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큐 웃픈 내 인생
앨리 브로시 글.그림, 신지윤 옮김 / 21세기북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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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 좋다. 쳇바퀴 돌 듯 이어지는 일상에서 낙을 찾는 일은 중요하다. 손바닥 안에서 우주가 펼쳐지는 요즘 같은 세상에서 굳이 얼리버드나 얼리어댑터가 아니더라도 간단하게 손바닥 안의 우주 안에서 모험을 펼칠 수 있다. 어떤 곳을 어떤 경로로 찾아 들어가 나에게 맞고 나에게 위로와 위안 내지는 웃음을 주는 곳을 발견하는 일은 전적으로 개인의 일이다. ‘너’의 배꼽을 빠지게 만드는 것이 ‘나’의 배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맞는 것을 찾아야 한다. 나는 헛소리 하는 것을 좋아한다. 헛소리라고 해서 정말 ‘아무짝에나 쓸모없는 실없는 소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집안 내력이다. 나와 내 동생은 아버지의 그것을 그대로 닮았다. 어머니는 이것을 싫어하셨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성격은 완전히 달랐기 때문에 매번 아버지의 실없는 소리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내 아내는 내 헛소리를 잘 받아준다. 좋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농담으로 받아치기도 하고 한쪽 귀로 흘려 내는 등의 나름의 방법으로 잘 소화해주고 있다. 그러니 재미있다. 한 번씩 내 실없는 소리에 ‘빵’하고 터질 때가 있다. 그러면 한참 동안 바닥을 데구르르 둘이서 구르며 웃는다. 배가 아프고 허리가 땅기고 눈물이 흐를 때까지. 그러고 나면 1시간 실컷 울고 난 후의 카타르시스 같은 것이 느껴지기도 한다.

이 책 「큐큐 웃픈 내 인생」은 재미있는 책이다. 저자는 이미 블로그로 인기를 끌었다. 블로그도 얼마나 많나~! 주소만 치면 전 세계 어디라도 블로그를 방문할 수 있다. 그런데 방문자 수가 수백만 명을 넘어가는 블로그는 분명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는 얘기다. 결국 책으로까지 출간하게 된 저자 블로그의 인기 비결은 나는 ‘유머’라고 생각한다. 현대인들은 유머를 갈망한다. 오죽하면 여자들의 남자이상형 가운데 항상 상위에 랭크되는 항목이 ‘유머감각’이지 않나? 하지만 모든 남자들이 유머감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애써서 여자를 웃기기 위해서 유머책을 읽거나 개그프로그램을 보며 개인기를 독학한다 하더라도 단번에 유머감각을 장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상에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를 가지고 조금은 다르게, 색다르게 생각하고 그것을 저자처럼 글로 표현하거나 아니면 말이나 행동으로 표현하게 되면 분명 상대방을 웃길 수 있을 것이다.





저자와 함께 사는 강아지는 조금 불편한 것 같다. 책에서는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사람으로 치면 발달장애 정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도우미 견까지 입양하게 되는데, 이 도우미 견과 원래 함께 살던 반려견 사이에 약간의 갈등이 표출되고 같은 사건에 대해 반려견과 도우미 견이 완전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을 굉장히 익살맞게 표현한 부분을 보면서 ‘이 사람은 자신의 슬픔도 웃음으로 승화하는 사람이구나.’라고 생각되었다. 저자는 인생에서 ‘재미’라는 가치를 상위에 두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어 보인다. 나는 개인적으로 개를 기르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개만이 아니라 다른 반려동물도 기를 생각이 없다. 그래서 그녀의 글 전부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녀에게 반려견은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일 것이다. 가족이나 다름없는 존재의 아픔에 천착하지 않고 유머로 업어치기 하는 삶의 태도가 마음에 든다.



“좋은 사람으로 느끼고 싶다고 해서 좋은 사람으로 거듭날 필요는 없어.” (p.343)



좋은 사람이란 무엇일까? 좋은 사람... 착한 사람?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단어는 정의는 지극히 주관적이다. ‘재미’라는 것이 지극히 주관적이듯이 나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해서 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고 그 사람에게 좋은 사람이 나에게 좋은 사람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 우리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이 강박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거의 모든 현대인이 겪는 질환일 것이다. 좋은 사람, 좋은 아빠, 좋은 엄마, 좋은 아들, 좋은 딸, 좋은 직원, 좋은 친구, 좋은 동료, 좋은 선후배, 좋은 사회인, 좋은 시청자, 좋은 고객, 좋은 대중 등등. 무수한 좋은 것들을 요구받는다. 나는 결코 ‘좋은’ 사람이 될 수 없고, 심지어 그 ‘좋다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규정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좋아야’한다고 생각한다. 위 사진을 보며 굳이 ‘내가 왜 좋은 사람이어야 하지?’라고 반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별로 없는데, 왜 나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지 반추하게 되었다. 부모의 기대, 사회의 기대, 국가의 기대, 속한 공동체의 기대, 아내와 딸의 기대 등등 찾으려면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굳이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함을 문득 깨달았다. 거듭나려고 아등바등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모르겠어. 하지만 당신 앞에 끔찍하고 지루한 황무지가 끝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데,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건 이상하게도 희망과 닮아 있단 말이지.” (p.166)

“내가 그런 일을 할 사람이라는 사실조차 알고 싶지 않아. 고맙게도 나는 나 자신이 얼마나 엉망인지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거짓말과 속임수의 완벽한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 (p.355)



저자가 책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하고 싶어 한 것은 긍정적인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림도 그렇고 그림 속 말들도 그렇다. 가만히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 삶을 하나하나 펼쳐 놓고 마주하면 걱정 투성이다. 어떻게 대출을 갚아가야 할 것이며, 나는 언제까지 이놈의 직장에 붙어 있을 수 있을 것이며, 내 몸은 현재 건강한지에 대한 의구심이 드는 것이며, 내 딸은 도대체 언제 커서 걸을 수 있을 것이며 등등. 어떤 밤은 침대에서 이러한 생각의 굴레에 완전히 사로잡혀 몇 시간이고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다가 아침을 맞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렇게 뒤숭숭하게 맞은 아침식사는 꿀맛이다. 일상에 빠져들다 보면 이내 지난밤의 고통과 번뇌는 잊혀진다. 그것이 신이 주신 망각의 축복이리라. 저자의 표현대로 황무지가 끝이 없을 것 같지만 별로 걱정되지는 않는다. 굳이 배우자와 마주 앉아 미래를 설계하거나 예측하는 시간에는 몰아치는 걱정과 근심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져 들지만 정확하게 그 미래를 예측하거나 설계할 수 없기 때문에 막연한 희망 속으로 자연스럽게 나아간다.

