 엄마. 아이를 낳고 축 늘어진 피부에 마시멜로 같은 몸뚱이를 가진 엄마. 자신과 있을 때만 우는 아이에게 배신감을 느끼는 엄마. 딸을 내려다보고 제발 꺼져버려, 라고 생각하는 유일한 엄마. 아이를 아기 침대에 내려놓고 한밤에 떠날까 생각하는 엄마. 엄마와 아이란 서로를 원해서 태어난 존재지만, 엄마가 짊어져야 할 모든 현실의 무게에 점점 지쳐간다.

 

 

 

우리는 몇 분 동안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었어. 그런 다음 여자가 말했어. “애가 나한테 별안간 생긴 것만 같아요. 내 세계로 쿵 떨어져서 가구들을 다 넘어뜨린 것처럼.”

그렇죠.” 나는 그 여자의 아이가 무기라도 되는 양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어. “아이를 원했고 몸 안에서 키웠고 내보내기도 했지만 별안간 생긴 일이기도 하죠.” / 65p

 

 

나는 여전히 너무 피곤했어. 너무 신경이 곤두서서 당신 어머니를 우리 집에 내내 모실 수가 없었지. 어머니에 대한 나의 감정은 복합적이었어. 어머니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어. 누구의 도움이라도 필요했지. 그렇지만 어머니의 능력에 대해 분개심을 품게 되기도 했어. 당신의 인생 내내 당신의 어머니가 모든 것을 너무 쉬운 일처럼 처리했다는 것이 싫었어. / 111p

 

 

 

  그런 가운데 블라이스는 딸 바이올렛으로부터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다. 아이가 유독 아빠에게만 애정을 보이더니 급기야 엄마가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바이올렛이 미끄럼틀 위에서 발을 걸어 넘어뜨린 친구가 죽는 끔찍한 일까지 발생한다. 불과 10, 그 잠깐의 순간에 벌어진 사고를 보게 된 블라이스는 이때부터 대체 자신의 딸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경계하게 되고, 이후 둘째 아이 샘의 죽음에도 블라이스가 관련이 되어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된다. 딸이 내 팔을 잡아 당겼어요. 나는 뜨거운 차에 데었어요. 내가 유아차를 놓아버렸어요. 그러자 딸이 그 유아차를 길 위로 밀었어요. 그녀는 경찰에게, 남편에게 이 사실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에 그녀가 미쳤다고 생각할 뿐이다.

 

 

 

  이처럼 소설 푸시는 완벽한 가족을 이루길 꿈꿨던 한 여성이 자신이 낳은 아이를 사랑하지 못함으로써 겪게 되는 모성의 딜레마와 딸의 손끝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죽음의 서스펜스를 정교하게 엮어낸 심리스릴러다. 엄마가 되는 순간부터 이전과는 다른 삶으로 돌입하게 되는 나의 시간. 그리고 매순간 아이를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도전받는 듯한 느낌. “당신은 걔 엄마잖아.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그뿐이야.” 완벽한 아이를 위한 완벽한 엄마가 되기를 요구받는 모성의 현주소를 예리하고 가차 없는 시선으로 그려낸 것은 물론, 자신이 낳은 아이의 손에서 일어난 비극이 과연 그녀만의 망상일까, 혹은 진실일까 혼란의 혼란을 거듭하며 마지막까지 극적 긴장감을 잃지 않는 수작이다. 여기에 소시오패스로 의심될 만한 딸 아이의 공격성이 바로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에 괴로워하는 엄마 블라이스의 심리까지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모성의 이면이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지우는 과도한 무게감에 대해 다시 한번 더 생각하게 한다.

