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다자이 오사무의 첫 창작집!

 

 

 

나는 이 단편집 한 권을 위해 십 년을 허비했다. 만 십 년, 보통 시민과 마찬가지로 산뜻한 아침 식사를 하지 못했다. 나는 이 책 한 권을 위해 몸 둘 곳을 잃은 채 끊임없이 자존심에 상처 입고 세상의 휘몰아치는 찬 바람을 맞으며, 이리저리 헤매고 다녔다. () 혀를 데고 가슴을 태우고, 내 몸을 도저히 회복되기 어려울 만치 일부러 망가뜨렸다. 백 편이 넘는 소설을 찢어 없앴다. 원고지 5만 매. 그리고 남은 건 겨우 이것뿐이다. 이것뿐. ()

하지만 나는 믿는다. 이 단편집 만년은 해가 갈수록 더욱 더 선명하게 그대의 눈에, 그대의 가슴에 침투해 갈 게 틀림없음을. 나는 오직 이 책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 ().”

 

 

 

  『만년을 읽기 전엔, “오직 이 한 권을 쓰기 위해 태어났다는 그의 말이 오롯이 작가의 자부심에서 비롯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이 단편집을 끝으로 자살을 염두에 두었다면 이는 또 다르게 읽힌다. 실제로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집이 자신의 유일한 유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제목을 만년(晩年)’이라 지었다 한다. 죽음을 각오한 이십 대 초반의 작가가 유작을 염두하고 집필했다면 거기엔 인간의 실존에 대한 고민과 세계와의 부조화, 자신을 끝까지 괴롭힐 수밖에 없는 집요한 반성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작가정신이 일본과 시대를 넘어 지금까지 여러 세대에게 영감을 주고 회자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이쯤 되면 만년(晩年)’이 아니라 만년(萬年)’이라 할 만하다.

 

 

 

흔들리는 존재를 끌어안는 영원한 청춘 문학

 

 

 

  고리대금업으로 부자가 된 신흥 졸부 집안 출신에 대한 부끄러움, 숙모와 보모의 손에서 성장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한 정서적 결핍, 자살 기도 후 동반 여성만이 죽은 데 대한 죄책감 등 유년시절부터 청년 다자이 오사무의 삶을 지배했던 일련의 사건은 그의 문학 세계를 이루는 원형이 된 듯하다. 때문에 총 열 다섯 편의 단편 중 자전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이 다소 눈에 띈다. 소설 죽을 생각이었다. 올해 설날, 옷감을 한 필 받았다. 새해 선물이다. 천은 삼베였다. 회색 줄무늬가 촘촘히 박혀 있었다. 여름에 입는 옷이리라. 여름까지 살아 있자고 생각했다로 시작한다. 특별한 스토리를 갖추었다기보다 일상의 단상에 가까운 이 소설은 그날그날을 질질 끌리다시피 지내고있는 오늘과 나는 평생 이런 우울과 싸우다 죽게 되겠지같은 상념들이 한 편의 시처럼 엮여 있다. 외롭고 쓸쓸했던 유년시절, ‘뾰루지가 욕정의 상징이라는 생각에 눈앞에 캄캄해질 정도로 창피할 만큼 예민했던 학창시절, 마음을 두고 있으면서도 먼저 다가가지 못했던 첫사랑, 학교 기피증이 심해지는 와중에도 수재라는 명예를 지키려 애썼던 일화들이 담긴 추억은 다자이 오사무의 정서적 근간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아가 만년의 중심이 되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어릿광대의 꽃에서는 좌익 운동을 하다 술집 여성과 바다에 투신자살을 기도한 뒤 혼자 살아남은 것에 대한 죄의식과 예술가로서의 고뇌, 청년 다자이의 의식과 자기 고백이 요조라는 화자를 통해 보다 명징하게 드러난다.

 

 

 

바보! 뭘 지껄이고 있어. 도대체가 넌 너무 뻔뻔스러워. 하긴 사실 너나 나나 생산적인 일과는 도통 거리가 먼 인간이지. 그렇다고 해서 결코 마이너스 생활을 한다고 생각지 않아. 넌 대체 무산 계급의 해방을 바라는 거야? 무산 계급의 대승리는 믿어? 정도의 차는 있지만 우리는 부르주아지에 기생하고 있어. 그건 확실해. 하지만 부르주아지를 지지하는 것과는 전혀 의미가 달라. 프롤레타리아트 하나에 대한 공헌과 부르주아지 아홉에 대한 공헌이라고 말했는데, 뭘 가리켜 부르주아지에 대한 공헌이라는 거야? 굳이 자본가의 주머니를 두둑이 채워 준다는 점에선 우리든 프롤레타리아트든 마찬가지야. 자본주의 경제 사회에서 사는 게 배반이라면, 투사는 어떤 신선이 되는 거지? 그런 말이야말로 극단주의라는 거야. / 중에서 15p

 

 