자연스럽게 장착되어 있는 ‘속임장치’의 그것은 우리의 삶은 이어가게 만드는 중요한 도움이다. ‘속임장치’가 없다면 제대로 삶을 이어갈 사람이 몇이나 될까? 매번 똑같은 그 문제로 골머리를 싸매고, 죽을 만큼의 고통을 매번 그대로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다. ‘속임장치’가 멋지게 장착되어 있기 때문에 그 때의 잘못을 또다시 되풀이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 또 처음 잘못한 것처럼 그렇게 나를 뉘우치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다.

어차피 살아가야 할 인생. 굳이 어렵고 힘들고 나 자신을 괴롭혀 가며 사는 것은 ‘나’에게나 ‘나의 주변인’들에게나 행복한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망각한 채 도피해서 살아가는 것도 그다지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니다. 책의 제목과 비슷하게 “흐흐.. 내 인생 웃프다.”라고 쓴웃음 한번 짓고 또 내일을 맞는 것이 삶에 대한 가장 긍정적인 자세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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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 -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찾은 엄마의 파업 이야기 희망을 만드는 법 9
다이애나 콘 글, 프란시스코 델가도 그림, 마음물꼬 옮김 / 고래이야기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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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 90년 대 말 학내 운동세력이 급격하게 쇠퇴하던 시기였다. 한때는 학내 운동을 주름잡던 사회대 학생회 소속으로 학내 시위에 참여했다. 학내에서 제왕적인 권력을 휘두르며 온갖 비리와 남용을 저지르던 총장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였다. 새내기, 거칠 것도 없고 두려운 것도 없었다. 그것이 내가 학교에서 참여한 첫 시위이자 마지막 시위가 되었다. 학교 행정실에서 동원한 무시무시한 체대 학생들과 조직폭력배로 보이는 아저씨들에 둘러싸여 목표하던 총장실 무기한 점거는 일순간에 실패했다. 이후 학내 운동세력들이 사활을 걸고 준비한 대동제에 참석한 학생들의 숫자가 200명도 채 안 되는 것을 보고 나는 학생회 활동을 그만 두었다.

이후 몇 번의 시위에 더 참여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가결에 대한 반대 시위, 광우병 촛불 시위, 박근혜 정권 국정원의 대선 개입 부정에 대한 시위, 최근에는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에까지. 시위 참여라 해봤자 행사에 참석해 자리를 채운 채 구경하다 오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우리 사회만큼 시위, 데모에 대해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회가 있을까 싶다. 독일의 대학생들은 1년 대학 등록금을 30만 원 정도 올린다는 것에 반발해 대대적으로 시위를 벌여, 결국 그 정책을 입법하려던 정치인을 낙마시키고 기존 등록금을 유지했다고 한다. 도로 점거는 물론, 우리 사회에서는 당장 집시법위반으로 경찰서에 끌려갈 행동도 크게 위협받지 않는 것 같았다. 시위나 데모가 일어나면 언론은 그 시위와 데모가 일어나게 된 근본 원인에 대한 탐사나 보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시위로 인해 교통체증’ 내지는 ‘경찰과 대치’등 자극적이고 지엽적인 소재로 본질을 호도하는 경우가 많다.

왜 이렇게 병적으로 싫어하게 된 걸까? 솔직히 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이승만 시절부터 박정희, 전두환 독재 정권을 거치며 시민들과 학생들이 주도한 것이 시위, 데모였다. 압제적인 권력에 맞서 일반 시민이 할 수 있는 최상·최후의 방법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한 사회가 되었다. 데모만 하면 친노종북 내지는 빨갱이로 덧칠된다. 이게 논리도 없고 무식하기 그지없는 프레임인데, 매번 먹힌다. 매번 권력을 가진 이들에게는 주요한 공격 무기가 된다.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데모는 데모크라시에서 파생된 말이다. 따라서 한 사회에서 어떤 데모가 일어나고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치며 결과는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살펴보면, 그 사회의 민주주의에 대한 성숙도를 알 수 있다.

 


 

“3주일이나 이어진 길고 긴 파업이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엄마와 청소노동자들은 마침내 승리했습니다. 임금을 올리고 더 좋은 노동 조건을 만드는 데 성공한 거예요.” (p.23)

 

이 책 「우리 엄마는 청소노동자예요」의 주인공과 청소조합원들은 결국 싸움에서 이겼다. 이들의 데모가 권력을 이긴 것이다.

나는 이제껏 살면서 우리 사회에서 시위세력, 데모세력이 결국 그 목표를 쟁취하고 권력에 대해 승리를 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없다. 화물노조, 새만금, 코레일, 각 대학의 청소노동자들, 쌍용차, 한진중공업, 용산 철거민, 강정 해군기지, 밀양 송전탑, 각종 촛불시위, 국정원 대선개입 등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시위와 데모가 있었지만 나는 시위와 데모의 주체인 시민 혹은 조합원 혹은 활동가들이 승리한 소식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리 인터넷을 뒤져도 기사를 찾을 수 없다.

이 작은 책에서는 다 담을 수 없을 만큼 책의 주인공과 조합원들의 투쟁이 얼마나 힘들고 지난한 싸움이었는지 미루어 짐작하고도 남지만 결국 그들은 승리했다. 책의 주인공은 더 이상 주말에 청소를 하러 직장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주말에 아이와 놀아줄 수 있게 되었고 아픈 어머니의 치료비를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임금 인상도 쟁취했다. 부러웠다. ‘역시 미국은 선진국인가 보다.’ 싶었다. 책의 주인공과 조합원들이 마냥 부러웠다.

