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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철학자들 - 철학은 어떻게 정치의 도구로 변질되는가?
이본 셰라트 지음, 김민수 옮김 / 여름언덕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큰빗이끼벌레’ 라는 벌레를 나는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사진을 통해 본 큰빗이끼벌레는 혐오 그 자체였다. 영화 에어리언에 나오는 괴물같이 보이기도 하고 바다 깊은 곳에 사는 심해생물 같이 보이기도 했다. 색깔도 이상하고 모양도 이상한 이 벌레가 한 가득 모여 있는 강을 보고 있으면 당장에라도 토악질을 하고 싶을 지경이다. 뉴스에 따르면 이 벌레는 악취마저 내뿜는 신공을 가졌다고 한다. 이명박 집권 시절 수십조 원을 쏟아 부은 4대강 공사 현장에서 이 벌레가 출몰하고 있다고 한다. 참 대단한 양반이다. 작년까지는 시퍼런 녹조가 강을 뒤덮더니 이제는 그것으로 모자라 벌레를 까지 4대강에 창궐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큰빗이끼벌레에 대한 기사가 포털을 도배한 며칠 뒤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교수의 기사였다. 박석순 교수라고 4대강 공사에 적극적으로 찬동한 인사가 있는데, 이 사람이 인터뷰를 통해 4대강 공사 현장에 창궐한 큰빗이끼벌레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녹조는 가뭄 탓이고 큰빗이끼벌레는 수질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에서 4대강 공사로 인한 수질 악화로 생기게 된 것이 녹조와 큰빗이끼벌레라고 주장한 것과는 정반대의 주장이다. 나는 그쪽 분야의 전문가도 아니거니와 제반 지식도 전무하기에 어느 쪽의 논리가 더 타당한지 살펴볼 유일한 방법은 양쪽의 이전 주장을 찾아보는 것이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는 제쳐두고 박석순 이 사람은 이명박이 대운하 주장을 했을 때부터 적극적으로 찬동하고 논리를 뒷받침해준 사람이었다. 환경단체와 시민단체가 무슨 이득을 얻고 영리적 목적을 취하려고 그런 주장을 하겠나.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교수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이 편향된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신의 전문성을 이용한 것이 더 터무니없다고 본다. 그의 말대로 녹조와 큰빗이끼벌레가 4대강 공사의 긍정적 효과라면 공사 이전에 녹조와 큰빗이끼벌레를 앞세워 홍보를 했어야 한다. 4대강 공사를 하고 나면 녹조와 큰빗이끼벌레가 생기는데 그것은 4대강의 수질이 좋아진 것이다. 그러니 강 색깔이 이상해지고 악취가 나고 물고기가 떼죽음을 당해도 걱정하지 마라. 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입 다물고 가만히 있다가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벌어지자 이것을 반대쪽의 주장도 있는 것처럼,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처럼 만드는데 앞장서고 있다. 나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환경단체, 시민단체 주장이 전적으로 옳은 것은 아니다. 내 주장과 같은 다른 주장도 있다. 이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싶은 것이다.
4대강 공사는 감사원에서도 여러 가지 지적이 나왔고 실제로 4대강 공사 주변지역에서는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는데 아무런 조사나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한 자리 숫자로 떨어지면 시작하려나 모르겠다. 아무튼 4대강 공사에 찬동한 소수의 교수들과 전문가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반대한 사업을 강행했고 지금 엄청난 부작용에 직면해 있다. 지난 대선 전에는 이것을 모두 해체해야 한다느니, 전면 재조사를 하겠다느니 말이 많았다. 박근혜씨가 집권하고 나니 이런 말들이 뒤로 쑤욱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박석순 같은 사람이 다시 나와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는 실정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사업을 벌이고 유지·보수하는 것도 모두 우리의 세금으로 하겠다는 데, 별로 관심이 없다.
이 사람들 처벌해야 할 텐데, 할 수 있을까?