 

 

 

그렇게 잠 못 드는 밤이면, 엿들은 이야기를 재생하며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어. 우리는 무언가로부터 자라난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씨앗에 실려 온 것이며, 나는 엄마가 일군 정원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 72p

 

 

내가 마치 범죄를 저지른 사람 같은 기분이 들어요.” 엄마 중 한 사람이 말했어. “시설에 가면 교도관들이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요. 변호사들도 나를 그런 식으로 대해요. 모두가 내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쳐다봐요. 하지만 나는 아무 짓고 안 했는데.” 그 여자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이었어.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안 한 걸까요?” 잠시 생각한 후에 한 엄마가 입을 열었어. / 217p

 

 

 



 

 

 

 

  오늘도 나는 아이의 손에 들려주지 말아야 할 것을 들려준 것은 아닌지, 아이가 흘린 눈길에 어떤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 조금 전에 내가 한 말이 아이의 마음에 평생 상처로 남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 모든 게 엄마라는 이유로, 아이와 관련된 그 모든 것에 시험받는 기분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나만 그런 거 아니죠? 당신들도 그런 거죠? 물어보고 싶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는 말을 삼켜가면서.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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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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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십 년을 허비했다. 만 십 년,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 한 권을 위해 몸 둘 곳을 잃은 채 끊임없이 자존심에 상처 입고 세상의 휘몰아치는 찬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 혀를 데고 가슴을 태우고, 내 몸을 도저히 회복되기 어려울 만치 일부러 망가뜨렸다.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 없앴다. 원고지 5만 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이것뿐이다. 이것뿐. ()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단편집 만년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그대의 눈에, 그대의 가슴에 침투해 갈 게 틀림없음을.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

 

 

 

  『만년을 읽기 전엔, “오직 이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오롯이 작가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단편집을 끝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집이 자신의 유일한 유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만년(晩年)’이라 지었다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이십 대 초반의 작가가 유작을 염두하고 집필했다면 거기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세계와의 부조화, 자신을 끝까지 괴롭힐 수밖에 없는 집요한 반성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가정신이 일본과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이쯤 되면 만년(晩年)’이 아니라 만년(萬年)’이라 할 만하다.

 

 

 

흔들리는 존재를 끌어안는 영원한 청춘 문학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 집안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숙모와 보모의 손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 자살 기도 후 동반 여성만이 죽은 데 대한 죄책감 등 유년시절부터 청년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지배했던 일련의 사건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원형이 된 듯하다. 때문에 총 열 다섯 편의 단편 중 자전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이 다소 눈에 띈다. 소설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로 시작한다. 특별한 스토리를 갖추었다기보다 일상의 단상에 가까운 이 소설은 그날그날을 질질 끌리다시피 지내고있는 오늘과 나는 평생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게 되겠지같은 상념들이 한 편의 시처럼 엮여 있다. 외롭고 쓸쓸했던 유년시절, ‘뾰루지가 욕정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눈앞에 캄캄해질 정도로 창피할 만큼 예민했던 학창시절,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첫사랑, 학교 기피증이 심해지는 와중에도 수재라는 명예를 지키려 애썼던 일화들이 담긴 추억은 다자이 오사무의 정서적 근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만년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어릿광대의 꽃에서는 좌익 운동을 하다 술집 여성과 바다에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예술가로서의 고뇌, 청년 다자이의 의식과 자기 고백이 요조라는 화자를 통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바보! 뭘 지껄이고 있어. 도대체가 넌 너무 뻔뻔스러워. 하긴 사실 너나 나나 생산적인 일과는 도통 거리가 먼 인간이지.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마이너스 생활을 한다고 생각지 않아. 넌 대체 무산 계급의 해방을 바라는 거야? 무산 계급의 대승리는 믿어? 정도의 차는 있지만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기생하고 있어. 그건 확실해. 하지만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달라. 프롤레타리아트 하나에 대한 공헌과 부르주아지 아홉에 대한 공헌이라고 말했는데, 뭘 가리켜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헌이라는 거야? 굳이 자본가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준다는 점에선 우리든 프롤레타리아트든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사는 게 배반이라면, 투사는 어떤 신선이 되는 거지? 그런 말이야말로 극단주의라는 거야. / 중에서 15p