 


 

“그분들이 이겼나요?”

“그럼, 그분들이 이겼지! 많은 사람이 뭉치면 큰 힘을 낼 수 있단다.” (p.14)

 

주인공의 아들, 카를리토스가 다니는 학교 선생님과 카를리토스가 나눈 대화다. 이미 오래전에도 힘없는 사람들이 힘을 한 데 모아 큰 힘을 발휘해 승리한 역사를 알게 되었다. 이것도 부럽다. 우리에게 승리의 역사가 있나? 6월 항쟁? 탄핵 반대 시위? 광우병 촛불 시위? 결코 승리라고 할 수 없다.

나는 우리 사회가, 더 구체적으로는 기득권을 가진 권력이 왜 이토록 시위와 데모에 대해서 병적으로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다. 기득권을 가진 권력 입장에서는 결코 저 힘없는 자들이 모여 승리를 하는 역사를 만들어 주고 싶지 않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승리한 역사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뭉치지 못했고 힘을 한 데 싣지도 못했다. 전국적인 관심이 쏠리는 거국적인 시위에서도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내부에서부터 분란이 생기고 분열이 생기는 꼴을 얼마나 많이 봐 왔나! 저들은 이 책에 등장하는 청소노동자들처럼 우리 사회의 다른 노동자들, 데모세력들이 결코 승리하는 꼴을 지켜볼 수 없는 것이다. 한 번 승리하면 그것은 역사로 기록된다. 기록되고 기억되며 이어진다. 지금보다 더 민주주의가 제한되고 권력에 의해 국민이 압제받는다 하더라도 이전의 승리에 대한 역사는 고스란히 뒤를 이어 전해질 것이다.

그런데 그런 승리의 역사가 없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분통하다.

 


 

“카를리토스,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주 힘들게 살아갈 만큼밖에 돈을 벌지 못하는 세상은 불공평해! 그래서 청소노동자들이 모여 투표를 해서 일을 멈추기로 했단다. 그런 걸 파업이라고 하지! 우리는 건물이 더러워져도 그냥 내버려 둘 거야. 월급을 제대로 올려 받을 때까지 청소를 하지 않을 거란다.” (p.11)

 

이들이 승리하게 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는 파업의 배경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전했다는 점 일 것이다.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의 아이에게 설명한다. 나쁜 사람은 엄마와 노동자들이 아니라 제대로 노동자들을 대우해 주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가르친다.

 

 

 


우리 사회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시위와 데모를 많이 한 현대사를 알고 있는 세대들도 자신들의 자식들은 그런 데모를 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율배반적인 태도다. 대학 때 독재타도와 노동자를 위해 열심히 운동을 한 사람들이 변절해 국회의원이 되고 자치단체장이 되는 경우를 지금도 보고 있다. 결국 변절하거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는 길이 우리 사회에서는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사실 이것 또한 승리의 역사가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된다. 아무리 분투해도 조금도 나아지지 않는 사회를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이해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자식들에게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이 되고 당연히 누려야 할 가치인 시위와 데모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은 탓에 요즘은 젊은 세대들도 병적으로 시위와 데모를 적대시하는 이들이 많다. 이것은 좀 더 구조적인 문제와 얽혀있기는 하지만 지난 코레일 파업 때 취업준비생들이 파업을 두고 “연봉 6000만원 받는 귀족 노조의 귀족 파업”이라고 코레일 파업을 규정한 보도를 보며 나는 경악했다. 사회 전체적인 발전과 진보를 위한 생각은 전혀 없는 근시안적인 삶의 방향이 안타까웠다. 그 취업준비생은 단 한 번도 그의 부모로부터 시위와 데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시위와 데모에 대해 많이 들었고 충분히 알고 있는 젊은 사람이 그랬다면 그것은 이 사회의 괴물화가 이미 정점에 왔음을 보여주는 꼴이기 때문이다.

 


 

“저는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엄마가 투쟁해 왔다는 점을 아이들에게 알려 주고 싶어요.”

“우리 가족은 제 인생에서 노동조합이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어요.”

 

책의 모델인 돌로레스 산체스의 말처럼 아이들에게 말해주어야 한다. 힘을 가진 기득권과 권력이 짜 놓은 프레임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청소노동자가 되기 싫으면 애초에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이 말이야!”, “처음엔 취직만 시켜 달라 하더니 점점 더 많은 것을 요구한다.”

아니다.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다. 이제는 ‘개천에서 절대로 용이 날 수 없는 세상이다.’ 서울대에 입학하는 신입생 중 상당수가 서울, 그것도 강남에서 배출된다는 사실은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다.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 “더 열심히 공부해서 더 좋은 대학가지 왜!”,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하다못해 공무원이라도 되지!”라고 말하는 것은 폭력이다.

더 심각한 것은 시위와 데모의 주체 세력조차 자신들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내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자식들에게 “너는 나처럼 살지 말아라! 공부해라!”라고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악순환의 반복으로는 승리할 수 없다. 이 책이 적확하게 보여 준다.

돌로레스 산체스는 어린 아들에게 분명하게 가르쳤다. 왜 엄마가 일을 중단하면서까지 데모를 할 수밖에 없는지. 그랬더니 아이는 학교에서 아이들과 엄마를 돕기 위해 피켓을 만들어 응원한다. 이 아이들의 행위가 폭력적인가? 이 아이들이 학교에서 직접 만든 피켓을 가지고 거리로 나오면 집시법 위반인가?

 

광우병 촛불 시위이후 이명박 정권은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촛불 시위에 적극적이었던 유모차 부대 엄마들을 향해 수구언론과 여권에서는 입에 담지 못할 막말을 퍼부었다. 그들의 논리대로 엄마의 손에 이끌려 그 땡볕에 나온 아이들이 결국 엄마를 원망할까? 전혀 아니다. 그렇게 아이들은 유모차에서부터 사회를 배우고 민주주의를 학습하며 연대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희망 섞인 바람은 여지없이 깨진다. 외부의 압력보다는 내부의 검열이 우선되는 경우다.

