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툭 떨어지는 가을 비 소리에
잠이 깨었습니다.
베란다 문을 열자 마자
알싸한 새벽 냄새와 풀벌레 소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려 들고
새벽 한 켠에
지친 듯 서 있는 가로등
젖은 불빛 한 줄기
밤새 소등하지 못한
내 그리움입니다
그대를 향한.
기억으로부터 무수히 도망치고 싶었네.
청상의 어머니 새벽 흐느낌과
겨울날, 하얗게 얼어버린 새벽,
맨손으로 신문을 돌리던
어린 동생들의 터진 손등,
손가락 한 마디씩 늘 크거나 작던
내 유년의 신발들.
추억으로부터 잊을 만 하면 소환 당하였네.
고향집 앞, 멈춘 듯 흐르던 강물
그 다리 위에
홍시를 으깬 듯 번져있던 노을,
여름밤 둑길
모깃불 사이로 매캐한 듯
눈 비비며 쏟아져 내리던 별들
그리고
‘너’...
너에게서 오랫동안
비전향 장기수로 살았던 ‘나’.
"좋아합니다."
이 말 속에 들어있는
내 마음의 무게 중
한 웅큼을 덜어냅니다.
당신께서 불편하실까봐
당신께서 가슴 아파하실까봐...
그러나
덜어낸 마음은 이내
또 다른 말이 되어 그대를 향합니다.
"좋아해서 미안합니다."
도서관으로 집으로 시장으로 병원으로
신발 뒤축이 무너지도록 종종걸음 치지만
내 삶의 항아리는
식구 많은 집 쌀독처럼
가득 찬 날보다 비어있는 날이 더 많구나...
칡넝쿨처럼
아직도 기세등등한 걱정거리와 함께
터벅 터벅 산길을 내려올 때
더위에 지친 초록들이 내게 건네는 말...
괜찮다..
이제 곧 가을이야...
우리 마음에도 단풍들 수 있을거야...
눈자위가 빨갛게 짓무른 저녁을 눕히고
산이 말없이 어두워지는 시간,
어떤 이는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고
어떤 이는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노을을 바라보기도 하겠지요.
밥벌이의 고단함도
하루 왼 종일 들끓던 마음도
잠시 멈추고
이제는 허리 펴고 쉬어도 된다...
다리 뻗고 누워도 된다...
신이 우리들에게 하시는 ‘허락’ 같아서
산 넘어 사라져 가는 노을을
단단한 그 무엇으로 그림처럼 고정시켜놓고
나는 자꾸,
하염없이 바라만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