 

 

청년들은 언제나 진정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지 하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자신의 신경도 소중히 감싼다. 허튼 경멸을 당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한번 상처 입으면, 상대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 기어이 이런 생각까지 골똘이 한다. 그래서 다투는 걸 싫어한다. 그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많이 알고 있다. 아니라는 한마디 말조차, 열 가지 쯤은 너끈히 가려 써 보이리라. 논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며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에게 함께 이렇게 중얼거린다. 멍청한 녀석!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28p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왁자지껄 포복절도한다.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것은, 청년들에게 숨을 내쉬는 것큼이나 손쉽다. 언제부터 그런 습성이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 아아, 이거야말로 탐욕스러운 미식가의 덧없는 편린 아닐까?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웃지 못한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치 웃어 대면서도, 자신의 자세에 신경 쓴다. 그들은 또한 남을 잘 웃긴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남을 웃기고 싶어 한다. 그건 어쨌든 허무한 마음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좀 더 깊숙이 뭔가 작심한 마음가짐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희생정신. 얼마간 자포자기 적이고, 이렇다 할 목적도 갖지 않는 희생정신.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32p

 

 

 




 

 

 

 

 

  수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 때문일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라고 하면 온통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 같지만, 유머와 풍자의 기교를 활용하여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도 있다. 고독한 산골소녀가 자그마한 붕어로 변신해 마침내 자유를 찾는 어복기, 동물원 안에서 길들여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일본 원숭이가 야생에서 자란 원숭이의 독려에 탈출을 시도하는 원숭이 섬, 세입자인 세이센으로부터 일 년이 넘도록 방세를 받지 못하는 주인의 이야기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등이 그러하다. 사실 만년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이른바 불안, 죽음, 방황, 허무 같은 세기의 정서가 다소 과격한 형태를 띄지 않을까 예상했던 나로서는 일종의 반전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속에서 매번 새로운 일을 시도할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월세 한 번 내지 못하는 처지의 세이센과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그럭저럭 살면서 변변한 생활력조차 없는 ’,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하고 자조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낭만적 현실 도피와 생의 허무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어루만져지는 듯하여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들 모르는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밑에서 대답했다.

알기는! 알고 있는 건 아마, 나하고 너뿐일걸.”

어째서 도망치지 않아?”

넌 도망칠 거야?”

도망쳐.” / 원숭이의 섬중에서 110p

 

 

나는 그만 불안해지고 말았다. 그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나? 내가 그에게 영향을 주고 있나? 어느 한쪽이 뱀파이어다. 어느 한쪽이 알게 모르게 상대의 기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표변을 기대하고 방문하는 내 기분을 그가 알아차린 탓에 그러한 내 기대가 그를 얽매어, 더욱더 변화해 나가야만 한다고 그가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생각하면 할수록 세이센과 나의 체취가 뒤엉키고 서로 반사하는 것 같아, 나는 가속도로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중에서 249p

 

 

인간 만사 거짓은 진실, 문득 그 말이 이제 비로소 피부에 착 달라붙듯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이건 코미디의 정점이다. 오손의 뼈를 정성껏 묻어 주고 나서 사부로는 오늘부터 한번 거짓 없는 생활을 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

() 거짓 없는 생활. 그 말부터 이미 거짓이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한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마음에 거짓이 있으리라. 저것도 더러워, 이것도 더러워, 하고 사부로는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괴로워했다. 사부로는 드디어 한 가지 태도를 발견했다. 무의지 무감동, 백치의 태도였다.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 로마네스트중에서 289p

 

 

 



 

 

 

 

  20세기를 풍미한 일본 근대 문학의 아이콘이 여전히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언어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년은 청년 다자이의 첫 창작집이자 문학세계의 토대가 된 원형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을 읽어 보기 전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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