 


 

“내가 보기에 이 아이들의 엄마, 노동조합을 하는 강인한 여성이야말로 아이들에게는 최고의 모범이다.”

 

저자인 루이스 로드리게스는 이런 여성들이야말로 아이들에게 최고의 모범이라 말한다. 엄마가 무엇 때문에 거리로 나가고 파업을 하며 데모를 하는지를 정확하고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주어야 한다.

 

지난 6.4지방선거에서 진보교육감이 대거 당선되었다. 교육감을 제외한 다른 선거에서 여당과 야당이 백중세를 유지한 것에 비하면 굉장히 특별한 당선이다. 학부모들이 이념과 당파를 떠나서 인물을 보고 투표하고 이전 진보교육감들이 거둔 교육개혁에 지지를 보낸 것이다. 그러고 나서 며칠 전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이 났다. 진보 교육감이 대거 당선되자마자 수구언론에서는 당장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난리를 치고 새누리당에서는 직선제를 폐지하자는 논의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진보교육감에게 대거 투표한 학부모들이 전교조 법외노조 판결에 대해서도 들고 일어나야 정상이라고 보는데, 아무런 동요도 없다. 언론의 보도도 없고 넘치는 sns도 없다. “전교조=빨갱이=데모” 이 프레임이 고스란히 작동되는 것이다. 슬픈 현실이다.

국회 청소노동자들의 파업이 한때 큰 파장을 일으켰었다. 국회의원 선거 이전, 반드시 처우를 개선해 주겠다며 고개를 숙이던 후보가 당선 이후 찾아갔더니 고개를 빳빳이 들고 모르쇠로 일관하는 사진은 유명하다.

기득권과 권력으로부터 뭔가 시혜를 요구하거나 단발성 호의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지난 이명박 정권과 지금 박근혜 정권을 통해 온 몸으로 체감하고 있다. 책에서도 강조하는 것처럼 “뭉쳐야 한다. 힘을 합쳐야 한다. 그래야 힘이 생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주눅 들지 말고. 절대로 본인들의 잘못이 아니다. 절대로 당신들의 잘못이 아니다.

 

이런 책은 초등학교 문고에 반드시 포함해 많은 어린 학생들이 읽어야 한다.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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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 스티븐 제이 굴드 자연학 에세이 선집 3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현암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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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런 종류의 책을 읽으면 멘붕이 온다.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 활동하면서 가장 애를 먹는 부분이 바로 이런 종류의 책을 읽고 서평을 써야 할 때다. 인문/사회 분야의 책들은 평소에도 관심이 많고 좋아하는 분야라 책을 읽는 동안 ‘어떻게 서평을 써야겠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된다. 메모를 하고 머릿속으로 정리를 하면서 책을 읽게 된다. 그런데 과학 분야의 책을 읽을 때에는 그런 과정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어떻게 써야 하지?’ 걱정만 생긴다. 신간평가단은 알라딘만의 특징적인 이벤트다. 신간평가단들이 추천도서를 페이퍼로 작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알라딘 담당자가 도서를 선정한다. 다른 인터넷 서점에서 진행되는 이벤트와는 차별화되어 있다. 나도 그래서 이것을 지원했다. 내가 추천한 도서가 선정이 되면 정말 좋다. 내가 추천한 도서가 선정되지 않더라도 선정된 도서 2권이 인문/사회 분야라면 안심이 된다. 그런데 이번과 같이 과학 분야 도서가 선정되면 걱정부터 앞선다. 인문/사회/과학/예술분야에서 활동하는 다른 분들의 리뷰를 읽어보면 인문/사회/과학/예술 분야 모두 능통하시고 좋아하시는 것 같다.

이 책 「힘내라 브론토사우루스」는 아주 유명한 작가, 스티븐 제이 굴드가 쓴 책이다. 그런데 나는 스티븐 제이 굴드라는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어 봤다. 이 책의 정확한 학문적 분류가 어떻게 되는지 모르겠지만 진화생물학? 분야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학자였던가 보다. 워낙 이 쪽 책을 읽지 않다보니 이렇게 유명한 작가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제이 굴드는 다윈주의의 주류가 가진 한계를 정면으로 비판한 학자로 유명하고 이런 분야의 어렵고 난해한 지식을 대중적 글쓰기로 녹아낸 대중 작가라는 것도 이 책을 읽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뭐, 워낙 팬도 많고 추종자도 많은 양반이니 내가 미안해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고……. 아무튼 결론적으로 나는 이 책도 어려웠다. 700페이지가 넘는 무시무시한 분량도 문제지만 아무리 유머를 담고 쉽게 썼다 하더라도 관심 자체가 없는 분야이다 보니 읽기가 힘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 즉 작고 진기한 주제에서 시작해 나중에 가지를 쳐서 연관성을 늘리며 밖으로 뻗어나가는 양식” (p.17)

 

 

아마 스티븐 제이 굴드의 글쓰기 스타일 인 것 같았다. 아주 작은 일상의 사소한 부분이나 야구기록들에서부터 시작해 결국 자기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학문분야를 접목해 등치시키며 적용하는 것은 탁월한 것 같았다.

특히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안타 기록을 소개하는 부분은 이 책에서 가장 흥미가 가는 부분이었다. 과학 분야, 특히 진화생물학이라는 가장 발전된(?) 과학 분야를 다루는 이 책을 읽는 과학 문외한인 나에게. 이 책의 결론은 “예측할 수 없는 우연으로 점철된 진화의 역사를 섣불리 단정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실제로 스티븐 제이 굴드가 그런 의도로 이 책을 썼는지는 알 수 없다. 이 책을 읽는 다수의 사람들의 결론이 나와 다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에게 결론은 그것이다. 결국 “알 수 없다.” 좀 허탈했다.

아무튼 조 디마지오의 56경이 연속안타 기록과 내가 느낀 이 책의 결론이 처음에는 전혀 관계없는, 그 어떤 연관도 없는 두 가지의 주제이지만 결국 뜨개질 날실, 씨실이 얽히듯 하나의 주제로 추출해 내는 저자의 능력에는 박수를 보내고 싶다. 얼마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으면 나와 같은 과학 문외한도 무릎을 탁 쳤을 정도였다.