“자네는 히틀러처럼 천박한 사람이 독일을 통치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중요한 것은 문화가 아닐세. 그의 경이로운 손을 보라고!” (p.163)
위대한 철학자 하이데거가 히틀러와 나치에 부역한 인물인 것을 알지 못했다. 전혀 알지 못했다. 음악가 바그너 등은 알고 있었지만 하이데거가 부역자라는 것은 바그너와 같은 음악가의 경우보다 더 충격이었다.
“내가 한 일 가운데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은……. 기본적으로 학자들의 의견을 공개해 그것을 생산적인 토론으로 이어지게 한 것이다.” (p.349)
카를 슈미트의 나치 부역 전력은 알고 있던 사실인데, 충격적인 것은 그의 변명이다. 나치에 대한 부역을 생산적인 토론의 대상으로 치환할 수 있다는 대담함이 놀랍다. “아~ 5.16은 말이죠. 여러 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사건입니다. 당시 5.16을 찬성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 말이죠.” 라는 논리와 무엇이 다른가? “일제 시대 때는 말이죠. 다들 그랬어요. 나만 친일했나?”라는 변명과 무엇이 다른가? 정치 철학가이자 존경받는 사상가이기도 했던 카를 슈미트가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면 이후에는 처절하게 반성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과거를 정당화 하는 일에 매진했다.
“많은 철학자들은 오래된 가치관과 제도를 파괴하는 일에서부터 유대인 추방과 교육과정의 나치화, 유대인 비방과 전쟁 신격화를 위한 각종 연구소 설립에 이르기까지 히틀러가 대학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준 핵심적인 조력자들이었다” (p.140)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를 포함해 수많은 철학자들이 나치를 만들고 유지하는데 전심을 다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당장 총살형에 처해지는 위협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부역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동조했다. 나치에 부역하면 일자리를 유지하고 더 좋은 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자신을 신격화한 히틀러의 광기에 동조하고 그것에 논리를 만들어 주는 것으로 자신들의 부역을 정당화 했다. 이 책 「히틀러의 철학자들」에는 여러 부역자들의 이름이 나온다. 잘 알려진 철학자들이 더 많다.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지 8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조용하고 얌전한 이 사람들이 맡았던 역할은 단 한 번도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 내가 말하는 이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철학자들이다.” (p.6)
이들은 히틀러와 나치의 핵심적인 조력자들이었음에도 제대로 검토된 적이 없다고 한다. 나는 지금까지 나치 부역자들은 전후 강력하게 처단 당했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샅샅이 뒤져 부역자들을 잡아내고 있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하이데거는 ‘단순 동조자’로 분류되어 전후 프라이부르크 대학의 명예교수로 추천되었으며, 계속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니 지금까지 하이데거가 그렇게 유명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부였던 한나 아렌트와 사르트르가 직·간접적으로 하이데거를 지지하고 사상의 본류로 삼았던 점이 이후에도 하이데거의 부역 전력이 그다지 부각되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이데거의 나치부역 전력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단순 동조자’도 동조자고 부역자다. 나치 시절 그가 만든 철학과 논리가 젊은이들을 매혹시킨 것이 사실이고, 눈앞에서 벌어지는 학살과 참극에도 눈 감고 있었던 철학자였던 것도 사실이다.
“우리의 유일한 구호는 이것입니다. 나치당과 싸우자! 우리의 입을 막고 정치적으로 속박하는 데 이용되는 나치의 모든 조직을 거부하자!...” (p.324)
“전단을 1만여 장 복사한 후버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독일 전역에 배포했다.”
“후버가 죽고 나서 그의 연금은 남아 있는 가족에게 지급되지 않았다. 후버의 가족을 위해 학생과 동료들이 돈을 모았지만 나치는 이 돈마저 가로챘으며, 후보의 가족을 위해 모금활동을 벌이는 사람은 체제전복자라는 죄목으로 체포했다.” (p.331)
쿠르트 후버 같은 철학자는 나치에 정면으로 맞선 지식인이었다.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로젠베르크와 같이 적절하게 현실과 타협하면서 자리를 지키는 철학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서슬 퍼런 나치에 맞서 목숨을 걸고 정의와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를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결과가 쿠르트 후버의 삶에 그대로 나타난다. 목숨을 걸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싸운 철학자의 최후는 암담하고 초라한 것이었다. 그에 비해 하이데거는 잘 나가는 철학자, 교수, 지식인으로 잘 살았고 지금까지 수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존경받는 사람이다.