청년들은 언제나 진정으로 논의하지 않는다. 서로 상대의 신경을 건드리지 말아야지 하고 최대한 조심하면서, 자신의 신경도 소중히 감싼다. 허튼 경멸을 당하고 싶지 않다. 게다가 한번 상처 입으면, 상대를 죽일까, 내가 죽을까, 기어이 이런 생각까지 골똘이 한다. 그래서 다투는 걸 싫어한다. 그들은 적당히 얼버무리는 말을 많이 알고 있다. 아니라는 한마디 말조차, 열 가지 쯤은 너끈히 가려 써 보이리라. 논의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타협의 눈동자를 주고받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웃으며 악수하고는, 속으로 서로에게 함께 이렇게 중얼거린다. 멍청한 녀석!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28p

 

 

아무것도 아닌 일에도 왁자지껄 포복절도한다. 웃는 얼굴을 만드는 것은, 청년들에게 숨을 내쉬는 것큼이나 손쉽다. 언제부터 그런 습성이 배기 시작했을까? 웃지 않으면 손해를 본다. 웃어야 할 어떤 사소한 대상도 놓치지 마. 아아, 이거야말로 탐욕스러운 미식가의 덧없는 편린 아닐까? 그런데 슬프게도 그들은 진정으로 웃지 못한다. 몸을 가누지 못할 만치 웃어 대면서도, 자신의 자세에 신경 쓴다. 그들은 또한 남을 잘 웃긴다.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남을 웃기고 싶어 한다. 그건 어쨌든 허무한 마음에서 시작되었겠지만, 좀 더 깊숙이 뭔가 작심한 마음가짐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희생정신. 얼마간 자포자기 적이고, 이렇다 할 목적도 갖지 않는 희생정신. / 어릿광대의 꽃중에서 132p

 

 

 




 

 

 

 

 

  수차례에 걸친 자살 시도 때문일까.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이라고 하면 온통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로 가득할 것 같지만, 유머와 풍자의 기교를 활용하여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가 두드러지는 작품도 있다. 고독한 산골소녀가 자그마한 붕어로 변신해 마침내 자유를 찾는 어복기, 동물원 안에서 길들여지고 있었는지도 몰랐던 일본 원숭이가 야생에서 자란 원숭이의 독려에 탈출을 시도하는 원숭이 섬, 세입자인 세이센으로부터 일 년이 넘도록 방세를 받지 못하는 주인의 이야기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등이 그러하다. 사실 만년을 읽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다자이 오사무의 문학 세계를 관통하는, 이른바 불안, 죽음, 방황, 허무 같은 세기의 정서가 다소 과격한 형태를 띄지 않을까 예상했던 나로서는 일종의 반전처럼 느껴졌다. 그러는 가운데서도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속에서 매번 새로운 일을 시도할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실상은 월세 한 번 내지 못하는 처지의 세이센과 얼마 안 되는 유산으로 그럭저럭 살면서 변변한 생활력조차 없는 ’,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하고 자조하는 마지막 장면에서는 낭만적 현실 도피와 생의 허무에 대한 작가의 고뇌가 어루만져지는 듯하여 마냥 유쾌하지만은 않았다.

 

 

 

다들 모르는 거야?”

그는 내 얼굴을 보지도 않고 밑에서 대답했다.

알기는! 알고 있는 건 아마, 나하고 너뿐일걸.”

어째서 도망치지 않아?”

넌 도망칠 거야?”

도망쳐.” / 원숭이의 섬중에서 110p

 

 

나는 그만 불안해지고 말았다. 그가 내게 영향을 주고 있나? 내가 그에게 영향을 주고 있나? 어느 한쪽이 뱀파이어다. 어느 한쪽이 알게 모르게 상대의 기분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는 건 아닐까? 그의 표변을 기대하고 방문하는 내 기분을 그가 알아차린 탓에 그러한 내 기대가 그를 얽매어, 더욱더 변화해 나가야만 한다고 그가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이리저리 생각하면 할수록 세이센과 나의 체취가 뒤엉키고 서로 반사하는 것 같아, 나는 가속도로 그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중에서 249p

 

 

인간 만사 거짓은 진실, 문득 그 말이 이제 비로소 피부에 착 달라붙듯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아아, 이건 코미디의 정점이다. 오손의 뼈를 정성껏 묻어 주고 나서 사부로는 오늘부터 한번 거짓 없는 생활을 해 보자고 마음 먹었다.

() 거짓 없는 생활. 그 말부터 이미 거짓이었다. 좋은 것을 좋다고 하고, 나쁜 것을 나쁘다고 한다. 그것도 거짓이었다. 무엇보다도 좋은 것을 좋다고 말하는 마음에 거짓이 있으리라. 저것도 더러워, 이것도 더러워, 하고 사부로는 매일 밤 잠 못 이루며 괴로워했다. 사부로는 드디어 한 가지 태도를 발견했다. 무의지 무감동, 백치의 태도였다. 바람처럼 사는 것이다. / 로마네스트중에서 289p

 

 

 



 

 

 

 

  20세기를 풍미한 일본 근대 문학의 아이콘이 여전히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이유는, 방황하는 청춘의 감수성을 치열한 자기 고백과 함께 문학 작품으로 승화시킨 그의 언어가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만년은 청년 다자이의 첫 창작집이자 문학세계의 토대가 된 원형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꼭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인간 실격을 읽어 보기 전이라면 이 책을 먼저 읽어보시길 추천 드린다.

 

 

 

출판사로부터 도서 협찬을 받았지만, 본인의 주관적인 견해에 의하여 작성되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