조 디마지오의 연속안타 기록은 야구팬이라면 대다수가 알고 있는 대기록이다. 100년이 훌쩍 넘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유일한 기록이고, 현대 야구에서는 결코 뛰어 넘을 수 없는 불멸의 기록이라고 평가 된다. 제이 굴드는 조 디마지오의 경이로운 기록을 확률로 설명한다. 56경기 동안 연속해서 안타를 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복잡하고 복합적인 우연과 우연히 겹치고 상호 작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 디마지오가 쳐낸 공을 충분히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잡지 못하고 안타로 기록된 실제 사례도 확률의 범위에서 보면 일상에서 우리가 흔히 겪는 확률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말장난 같지만 대단한 추론이다. 책에서는 조 디마지오의 56경기 연속안타 기록은 물론 다른 야구의 경이로운 기록들도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하는 아주 가깝고 사사로운 주사위 던지기의 확률의 범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과학과 종교는 중세 이후 급격하게 갈등을 이어왔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 한 쪽이 불경한 맹신이 되어 버리거나 비이성적인 도그마로 판정나기 전까지 피터지게 싸웠다.(물론, 제이 굴드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애초부터 말도 안 되는 일방적인 싸움이었겠지만) 과학이 발전하고 성경을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면서 창조론의 거대한 장벽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때 우리나라에서도 창조과학이라는 유사과학(창조론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는)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도 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다. 많은 책은 아니지만 스티븐 제이 굴드를 비롯한 진화생물학자들의 책을 읽어 보면 결론은 대게 두 가지다.

 

 

<나도 잘 모르겠다>, <우연과 우연이 겹친 결과가 진화다>

 

 

“성경에 그렇게 쓰여 있고 목사님들이 그렇게 설고 했기 때문에 창조론은 토시 하나도 틀리지 않는 절대적인 진리이다.”라고 믿는 사람들의 맹신도 문제지만

“그렇게 비이성적이고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창조론을 믿는 광신도, 근본주의 신자들.” 이라며 조롱하는 진화론자들의 결론도 나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결국 자신들도 잘 모르겠다. 라거나 우연의 영역은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라고 해버린다면 나는 진화론보다는 창조론을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내 신앙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나는 모태신앙(엄마 배속에서부터 교회에 다닌 태생적 신자)인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는 했지만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대학시절이었다. 나름 성경을 많이 읽고 신앙서적에서부터 철학·인문·과학서적을 읽으며 내 신앙을 확인하고 정립하게 되었다. 혹시 내 블로그의 다른 리뷰들을 읽어보셨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굉장히 비판적인 사람이다. 개신교인이지만 누구보다 개신교의 잘못된 부분에 대해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교리도 그렇고 설교비평도 적극적으로 개진한다. 그렇게 꽉 막힌 개신교인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진화론을 믿으라고 한다면 나는 못 믿겠다. 창조론보다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이라고 하지만 결론은 더 모호하고 불확실하다. 저자가 조 디마지오의 연속안타 기록을 언급하는 챕터에서도 그렇다. 역사를 가로지르는 기록의 이면에는 일상적인 확률의 범위가 숨겨져 있고 다만 그것을 인지하고 확인하지 못할 뿐이지, 일상에서도 우연과 우연이 겹친 대단한 진화론적 발견과 진보는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문학적 편향이라 부를 수 있는 오류의 또 다른 원천을 늘 간과한다. 과학의 많은 부분은 이야기 만들기에 의해 진행된다.” (p.354)

“우리가 우연의 역사 속에서 신을 읽을 수 없는 까닭은, 나중에야 알려진 단 한 차례만 발생한 사건에 대해서는 확률을 계산할 수 없기 때문이다.” (p.462)

 

 

과학은 무조건 신뢰할 만한 것일까? 저자가 책에서 이 부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황우석 사태를 통해 과학의 신뢰성이 가진 위험을 상당부분 직접 경험했다. 과학이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그 이야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에 스스로를 가두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당시 황우석은 메시아였다. 국가시스템과 국민 전체를 바보로 만들어 광신을 양산했다. 파급력만 따지면 정말 대단한 사람이다.

그리고 우연의 역사에서는 당연히 신을 읽을 수 없다. 가정 자체가 잘못되었다. 신은 완벽하다고 해야 한다. 불완전한 신이 어디 있나? 여기서 말하는 신이 부처나 마호멧, 시바가 아닌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기독교의 신은 완벽하다. 그래서 신이다. 그런데 그런 종교적 함의를 무시한 채 논리를 전개한다면 기독교와 창조론 반대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속이 후련한 문장이 될 수 있겠지만 기독교와 창조론의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욕먹을 문장이다.

나는 과학은 과학이고, 종교는 종교라고 생각한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종교인들이 어설프게 과학 흉내 내고 이미 기정사실화 되어 있고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들을 유사과학의 힘을 빌려 비판해 보려는 어수룩함은 그만 해야 한다. 그리고 비종교인·진화론자들은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이 가진 종교성 자체를 처음부터 부정하거나 조롱하고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싸우자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대화가 있을 수 없다. 애초에 서로 대화가 불가능한 상대라고 정해놓은 것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스티븐 제이 굴드의 책을 읽고 토론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진화론자들은… 음…. 내가 진화론자가 아니라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진화론을 믿는 분들이 숙고해 보시기를.

 

 

 

마지막으로 책에서 아주 신기한 언급들이 있어서.

 

 

“한국은 교육, 특히 수학과 물리과학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다.” (p.140)

“<뉴욕타임스> 한국의 과학교육을 다룬 기사, 9세 소녀를 인터뷰하면서 그녀의 개인적인 영웅이 누구냐고 물었다. 그녀는 스티븐 호킹이라고 답했다... 계속해서 기사는 한국의 학교에서 과학을 잘하는 아이는 별종이나 외골수로 따돌림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학급에서 가장 인기 좋은 영웅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p.145)

 

 

도대체 어떤 자료를 토대로 저런 결론을 내렸는지 궁금했다. 수학과 물리과학에서 장족의 발전을 이루었나? 여러 번 말하지만 내가 과학 문외한이라 몰라서 그런 건가? 수학·과학 올림피아드 같은 것에서 입상하는 것은 종종 봤지만 그것은 거의 중학교 수준에서 거둔 성적 아니었나? 특별히 카이스트나 포항공대, 서울대 공대에서 대단한 연구가 있었나?