한국의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비참한 삶과 오버랩 되는 지점이다.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하고 산 친일파의 후손들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살고 있는데 반해 독립 유공자의 후손들은 참담하다. 한국도 일제 부역자와 친일파들에 대한 처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기득권 보수의 얼굴이라 여겨지던 문창극씨의 역사관이 그렇게 뒤틀려져 있는 것이다. 문창극씨와 그를 옹호하는 세력들에게는 그런 역사관이 당연한 것이다. 정설로 교육되는 역사는 패배주의적이고 편향된 역사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슈미트가 나치주의에 관여한 것은 불행한 시대 탓이었다는 인식이 굳어지고 있다. 따라서 나치와의 관계 때문에 그의 학문적 사상이 지닌 중요성을 편견을 갖고 바라보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p.373)
하이데거와 슈미트가 이룬 학문적 업적이 워낙 대단하고 가치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부역이 정당화 될 수 있다? 그럴 수 없다. 불행한 시대를 맞아 어쩔 수 없이 나치에 부역했다는 논리라면 나치에 목숨을 걸고 맞선 쿠르트와 이름 없는 수많은 지식인, 시민들의 고통과 죽음을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인가? 나치와의 관계와 학문적 사상은 별개의 문제이지만 나치에 부역한 자의 철학이 지금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여전히 교육되고 있다는 것은 당연히 큰 문제가 아닌가? 그나마 나치 부역자들에 대한 처벌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독일의 경우가 이러한 것을 보고 나니 한국의 앞날이 더 걱정이다. 만약 지금의 정권이 정권 연장을 하고 지금의 여당이 계속 과반의석을 넘는 정치적 지형이라면 ‘한국은 미래가 없을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제에 부역하고 친일한 것은 어쩔 수 없는 불행한 시대 탓이었다는 논리가 지배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런 논리가 학교 교과서에 버젓이 실릴지도 모를 일이다. 정말 끔찍하다.
4대강 공사에 대한 전면 재조사와 비리·불법에 대한 수사가 언제쯤 시작될지 모르겠다. 집권 후 지지율이 대폭 하락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전 정권의 비리나 불법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기 마련인데, 지금 박근혜 정권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이렇게 그냥 묻혀 버리는 것은 아닌 지 걱정이 된다. 만약 비리와 불법이 없었고 박석순 교수의 주장대로 녹조와 큰빗이끼벌레가 4대강 공사 이후 강의 수질이 좋아졌다면 수반되는 증거를 더 내놓으면 될 일이다. 그의 말대로 시민단체와 환경단체, 야당과 좌파들의 흠집 내기라면 그것은 잘못된 일이다. 4대강 찬동 인사들과 박석순 교수의 주장이 맞다면 그것대로 국민들에게 사실대로 알려져야 한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 아니고 녹조와 큰빗이끼벌레가 강의 수질을 악화시켰고 4대강 공사를 둘러싼 비리와 불법이 밝혀진다면 처벌을 받아야 한다. 국민의 세금이 20조원이나 넘게 투입된 공사였고 잘못될 경우 돌이킬 수 없는 환경재앙을 맞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어물쩍 넘어가고 덮어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후세대들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부담과 악영향을 떠넘길 수도 있는 문제다.
언제쯤 4대강에 대한 조사가 이뤄질 지 알 수 없다.
히틀러에 찬동한 철학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다. 물론, 그 중에서 처벌받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도 유명한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 같은 철학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 그 얘기는 그렇게 처벌받지 않은 부역자들이 많다는 이야기다. 히틀러에 맞선 철학자들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당사자는 물론 후손들에게까지 그 비참함은 전해졌다.
중요한 것은 제대로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이데거와 카를 슈미트가 분명한 나치 부역자들이었다는 사실.
4대강은 반드시 전면적인 조사가 이뤄져야 한다는 사실들 말이다. 제대로 알아야 한다. 그래야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는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