뭐, 맞는 말도 있다. 한국의 학교에서 과학을 잘 하는 아이는 대부분 수학도 잘 하는 아이일 것이다. 영재나 수재가 아니라면 좋은 학원, 비싼 과외를 통해 좋은 과학 성적을 받았을 테고, 그런 아이는 학급에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거두는 아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런 아이라면 외골수는커녕 교사와 학부모로부터 전폭적인 지원과 응원을 받을 것이다. 접근은 달랐지만 결론은 같다. 씁쓸한 현실이다. 흐흐

 

 

과학은 과학대로, 종교는 종교대로 가만 좀 놔두자.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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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소개된 주요 건축물들이 서울이군요. 저는 대구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 전 자취를 했었는데요. 행정구역은 대구광역시 수성구 두산동이었습니다. ˝수성구˝는 대구에 사시는 분이 아니시더라도 한 번 쯤은 들어보셨을 행정구역일 겁니다. 강남만큼 학구열이 높기로 유명한 곳이죠. 이른 바 돈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저도 그곳에 있는 원룸에서 자취를 시작하기 전까지는 그런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수성구라도 어떤 동에 사느냐에 따라 천양지차입니다. 제가 살았던 두산동은 강남 학군 뺨 치는 학부모들이 모여 사는 알짜배기 수성구에 비하면 거의 ˝슬럼가˝ 가깝습니다. 아주 유명한 나이트 클럽과 유흥주점이 모여 있는 곳이다 보니 모텔이 엄청나게 많고요. 원룸이나 빌라에 살고 있는 사람 중 상당수가 유흥업에 종사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제가 살던 두산동과 ˝알짜배기 수성구인 범물동˝ 사이에 수성못이 있는데요. 수성못을 사이에 두고 양 옆이 확연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그런데 수성구의 슬럼가인 두산동에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대우 트럼프 월드˝와 ˝SK리더스뷰˝라는 메이커의 초고층 아파트였습니다. 50층 가까운 높이로 지어지는 두 아파트를 2층 빌라의 원룸 창문으로 바라보는 일은 기괴했습니다. 몇 년 안에 초고층 아파트가 지어지고 이곳은 또 돈 많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습니다. 수성못에서 보면 주택이나 빌라로 가득했던 두산동 쪽에 마천루 두 채가 우뚝 솟아있습니다. 너무 어울리지 않는 풍광이었습니다. 같은 수성구지만 범물동이 될 수 없는 두산동 주민들에게 더 큰 위화감을 조성한 위악스러운 건축이었습니다. 물론, 초고층 아파트 지하에 대형할인마트가 입점하면서 두산동에 사는 사람들도 편하게 장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멋진 초고층 아파트의 입구를 나서면서 내가 살고 있는 몇 평 남짓한 원룸으로 돌아가는 속내는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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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평전 - 조선 후기 민족 최고의 실천적 학자
박석무 지음 / 민음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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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십 수 년 전, 강진에 있는 다산초당에 갔었다. 수능을 치고 친구들과 함께 전라도 여행에 나섰는데 그 일정 중 하나가 다산초당 방문이었다. “우리들 스스로 동서화합, 전라도와 경상도의 화해를 위해 우리가 전라도를 가보자.” 성인이 되는 문턱에서 터져 나온 전적인 객기와 호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와 친구들은 경상북도 포항에 살고 있었다. 아는 대학생 형 몇 명과 함께 봉고차를 타고 생전 처음 88고속도로를 탔다. 담양IC를 나서려 하는데, 친구 한 명이 걱정스러운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경상도에서 온 티 내지 마라 하던데? 경상도 차면 길도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하드라.” 명색이 동서화합을 위해 떠난 여행인데, 전라도에 들어가기 직전 이상한 소리를 하는 친구 녀석을 응징했다. 한편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하는 여행길이었다. 그때만 해도 내비게이션이 없었다. 전적으로 이정표와 도로지로를 보며 찾아다니는 여행이었다. 담양IC에서 통행료를 계산한 후 직원 분에게 길을 물었는데, 웬걸~! 너무 친절하게 대답해주셨다. “경북 번호판이네요. 어디서 오셨어요?” 바보들……. 그때는 자동차 번호판에 지역이 명기되어 있었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않아도 번호판만 보면 어디 지역에서 온 차량인지 뻔히 알게 되는데…….

포항에서 왔다고 대답하니까 어이구 멀리서 오셨다고 경상도 차보기 힘든데 반갑다고 길을 아주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쳐주셨다.

아무튼 담양, 광주, 목포, 해남, 고흥, 강진, 순천을 여행했는데 너무 좋았다. 무작정 들어간 허름한 시골 식당에서 생전 처음 맛보는 남도 음식에 모두들 넋을 잃었다. 사람들도 너무 친절했다. 첫 전라도 여행에서 가장 좋았던 여행지 두 곳은 망월동 국립묘지와 다산초당이었다.

다산초당은 당시만 해도 일대가 개발되거나 수리·보수되기 전이었다. 주차장에서 초당까지 올라가는 좁은 길 양 옆으로 늘어선 대나무 숲이 장관이었고 마침 안개가 많이 끼어 있어서 환상적인 운치를 경험했었다. 역사시간에 선생님이 열변을 토하며 설명하시던 다산 정약용의 초당이 너무 초라하고 작아서 놀랐다. 그나마도 원래 초가집이던 초당을 기와집으로 새로 만들었다는 이 책의 설명을 읽고 나니 원래는 얼마나 보잘 것 없었을지 짐작이 갔다. 건물이나 선생의 거처는 초라했으나 초당 뒤편으로 펼쳐진 남해 바다를 장관이었다. 이후에 재차 방문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건물도 많이 들어서고 일대가 개발이 많이 되어 있다고 하는데 예전에 봤던 그 운치와 분위기를 지금은 느낄 수 없을 것 같다.

 

이 책 「다산 정약용 평전」국내 다산 정약용 연구의 전문가이자 권위자인 박석무씨가 썼다. 워낙 유명한 역사적 인물이고 학교에서도 배우는 인물이기 때문에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모르는 것이 훨씬 많았다. 책은 다산의 생애를 순차적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따라 읽는 것이 큰 재미다. 책의 두께만큼이나 배울 수 있고 현 시대에 적용해야 할 적용점이 많았다.

 


 

“다산이 추구했던 학문의 궁극적 목적이나 실현하고 싶던 국가에 대한 목표는 바로 공정하고 공평한 세상의 실현이었다.” (p.20)

“다산은 「원덕」이라는 글에서 타고난 착한 성품을 행동으로 옮기면 덕이 된다고 했다. 곧 성(性)+행(行)=덕(德)으로, 위대한 철학의 탄생이었다.” (p.624)

 

무엇보다 다산은 실천적 지식인이자 학자, 정치가이자 철학자였음을 알 수 있다. 단순히 책만 쓰고 글만 쓰는 지식인이 아니었다. 다산은 한 고을을 맡은 목민관이었고 임금의 어명을 받아 암행어사로도 활동했다. 그래서 자신의 글과 책에서 강조한 면을 실제 정치와 행정에 적용한 실천가였다.

 


 

“갓 태어난 유아에게 도 군포를 매기는 황구첨정과 이미 세상을 떠나 무덤 속에 뼈만 남아 잇는 부재자에게도 세금을 물리는 백골징포의 기막힌 제도” (p.51)

 

조선후기 삼정의 문란이 결국 왕조를 몰락으로 이끈 중요한 계기가 되었는데, 다산은 이것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단지 뇌물과 인맥으로 벼슬자리에 올라 탐관오리가 되는 여느 정치가, 행정가들과는 달랐다. 우선 그는 백성들의 현실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만약 실천적 학문에 관심을 두지 않은 벼슬아치였다면 백성들의 궁핍한 삶과 헤어날 수 없는 불행에는 눈을 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후기 대부분의 벼슬아치들과 목민관들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다산은 자신이 맡은 고을의 문제와 구조적 폐해를 정확하게 인식했고 그것을 혁파하기 위해 노력했다.

 


 

“실학자 다산은 학문이 실용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학문으로 여길 수 없다는 확고한 신념을 지녔다.” (p.342)

 

그것은 곧 수많은 저술을 남긴 동력이 되었다. 경세유표, 흠흠신서, 목민심서 등은 궁핍하고 참담한 백성들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데서 출발했다. 백성들이 대수롭지 않은 병에도 죽어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을 인식하고 의서를 펴내기도 했다. 한양에 살거나 큰 고을에 살고 있다면 의원을 찾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산간벽지에 살고 있는 백성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이런 상황을 가슴으로 이해하고 아파한 다산은 자신의 지식과 연구를 통해 의서를 편찬한 것이다.

다산의 이런 실천적 학문과 행정은 이후 백성들의 마음을 얻었다. 유배 길에 떠나는 그를 향해 백성들이 진심으로 마음 아파하고 애통해 했다는 이야기는 이것의 방증이다.

 


 

“‘마음속의 이치’는 관념일 뿐, 아무런 공효(功效)가 없다.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야만 인의예지의 공효가 있지,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p.171)

 

당대 주류 학문이자 조선의 통치이념이기도 했던 성리학을 바라보는 다산의 관점도 철저하게 실천적이다. “‘마음속의 이치’는 관념일 뿐”이라는 다산의 일갈은 주류 성리학적 구조를 뒤흔드는 혁명적인 선언이다. 아무런 공효(공을 들인 보람이나 효과)가 없는 관념론적인 문제를 가지고 정파 싸움을 하고 당쟁을 하는 무리들을 향한 싸대기인 것이다. 다산의 일생은 행위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는 공효에 주목되었다.

 


 

“18세기 후반, 비록 영조의 탕평책으로 남인들이 미관말직에라도 오르던 때였으나, 역시 권력의 중심은 노론과 소론에 있었고 남인은 소외된 세력임에 분명했다.” (p.77)

 

어쩌면 다생의 태생적 정체성이 이런 실천적 일생을 살게 한 원동력이라고도 볼 수 있다. 영·정도 시절 권력에서 배제된 남인 세력에 속한 다산이었기 때문이다.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고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가 신진 남인 세력을 중용하기는 했으나 다산의 일생은 비주류였다고 봐야 한다. 영·정조 시절이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라고 역사 시간에 배우기는 했지만 이미 백성들의 삶은 파탄 지경이었다. 조선 왕조 내내 전쟁이 지속되었고 당쟁은 격화되었다. 그 속에서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 것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주류를 형성한 세력들은 당쟁에 치중하고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주류 남인세력들이 모두 다산처럼 훌륭한 지식인이 아닌 것을 보면 다산의 삶은 칭송받을 만하다. 아무리 정치적으로 비주류라 하더라도 입신만을 위했다면 적절하게 타협하고 정치적으로 처신하면서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그야말로 시군시신(是君是臣)이라. 그 임금에 그 신하라는 뜻이니, 다산이 없는 정조, 정조가 없는 다산의 모습은 설정할 수가 없다.” (p.287)

 

성균관에 들어온 지 6년 만에 급제한 다산을 든든하게 지켜준 이는 정조다. 정조가 없었다면 다산이 없었을 것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남인들은 말단 벼슬자리도 힘든 정치적 상황이었지만 정조는 그런 정치적 상황을 넘어서, 다른 정파의 관료들도 다산을 인정할 수밖에 없도록 상황을 조성했다.

 


 

“노론 벽파의 영수로 영의정으로 있던 심환지 역시 경연 석상에서 ‘상소문이 좋고 그의 심사도 광명스럽다’라고 극찬하였으며” (p.222)

 

6년 동안의 성균관 생활은 이후 다산이 백성을 위하는 실천적 목민관이 되고 후세에 보석과 같은 책을 전해줄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임금이 참여하는 경연과 술자리에서조차 정조는 다산의 글 솜씨가 많이 전해지도록 애쓴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노력으로 남인의 반대 노론 벽파의 영수인 심환지에게조차 다산의 글 솜씨와 심사를 인정받게 만들었다. 물론, 이후에 다산이 정승에까지 오르지는 못하지만 정조의 복심이었음은 분명한 것 같다.

 


 

“다산이 임금으로부터 총애를 받고, 그의 학술이나 글재주가 높아갈수록 시기하는 사람도 늘고 그를 해치려는 무리들이 패거리를 지어 비방하기 시작했다.” (p.148)

 

당연한 이치겠지만 정조 임금의 총애를 받는 다산을 싫어하고 시기하는 무리가 생겼음은 당연하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다른 것이 없다. 지금도 그렇다. 하물며 지금 연예인들도 어떤 예능프로그램에 출연해 갑자기 인기가 많아지고 하면 팬들도 많아지지만 안티도 많아지게 마련이다. 정조 당시 비주류 젊은 관료인 다산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지나치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정조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세손 시절부터 당쟁을 지켜봐 왔고 자신만의 힘으로는 반대파를 이겨낼 수 없었다. 그래서 성균관을 통해 젊은 관료들을 키워내고 힘을 축적했다. 하지만 이것은 결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정조는 끊임없는 암살과 암투의 시도를 벗어날 수 없었고 다산 또한 음해와 시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젊은 시절 같은 남인으로 가까이 지내며 절친했던 친구 이기경은 천주교 문제로 입장을 달리하면서 다산의 일생을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대표적인 악연의 인물이었다.” (p.538)

 

결국 다산은 젊은 시절 잠시 빠졌었던 천주교 문제로 인해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반대파의 음해가 아니라 젊은 시절 절친했던 친구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단지 이기경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로부터의 공격과 음해가 정조의 과도한 다산에 대한 총애 때문이었는지, 책에서의 설명처럼 다산이 암행어사로 임무를 수행할 때 피해를 입은 탐관오리들과 연관된 사람들의 복수로 연유한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산 자신의 고백서이자 반성문인 「자명소」가 생생하게 존재하고, 어떤 기록에도 그가 천주교 신자였다는 반대파의 명확한 증거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일부 천주교 관계자들이 다만 외국인들의 믿기 어려운 기록이나 자료를 근거로 귀양살이 이후에도 다산이 신자 생활을 했다는” (p.224)

 

나도 이 책을 읽기 전에는 다산이 자신의 천주교도로서의 정체성을 끝내 부정하지 않아 18년이라는 유배생활을 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렇지 않다고 한다. 「자명소」라는 일종의 고백서이자 반성문의 일부가 책에 실려 있는데, 다산은 한 때 천주교에 빠지기는 했지만 천주교가 조선에서 교세를 확장하기 시작하면서 제사를 지내지 않아야 한다는 교리를 내세웠을 때 자신은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천주교를 버렸다고 고백한다. 실제로 천주교인을 체포하는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저자인 박석무씨는 이후에 한국의 천주교 측에서 다산이 천주교임을 전하고 외국인들의 신빙성 없는 자료를 근거했다고 주장 한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다산은 천주교인이 아님에도 그로 인해 파직 당하고 유배생활을 한 것이다. 그것도 끈질기고 집요한 예전 친구로 인해서 말이다.

 


 

“18년의 유배살이에서 마침내 풀려난 다산은 1818년 9월 14일 고향의 여유당으로 돌아왔다.” (p.507)

 

하지만 이 책은 18년의 이 유배생활을 대하는 다산의 태도와 삶의 방향에 박수를 보낸다. ‘친구 놈이 나른 천주교인으로 음해해 이 촌구석까지 내려와 있다니! 못 살겠다.’가 아니라 끊임없이 책을 쓰고 아들들과의 편지 왕래를 통해 자신의 가르침을 전했다. 유배가 풀려난 뒤에도 벼슬자리를 기웃거리지 않고 후학양성과 유배생활 중 완성하지 못한 저술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실천적 학문을 하고 그것을 민치(民治)에도 적용해 실제 백성들의 아픔을 덜어 준 다산의 학문과 업적이 그렇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고 다산에 대한 책이나 평전 또한 많지 않은 것이 책을 읽는 내내 궁금했는데, 책의 말미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 탄생 200주년기념 논문집」 김광진 다산의 만민개로사상(萬民皆勞思想)을 높이 평가, 사회 경제 사상의 한 대목을 설명 선비라는 양반 계급의 죄악과 무위도식을 통렬하게 폭로 비판하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서 토지에 대한 봉건적 지배권을 박탈함으로써 그들의 특권의 경제적 토대를 완전히 깨트려 버리고 그들도 생산 노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먹지 못하게 하는 혁신적인 최고의 토지 강령을 여전법에서 관찰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p.595)

 

 

북한에서는 다산 탄생 200주년을 맞아 학술적으로 큰 작업을 했다고 책에서는 소개한다. 그 중에서도 다산 선생이 강조했던 <여전>의 개념은 다분히 공산주의·사회주의적이다. 그래서 오히려 북한에서는 다산에 대한 연구에 집중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은 쉽게 말하면 공동경작개념이다. 무엇보다 지주의 봉건적 토지를 몰수해 일반 백성들이 공동 경작한다는 것이 북한에서는 연구할 만한 주요한 가치였겠지만 한국에서는 국사시간에나 배우는 과거 이야기에 불과했을 것이다. 현 시대에도 다산이 주창했던 <여전>과 비슷한 경제정책은 한국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정책이다. 부동산과 금융을 손에 쥔 일부가 대다수를 지배하는 국가에서 <여전>은 빨갱이 정책이다. 당장 친노종북으로 몰리게 될 것이다. 참...씁쓸하다.

그렇다고 한국에서 다산 선생을 연구하지 않는 것은 아닐 텐데, 더 많은 책이 출간되기를 희망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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